본 나의 뿌리는 장성한 두 아들에게 뿌리에 대한 상식을 전해주기 위해 만든 내용이다.
서문(序文)
계절이 윤회(輪廻)하듯이 옛사람은 물러나고, 새 사람은 또다시 옛사람이 된다. 이것을 두고 세대(世代)라 하는데, 세(世)는 사람의 한평생을 뜻하고, 대(代)는 대신하여 잇는다는 뜻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가르칠 것도 많다.
그중에 종사(宗史)나 보학(譜學)은 현시대에 중요시하지 않고, 그동안 학교 공부나 취업 등으로 접할 기회도 없었지만, 아버지로서 가르칠만한 학식이나 상식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장자(큰아들) 나이가 입지(立志 - 뜻을 세우는 나이, 30세)가 넘은 지 여러 해 되었고, 공무 생활에 대인관계나 이제 곧 성(姓)이 다른 배우자(처가)도 생길 것이다.
이에 더 늦기 전에 평소 알고 있던 지식을 찾아 한 편의 뿌리 상식을 만들어 전하노니, 귀중한 시간을 내서 꼭 한 번 정독하고 품속에 간직하기 바란다.
혹여, 온라인으로 찾고 싶으면 http://blog daum.net/dosee/8123727에서 보면 된다.
끝으로 꼭 알아두어야 할 주문
1. 문화류씨 35세(35세손)이다.
2. 시조는 대승공(휘 차달)이시다.
3. 본관(관향)은 문화인데 황해도에 있다.
4. 문화류씨 종파는 14개가 있는데, 그중 중문지후사공파이고 파시조는 중문사공 (휘 인수)이시다.
5. 항렬은 33세(지. 재), 34세(선. 현), 35세(제. 호), 36세(환. 간), 37세(영. 황)이다.
6. 계보는 문화류씨 -> 중문지후사공파 -> 진천지파 -> 필선공종중 -> 효열문중 으로 이어진다.
7. 8代 장손(長孫)이다.
辛丑年 1月 1日(陰)
아버지 성현 짓다.
뿌리상식
[일반 상식]
생장점을 찾아 하늘로 치솟는 나무의 근원은 뿌리에 있다. 역사에 남긴 성현(聖賢)들도 하나의 뿌리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근원이 있다. 이렇듯 지구상에 모든 생물체는 뿌리가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생물체 중 하나의 가느다란 줄기가 인간이다. 그 인간들이 집단으로 살면서 씨족(氏族)으로 이어져 부족(部族)사회를 이루었다. 점차 문명이 발달하고 문자가 만들어지고, 학문을 익히면서 성씨(姓氏)와 본관(本貫)이 생기고 시조(始祖)가 생겼다.
우리나라 시조 설화는 BC 2333년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성씨의 시초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 65~?)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시대는 성씨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다. 또 있던 성씨도 소멸하였거나 미약했다. 본관을 갖춘 성씨는 고려 개국과 함께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나라 성씨 70~80%는 고려 시대에 생겼다.
임금이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고향 지명을 따서 성관(姓貫)을 내렸다. 이것을 사성(賜姓) 또는 사명(賜名)이라고 하는데, 성을 받은 신하는 한 겨레의 가장 처음이 되는 조상이니 시조(始祖)가 되고 세(世)수로는 1세가 된다.
세대(世代)는 보통 상대 하세(上代 下世)라 하여, 위로 셀 때는 대조(代祖)라 하고 아래로는 세손(世孫)이라 부른다.
또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중시조(中始祖)라 하고, 한 파계의 첫 번째 조상을 파시조(派始祖)라 한다.
한 시조 아래 세(世)가 오래되고 자손이 번성하면 분적(分籍)이나 분파(分派)를 하게 된다.
같은 혈족(血族) 간의 관계를 표시하는 계통의 돌림 자(字)를 정해서 사용하는데, 항렬(行列)이라고 한다. 돌림자는 대체로 한 대는 이름 앞 자에 한 대는 이름 뒤 자에 쓰는 예가 많다.
조상을 표기할 때는 될 수 있으면 이름을 쓰지 않는다. 부득이 쓸 때는 이름 앞에 휘(諱-꺼릴 휘) 자를 붙여 쓴다. 또 부를 때는 한 자(字)씩 띄어 부른다.
조상의 일반적인 호칭은 00공(公)이라 한다. 이는 조상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으뜸 명칭을 붙여 쓴다.
주로 쓰는 명칭은 시호(諡號)나 벼슬. 사는 집 또는 호(號) 등을 붙인다.
[문화류씨 상식]
문화류씨(文化柳氏)의 본관(本貫), 문화는 고려 태조(왕건)에게 사성을 받은 지명이다. 고려 때는 유주(儒州)라 불렀고, 지금은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文化面) 이다.
문화류씨 시조는 대승공(大丞公) 휘 차달(車達/1世)이시고, 중시조는 문간공(文簡公) 휘 공권(公權 /7世)이시다.
파(派)는 일명, 갑(甲)파. 을(乙)파가 있다. 중시조 문간공 큰 아드님 상서공(尙書公) 휘 언침(彦沈/8世) 자손이 갑파(6개 파)이고, 둘째 아드님 복야공(僕야公) 휘 택(澤/8世) 자손이 을파(8개 파)라 한다.
또 파시조는 중문사공(中門使公) 휘 인수(仁修/11世) 시고, 파명은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祗候使公派)이다.
3世~6世까지는 공가 문헌(公家文獻)에 올라있지 않아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7世, 문간공부터 고려사 등 문헌에 나타나 조선 시대 초기에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렀다.
타 성씨가 우러러보는 문화류씨의 자랑은 단연 족보(族譜)다.
1423년 영락 연간에 만들어진 영락보(永樂譜)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데 아쉽게 전하지 않는다. 1562년 가정 연간에 만들어진 가정보(嘉靖譜)는 다른 성씨 족보의 근간이 되었다.
명문거족이라 일컫는 문화류씨 세덕(世德) 살펴보면,
고려 때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벌족(閥族)이었다. 조선조에 시호(諡號)가 22인이고, 상신(相臣)이 9인이다. 호당(湖堂)은 5인이고, 청백리(淸白吏)가 4인이며, 공신(功臣)이 11인이다. 대과 급제자가 무려 141인으로 고려 시대 4대 명족(류. 최. 김. 이)이고, 조선 시대 8대 성(이. 김. 박. 정. 최. 윤. 류. 홍)이었다.
문화류씨 대동항렬(大同行列)은 고종(高宗) 원년(1864) 갑자보(甲子譜) 수보(修譜) 당시 31世 부터 60世 까지 정하였다. 타 성씨와 다른 점은 오행상생(五行相生)으로 한 대(代)에 두 글자씩 두었고, 세(世)마다 모두 통운(通韻)을 맞춘 것이 다르다.
우리 문중은 효자 문중으로 25世 부터 27世까지 3世에 걸쳐 효자가 여섯 분이고 열부 한 분이 계신다.
일명, 일문 삼세 육효 일렬(一門 三世 六孝 一烈)로 인하여 나라에서 정려(亭閭-효자문)와 증직(增職)이 내려지고, 영의정 심암 조두순(心菴 趙斗淳)의 찬양 글이 전해졌다.
[근래 종사(宗史)]
문화류씨에서 분적(分籍)된 본관(本貫)이 일명, 3산 2주라 하여 선산(善山), 서산(瑞山), 풍산(豊山), 진주(晉州), 전주(全州)류씨가 있다. 하지만 현시대에 학자들의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문화류씨가 연안차씨(延安車氏)에서 분성 되어 동족이성(同族異姓)이라고 한 것은 350여 년 전 거짓으로 쓴 원파록(源派錄)이나 설원록(雪寃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이에 문화류씨 대종회에서 류차동원(柳車同源)이 아님을 천명했다.
파명(派名) 또한 1864년 갑자보(甲子譜)에 처음 지후사공파(祗候使公派)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에 공가 문헌 및 사가 문헌을 연구한 결과 파시조(휘 인수) 최고 벼슬이 중문사로 판명되어 지금은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祗候使公派)로 불린다.
2000년 문화류씨 인구가 284,083명으로 4,179개 본관 중 28번째이고, 우리나라 인구의 0.55%이다.
[주석(註釋)]
시호(諡號) : 임금이나 정승,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
삼한갑족(三韓甲族) : 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
사세오공(四世五公) : 7世.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
9世. 문정공(文正公) 경(璥)
10世. 정신공(貞愼公) 승(陞)
11世. 장경공(章敬公) 돈(墩)
11世. 온정공(溫靖公) 인기(仁琦)
벌족(閥族) :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
상신(相臣) :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호당(湖堂) : 젊고 유능한 문관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을 닦게 하던 서재.
공신(功臣) :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신하.
증직(贈職) : 공신 충신 효자나 학덕이 높은 사람 등이 죽은 뒤에 관직을 주거나 품계를 올려주던 일.
대동항렬(大同行列) : 31세[근(根)O. 인(寅)O]
32세[O열(烈). O걸(杰)]
33세[지(志)O. 재(在)O]
34세[O선(善). O현(鉉)]
35세[제(濟)O. 호(浩)O]
36세[O환(桓). O간(幹)]
37세[영(榮)O. 황(煌)O]
38세[O곤(坤). O헌(憲)]
39세[종(鍾)O. 용(鏞)O]
40세[O영(泳). O승(承)]
직계선조 약사(直系先祖 略事)
시조.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태조(太祖)를 도운 공신(功臣)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贈東國與地勝覽)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수레 1,000량을 만들어 정벌을 도우셨다.' 이에 고려를 개국한 태조에게 삼한벽상2등공신(三韓壁上二等功臣) 봉함(封緘=문서)과 대승(大丞)의 관작(官爵=귀족의 벼슬)을 받으셨다
본관은 시조가 태어난 지명으로 관향(貫鄕)이라고도 일컫는데, 문화라는 지명은 삼국시대에는 유주(儒州)였고, 지금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이다.
시조의 묘는 구월산 남록 초리면 흥학동 인좌(九月山 南麓 草里面 興鶴洞 寅座)에 모시었으며, 묘소 아래 묵방재(墨坊齋) 또는 경사루(敬思樓)라 불리는 재실(齋室)이 있었다. 지금은 북한에서 보존유적으로 지정하고 보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2世. 좌윤공(左尹公) 효금(孝金)
고려태조조(高麗太祖朝)에 좌윤(左尹):[종 4품]을 지내셨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구월산 정령(精靈)인 호랑이의 목에 걸린 은비녀를 꺼내주어, 그 음덕으로 자손이 대대로 경상(卿相=2품 이상의 관직) 이어졌다는 설화가 있어, 호랑이가 문화류씨 수호 동물로 이어졌다.
3世.금환(金奐)
대장군 중윤(大將軍 中尹):[종3품]을 지내셨다.
4世.노일(盧一)
검교 대장군 행산원(檢校 大將軍 行散員)을 지내셨다.
5世.보춘(寶春)
검교 소부소감(檢校 少府少監)을 지내셨다.
6世.총(寵)
검교 소부소감(檢校 少府少監)을 지내셨다.
7世.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 1132~1196)
일찍이 1160년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여러 관직을 거쳐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 치사(致仕)하셨다. 시호(諡號 : 학덕이 많은 사람이 죽은 뒤 임금이 내려준 이름)는 문간공(文簡公)으로 문화류씨의 중시조(中始祖)로 불리고 두 아드님을 두셨으니, 일명(一名) 갑파(甲派)에 휘 언침(彦沈)이요, 을파(乙派)에 휘 택(澤)으로 문화류씨에 큰 갈래가 이루어졌다.
8世. 복야공(復射公) 택(澤)
1194년 문과에 급제하시고 1210년 동지동거(同知童擧)에 선발되시었다. 또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 진현관대제학(進賢官大提學)을 거쳐 1222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復射):[정2품] 에 승진하시고 이듬해 지공거(知貢擧)가 되시었다. 소(疏)는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려 있고, 시(詩)는 해동문선(海東文選)에 실려 있다.
9世. 문정공(文正公) 경(璥 1211 ~ 1298)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시고 여러 벼슬을 거쳐 1258년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재직 중, 김준(金俊) 등 과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주살(誅殺)하고 정권을 왕실에 반환하셨다. 이듬해 공의 고향인 유주(儒州)를 문화(文化)로 개칭하고 현(縣)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광정대부 수문전집정 태학사 감수국사 중서문하 평장사 세자사(匡靖大夫 修文殿集政 太學士 監修國史 中書門下 平章事 世子師):[정2품] 로 치사(致死)하셨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이시다.
10世.정신공(貞愼公) 승(陞 1248 ~ 1298)
시호는 정신공(貞愼公)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셨다. 문음(門陰)으로 1262년에 산정도참판관(刪正都參判官)을 시작으로 관직에 임 하시어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종2품] 에 이르기까지 36년간 범법(犯法)이 없으셔서 왕으로부터 양대은인(兩臺銀印) 1개를 하사받으셨다
11世. 중문사공(中門使公) 인수(仁修)
문음(門蔭 = 조상이 세운 공훈으로 벼슬길에 나감)으로 출사하여 중문사(中門使):[정3품] 에 오르셨다.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祗候使公派) 파시조(派始祖)가 되신다.
12世. 대언공(代言公) 정(靖)
밀직사감찰대언(密直司監察代言)을 거쳐 충혜왕 2년(1341)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하셨다.
13世. 개성윤공(開城尹公) 홍(洪)
개성윤(開城尹)
14世. 중랑장공(中郞將公) 중의(仲宜)
중랑장(中郞將):[정5품]
15世. 예빈시정공(禮賓侍正公) 소로(紹老)
예빈시정(禮賓寺正):[정3품]
16世. 감찰공(監察公) 승조(承祖)
감찰(監察):[정6품]
17世. 주부공(主簿公) 효근(孝根)
주부(主簿):[종6품]
18世. 직장공(直長公) 삼양(三陽)
직장(直長):[정7품]
19世. 사직공(司直公) 종수(宗壽)
사직(司直):[정5품]
20世. 참판공(參判公) 헌민(獻民 1536~1618)
부사직 휘 종수(副司直 宗壽)의 아드님으로 중종(中宗) 31년 丙申(1536) 12월 26일 진천(鎭川)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시고, 글재주가 출중하시더니 장성해서는 충후(忠厚)한 장덕(長德)으로 일컬으셨다.
음사(陰仕)로 참봉(參奉). 습독(習讀). 사과(司果). 호군(護軍):[정4품] 을 지내시고 만년에 고향 진천으로 돌아오셔서 판서 신집(申集)으로 더불어 상산기로회(常山耆老會)를 조직 춘추로 강신(講信)하고 향중의 자제들을 모아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을 가르치셨다.
광해군(光海君) 10년 戊午(1618) 3월 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3세로 진천 문봉리 동곡(文鳳里 東谷) 자좌(子坐)에 모시었다.
공께서 돌아가시자 시암 조상우(時庵 趙相愚), 회헌 이정영(悔軒 李廷英)등이 만사(挽辭)를 지어 애도하였으며, 후에 호조참판(戶曺參判):[종2품]에 증직되셨다.
배위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증참의 응진(贈參議 鷹震)의 따님인데 3남 2녀를 두셨다.
21世. 필선공(弼善公) 기문(起門 1564~1639)
호 오촌(梧村), 쌍청당(雙靑堂). 명종(明宗) 19년 甲子(1564)에 태어나시고, 성품이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셨으며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탐구하여 문장은 물론 서예도 능하셨다.
선조(宣祖) 22년 己丑(1589)에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하고 34년 辛丑(1601)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셨다. 정자(正字), 박사(博士), 주부(主簿)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재직 중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셨다. 그 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시고 38년 乙巳(1605) 정월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셨다가 동년 4월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시고 이듬해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가셨다.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결성(結城), 증산현감(甑山縣監). 전주판관(全州判官).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을 두루 지내시면서 선정(善政)을 베푸시고 내직으로 들어와 교리(校理). 전적(典籍)을 거쳐 13년 辛酉(1621) 9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하시고 이듬해 3월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정4품]에 전임하셨다.
당시 폐모(廢母)의 의논이 일어나자 그를 거부하시다가 권신(權臣)들의 뜻을 거슬러 마침내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가셨다가 동년 11월 파직되어 고향 진천 벽오촌(鎭川 碧梧村)으로 돌아오셨다.
집 앞에 잣나무 두 그루를 심고, 쌍청당(雙靑堂)이라는 당호를 걸고 여년을 즐기다가 향년 65세로 돌아가시니 인조(仁祖) 17년 己卯(1639) 12월 22일이었다. 이듬해 2월에 고을 북쪽 부곡(釜谷), 지금 연기군 서면 부동촌 동록 유좌(燕岐君 西面 釜洞村 東麓 酉坐)에 안장되셨다.
* 戊子(2008) 3월 16일(陽) 21世 부터 26世까지 보은군 삼승면 둔덕리 358-1에 천장(遷葬)하였다.
22世. 도사공(都事公) 형국(亨國 1596~1670)
호 봉황정(鳳凰亭). 선조(宣祖) 29년 丙申(1596)에 연기(燕岐)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의 유명(遺命)으로 과거 공부를 폐하고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 호란(胡亂)에 동지 10인으로 더불어 창의(倡義), 북상 도중에 화전(和戰)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파병(罷兵)한 후 군량을 관청에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만년에 동진강(東津江) 위에 정자를 지어 봉황정(鳳凰亭)이라 이름하고 친붕(親朋)으로 더불어 시주(時酒)로써 스스로 즐기니 이름난 관리들이 제영(題詠)하여 당세에 명망을 떨치셨고 수창록(酬唱錄)이 전하고 있다.
효종(孝宗) 2년 辛卯(1651)에 나라에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정5품] 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초야(草野)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5세로 연기군 남면 둔덕산 아래 시목성 자좌(柿木城 子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23世. 첨정공(僉正公) 세장(世檣 1620~1674)
광해군(光海君) 12년 庚申(1620) 9월 26일 생부 휘 창국(昌國)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풍채가 훌륭하고 충효(忠孝)의 천성을 타고 나셨다. 선비(先妣=어머니)께서 전란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기고 복수할 뜻으로 무술(武術)을 익혀 마침내 효종(孝宗) 2년 辛卯(1651)에 무과에 급제하셨다.
정익공 이완(貞翼公 李浣)의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가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종4품]에 이르시더니 10년 己亥(1659)에 효종께서 승하(昇遐)하신 후 벼슬을 그만두고 자정(自靖)하셨다.
아드님 세 분을 두시고 甲寅(1674) 7월 20일 55세로 돌아가시니 도사공 묘 뒤 계좌(癸座)로 모시었다.
24世. 첨지공(僉知公) 중배(重培 1652~1738)
호 양호당(養浩堂). 효종(孝宗) 3년 壬辰(1652) 10월 8일 진천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시더니 10여 세에 논어(論語) 및 사서(史書)를 통독하셨다. 기품이 단엄하고 천성이 효우다워 몸가짐이 예법에 합당하셨으며, 언론이 추상(秋霜)같고 행사에 규범(規範)이 있으셨다. 제곡 황세정(霽谷 黃世禎)의 문하에 수업, 많은 사우(士友)와 더불어 교류가 많았으며 특히 필법(筆法)에 조예가 깊으셨다. 이에 단암 민진원(丹巖 閔鎭遠)이 조정에 천거하여 이르기를 “학문을 종사하고 효제(孝悌)를 힘써 행하였다.” 하였다.
수직으로 첨지(僉知):[정3품]에 가자(加資) 되시고 영조(英祖) 14년 戊午(1738) 9월 14일 졸하시니 향년 87세로 연기 부동(燕岐 釜洞)의 필선공(弼善公) 묘소 후곡 임좌(後谷 壬坐)에 모시었다.
25世. 교관공(敎官公) 시명(始明 1687~1749)
숙종(肅宗) 13년 丁卯(1687) 3월 6일 태어나셨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혹 밖에 나가 맛 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 드리고 비록 가세가 빈궁하였으나 반찬을 떨어뜨리지 않으셨다. 고을 수령(守令)이 듣고 아름답게 여기어 매월 쌀과 고기를 보내어 도와주었다. 영조(英祖) 4년 戊申(1728)에 부친께서 진천 선영(鎭川 先塋) 성묫길에 반란(叛亂)을 만나셨는데, 공이 듣고 황급히 달려가 아버지를 모시고 난리를 피함이 엄연하므로 원근의 선비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두 칭찬하여 “참으로 효자라” 하셨다.
일찍 유학(儒學)에 종사하여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시니 고을에서 추중하고 천장(薦壯)을 올렸다. 순조(純祖) 32년 壬辰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셨다.
26世. 용와공(庸窩公) 행직(行直 1725~1787)
호 용와(庸窩). 영조(英祖) 원년 乙巳(1725) 1월 5일생이신데,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아 평소에 곁을 떠나지 않고 만약 특이한 음식을 얻으면 품속에 싸서 돌아와 어버이께 드리셨다.
부친께서 3년을 병석에 계심에 공이 힘을 다하여 간호하고, 한편 어육(魚肉)을 떨어뜨리지 않으셨으며, 그 병세가 악화함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흘려 하루 저녁의 명을 연장하고 막상 돌아가심에 송종(送終)의 절차를 한결 예제(禮制)에 쭟아 행하셨다.
그 후 모친께서 병환으로 7년 남짓에 가산(家産)이 핍박하여 가히 말할 수 없었으나, 심력을 다하여 공양(供養)에 조금도 결핍(缺乏)함이 없으니, 지주 임공덕항(地主 林公德恒)이 소문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매양 쌀과 닭 등을 보내 주었다. 마침내 돌아가심에 한결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고 기일이 닥치면 3일 동안 주육(酒肉)을 삼갔다.
젊어서 일찍 외종숙(外從叔) 남당 한원진(南溏 韓元震)의 문하에 출입하여 행검(行檢)이 바르고 규구(規矩)에 엄하여 항상 자제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천하사(天下事)는 오직 의(義)와 이(利) 일 따름이다. 의는 천리(天理)에서 나오고 이는 인욕(人慾)에 속하나니 사자(士子)는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분별해야 할 것이다.” 하셨다.
임종(臨終)에 정신이 맑아 조금도 괴로운 빛을 보이지 않으시고 부녀(婦女)를 물리치고 자리에 반드시 누워 태연히 돌아가시니 때는 정조(正祖) 11년 丁未(1787) 정월 16일로 향년 63세 셨다.
일두 조정경(一蠹 趙鼎慶)이 만사(挽詞)를 지어 애도(哀悼)하였고, 도백(道伯)이 공의 효행을 조정에 계달(啓達)하였다.
27世. 효자공(孝子公) 제화(齊華 1760~1789)
영조(英祖) 36년 庚辰(1760) 3월 16일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독실하여 어버이의 뜻을 순종함에 지극하시더니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심에 손가락을 깨어 진혈(進血), 연명(延命)을 시도하셨으나 마침내 돌아가심에 양형(兩兄=제태. 제형)으로 더불어 여막(廬幕)에서 집례(執禮)에 성의를 다하시고 슬픔이 절도(節度)에 넘어 담제(禫祭) 전에 돌아가시니, 나이 30이셨다.
열부(烈婦), 결성장씨(結城張氏 1769~1822)는 석주(錫疇)의 따님으로 천성이 온숙(溫淑)하고 자량(慈諒)하여 예절이 매우 밝으시더니, 출가 후 구고(舅姑)를 섬기고 부군(夫君)을 대함에 한결 뜻을 순종하고 행동이 여칙(女則)에 합당하여 질언(疾言)과 거색(遽色)이 없으셨다.
나이 21세에 공(公)께서 돌아가셨는데 이에 앞서 손가락을 깨어 진혈(進血)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고 즉시 따라 죽으려 하니 가인(家人)이 심히 경계하고, 한편 위로 시어머님이 계시고 아래로 갓난 어린애가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여 3년 동안을 질대(絰帶)를 벗지 않고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성의와 공경을 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옛적 여사(女士)의 풍도(風度)가 있다.” 하였다.
이렇듯 일문 삼세(一門 三世 = 문화류씨 25世. 26世. 26世)에 효자가 6인(시채. 시명. 행직. 제태. 제형. 제화), 열부가 1인(결성장씨)이 났으므로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계달(啓達)하였다. 그리고 심암 조상공두순(心庵 趙相公斗淳)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일렬도 아름다운데 육효를 겸했으니 단정과 화고가 시골에 빛나도다.” (“一烈猶光六孝兼. 丹旌華誥耀窮閻”)
* 甲申(2004) 4월 20일(陽) 27世부터 32世 까지 대전 시립추모공원 가족묘원 9호에 모셨다.
28世. 문행공(文行公) 규진(奎鎭 1788~1842)
정조(正祖) 12년 戊申(1788)에 연기(燕岐)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신 지 겨우 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뵙지 못한 것을 평생 애통하여 매양 기일(忌日)을 당하면 사모하여 통곡함이 초상 때와 같으셨다. 한편 홀로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되 뜻을 어기지 않음은 물론 음식 공봉(供奉)이며 제반 절차에 정성을 다하셨다.
추양 송계간(秋陽 宋啓幹)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여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일세에 유명하셨으며, 중산 이지수(重山 李趾秀). 옥하 임문백(玉下 任文白) 제공(諸公)과 서로 우의(友誼)가 깊으셨다.
선세 효열(孝烈)의 포증(褒贈)을 위하여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는데, 심암 조두순(心庵 趙斗淳). 호하 박회수(壺下 朴晦壽) 등 상신(相臣)들이 모두 공의 천품이 고상하고 효우(孝友)가 돈독함을 찬양하고 증시(贈詩)가 있었다.
1남 2녀를 두시고, 헌종(憲宗) 8년 壬寅(1842) 정월 18일 졸하니 향년 55세로 금산군 북면 사기점촌 후록신좌(錦山郡 北面 沙器店村 後麓辛坐)에 모시었다.
29世. 원학(源學 1819~1867)
순조(純祖) 19년, 己卯(1819) 금산(錦山)에서 완산이씨(完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나셨다.
9세에 어머니(完山李氏)를 여의고 울부짖어 뛰고 애통함이 이를 데 없음으로 조문하는 분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장성하심에 기개(氣槪)가 강직하시고 처신(處身)이 근엄하셨다.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셔서 재종형(再從兄-6촌 형) 휘 원제(源悌) 차자(次子)를 계자(繼子-양자) 하시고, 丁卯(1867) 6월 6일 48세에 졸하시니 가양동 북록(柯陽洞 北麓)에 모시었다.
배위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병(秉)의 따님으로 辛巳(1821) 9월 9일 나으시고 甲申(1884) 5월 4일 63세에 진산 북면 신현(新峴 새고개)에 모시었다.
30世. 기은(基殷 1846~1917)
헌종(憲宗) 12년 丙午(1846) 생부(生父) 휘 원제(源悌)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초명(初名)은 기평(基平)이시다.
옛 대전군 유천면 안영리 469번지(현, 대전시 중구 안영동)로 이거(移居) 하시고, 양모(養母)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시고 천품이 뛰어나셨다.
丁未(1917) 4월 24일 71세에 졸하시니 어머니 죽산안씨 묘 아래 모셨다.
배위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성인(晟仁)의 따님으로 생졸(生卒)은 애석하게 전하지 않으나 옛 호적에 졸년이(生 1846~卒 1906) 명기되어 있다.
남 1녀를 두셨다.
31世. 인석(寅奭 1876~1933)
고종(高宗) 13년 丙子(1876) 8월 18일 안영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어버이 섬기는 절차를 능히 아시고, 말년에 안영리에서 옛 대전군 유성면 봉명리 272번지로 이거 하셨다.
癸酉(1933) 1월 5일, 57세에 졸하시니 유성 남자곡(南子谷)에 모셨다.
배위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광재(廣濟) 따님으로 乙亥(1875) 2월 4일 태어나셔서 2남 1녀를 두시고, 졸년(卒年)은 전하지 않으나 기일은 2월 4일이다.
32世. 창열(昌熱 1905~1962)
고종(高宗) 42년 乙巳(1905) 11월 30일 안영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어려서 효행이 남달라 밖에서 혹 맛있는 것을 얻으면 반드시 가슴에 싸서 부모님께 드렸다. 아드님 한 분만 낳으시고 일찍 상처(傷妻)하신 후 마음을 잡지 못하시고 전국을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말년에 탄동(炭洞)으로 이거 하셨다.
壬寅(1962) 10월 25일, 57세에 졸하시니 탄동 자운(自雲) 동곡(東谷)에 모시었다.
배위 흥양이씨(興陽李氏)는 진하(珍河)의 따님으로 辛亥(1911)에 태어나시고, 아드님 한 분만 낳으시고 辛未(1931) 11월 9일, 21세 돌아가시니 반포(反浦) 도래산 남록(南麓)에 모시었다
33世. 지섭(志燮 1929~2001)
己巳(1929) 8월 7일 유성에서 무매독자(無妹獨子)로 태어나시고, 3살 때 모친을 여의시고 평생 애통하시며 외조모(여흥민씨) 밑에서 자라셨다.
한국전쟁(6.25)에 참전하시고 전상(戰傷)을 당하셔서 명예전역하셨다.
타고나신 심성이 부지런하셔서 가세(家勢)를 넓히시고, 辛巳(2001) 7월 21일(陰), 73세에 돌아가시니 임실 호국원(任實 護國園)에 모시었다.
2015년 3월 15일 나라에서 무성 화랑무공훈장을 추서(追敍)하였다.
행장(行狀) 1편이 전한다.
배위 신천강씨(信川康氏)의 명(名)은 금순(今順)이고, 영설(永說)의 따님으로 癸酉(1933) 6월 17일 태어나시고, 1남 2녀를 두시고 戊子(2008) 12월 1일(陰), 76세에 졸하시니 호국원에 합장하셨다.
34世. 성현-경철(成鉉-敬澈 1959 ~ )
35世. 제욱(帝旭 1986 ~ )
태훈(兌勳 19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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