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水原白氏 行狀(수원백씨 행장)

아름드리 블로그 2019. 11. 23. 17:55

  고인(故人)의 성()은 백()이고 관향(貫鄕)은 수원(水原)이요, ()은 영숙(榮淑)이시다.

  부친은 수원백씨(水原白氏) 28세 손(世 孫) 남희(南喜) 이시고, 모친은 완산이씨(完山李氏) 갑순(甲順)이시며, 42녀 중 둘째 따님으로 1924628(). 충남 공주군 우성면 옥성리 487번지(작골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유순하고 행실이 현숙(賢淑)하여 이웃 동리까지 '어질고 후덕한 품성이 대물림되었다'라고 회자(膾炙)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엽,

  처자(處子)들을 위안부(慰安婦)로 색출해 가는 시기라 부친(諱 南喜)께서 곁에 두고 보고픈 심정으로 13() 어린 나이에 충남 공주군 이인면 신흥리 290번지(넌축골 마을) 선산김씨(善山金氏) 정식(廷植)과 정혼(定婚) 하여, 이듬해 1937215일 혼례를 하셨다.

 

  선산김씨는 원조(元祖) 김알지(金閼智)30세 손(世 孫) 선궁(善弓)이 시조(始祖)이시다. 수원백씨의 부군(夫君)은 선산김씨 35() 손이고, 공주 문중(公州 門中)22()부터 400여 년간 세거(世居)한 집성촌이다.

 

  그 문중 한복판으로 출가한 수원백씨는 심성(心性)이 올곧고 매양 조신(操身)하여 밖으로 문중 어른께 반드시 예로 받드시고, 당내간(堂內間 -팔촌 이내가 되는 사이)은 형제처럼 우애로 대하셨고, 아랫사람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보듬으셨다.

  또 안으로는 시부모님을 공경하여 지성으로 받드시고, 부부간에는 한마음으로 뜻을 존중하셨고, 자식을 가르침에 어떠한 경우도 역정(逆情)을 내지 않으시고 순리(順理) 찾아 시가(媤家) 생활을 하시니, 문중에서는 옛적 여사(女士)의 풍도(風度)가 있다 '고 하였다.

 

  문중의 관심과 부부의 금실로 19457월, 22()에 첫 아드님을 낳으시고 광한(光漢)이라 이름 지으셨다. 두 해 뒤 19471월 첫 따님을 낳으시니 금옥(錦玉)이라 지으시고, 1950년 둘째 아드님 광일(光日). 1953년 셋째 아드님 광욱(光旭). 1955년 넷째 아드님 광수(光秀). 1959년 둘째 따님 명희(明姬). 1961년 셋째 따님 명옥(明玉). 1963년 다섯째 아드님 광석(光錫). 1966년 여섯째 아드님 광립(光立)을 낳으시고 이름 지으셨다.

  천성이 부지런하신 부군으로 인하여 가세(家勢)도 나아지고 무녀독남(당시 시동생(諱 南植)은 만주에서 연락이 안 됨) 집안에 자손을 많이 낳았으니, 수원백씨의 후덕한 복록(福祿)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사다마(好事多磨)라고 하였던가,

  수원백씨는 46세에 상부(喪夫 - 남편을 잃음) 하시고, 48세에 큰 아드님은 유복녀(遺腹女 -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어난 딸) '유석'을 남기고 잃으셨다. 56세에 둘째 아드님을 잃으시고 말았다.

 

  부지불식(不知不識 - 생각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 간에 삼상(三喪)을 당한 수원백씨는 큰소리로 통곡 한 번 못하시고, 오르지 많은 식솔(食率)을 잘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57세에 시집 고향(공주 이인)을 등지고 대전으로 옮기신 후, 두 해 뒤 셋째 아드님을 따라 옥천으로 옮기셨다.

 

  수원백씨는 자녀들의 성장함에 따라 큰 따님을 영월 엄철용(寧越 嚴哲鎔)과 짝지어 태환. 영환을 낳았다.

  장남이 된 셋째 아드님은 경주 김기자(慶州 金基子)와 짝지어 주고 선규. 선옥을 낳았으며, 넷째 아드님은 김해 김정옥(金海 金貞玉)과 짝지어 슬하에 도희. 동훈을 두었고, 둘째 따님이 하동 정황래(河東 鄭晄來)와 짝짓고 환실. 환엽을 낳았다. 또 셋째 따님은 문화 류경철(文化 柳敬澈)과 짝지어 제욱. 태훈을 낳았고, 다섯째 아드님은 경주 이훈자(慶州 李勳子)를 맞이하여 아신. 아연을 나았으며, 막내 아드님은 밀양 노현정(密陽 魯賢貞)과 짝지어 산해. 다해를 낳았다.

  자손 모두 옥천. 대전에 살면서 번성하여 왕래가 잦았고 우애도 돈독하여 당내 간에 부러움을 샀으니, 수원백씨의 끝없는 자손 사랑 또한 한()이 풀리셨다.

 

  그쯤에 일본 강점기에 만주에 가셔서 수십 년간 연락이 끊기셨던 시동생(諱 南植)께서 연락이 닿았고, 여러 조카와 함께 재회하셨으니, 뭇 사람들은 '수원백씨의 심성(心誠)이 하늘에 닿은 홍복(洪福)이다' 일렀다.

 

  하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수원백씨도 피해 가지 못하셨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으시며 지내시더니, 고령(高齡)이 되시면서 병, 의원 찾으시는 횟수가 늘어나 자손들은 걱정이 많았고, 두 해 전에 시가(媤家) 고향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하셨다.

  두 해가 넘도록 몸은 요양원에 계시며 마음은 항상 자손 곁에 두시고 애달아 하셨다.

 

  20191117(, 1021) 저녁 68.

 

  만추지절(晩秋之節),

  늘 푸를 것만 같았던 나무가 계절이 닿아 옷을 벗듯이, 수원백씨께서도 여러 자손을 옆에 두고 편안히 임종(臨終)하셨다. 96()를 지내시며 사랑도 받으셨고, 아픔도 받으셨고 또 인정(認定)도 받으셨던 삶을 내려놓으셨다.

 

  아!

  당신은 지극한 며느리셨습니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아내셨습니다.

  당신은 고마우신 어머니셨습니다.

 

20191123

셋째 사위, 문화류인 경철. 근서(三壻, 文化柳人 敬澈.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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