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벌써 예순 번이 넘게 보내는 명절이지만
오늘 장사익 님이 부르는 "꽃구경"을 들으니
옛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새해가 되면 장모님께 세배드리고
덕담을 나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자리에 안 계시니 더더욱 뵙고 싶다.
장모님, 수원백씨께서는 삶의 곡절이 많으신 만큼
들려주는 일화(逸話)도 많이 있다.
그중에서 혼사에 얽힌 일화 한편을 정리한다.
[처 외가에 외조부(휘 南喜)께서는 4남 2녀를 두셨는데,
큰 따님이 이모님 되시고 작은 따님이 장모님 되신다.
때는 1935년경,
일본군이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 땅을 지배하고,
중. 일 전쟁(1937)을 일으켜 중국 본토로 진격하면서 무력항쟁이 극에 달하여,
징병. 징용. 징발 및 위안부 등 강제로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1936년 당시 공주군 우성면 옥성리 작골 마을 외조부(휘 南喜 1890~?)께서는 47歲 셨고,
큰 따님이 15세. 작은 따님이 12세이니, 두 규수(閨秀)를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건실한 총각에게 혼인하시려고 하셨다.
또 이인면 신흥리 넌축골 마을 조부(휘 泳信 1884~?)께서는 53歲셨는데,
33歲에 어렵게 얻은 큰 아드님(휘 廷植1916~1970)이 혼인 정년기가 넘어가
배필감을 찾으시려고 몽매(夢寐)하셨다.
두 어른 뜻이 같으니 처외가 큰 따님과 처가 큰 아드님 중매가 오고 갈 즘,
조부께서 공주 장에 들러 우성 옥성리 작골 마을 지인을 만나 수원백씨 큰 따님 안부를 물으니,
"큰 따님보다 작은 따님이 더 얌전하고 지혜롭다" 이르렀다.
조부님의 간곡함에 아버님은 큰 따님이 아닌 둘째 따님,
즉 어머님과 청혼하셨다.
어찌하랴!
아무런 뜻도 모르시고 준비도 없이 13살 나이에 이모님이 타셔야 할 가마에 타셨다.
어린 각시는 십오 리 길을 가마 속에서 눈물을 삼켜가며,
미쳐 깍지 못한 손톱을 치아로 물어뜯으며 다다른 곳이
이인면 신흥리 넌축골 마을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타고난 심성으로 시어른을 지성으로 받드시고
남편의 뜻을 어기지 안으셨으니,
혼인 8년 만에 금쪽같은 첫 아드님(光漢)을 낳으셨다.
얼마나 좋으셨을까?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경자년 일월 스물엿셋 날
셋째사위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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