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역사문화원에서 금강변의 누정에 대한 연구중 문화류씨 22世 도사공(都事公) 휘 형국(亨國 1596~1670)께서
만년에 동진강(東津江)위에 정자를 지어 친붕(親朋)으로 더불어 시주(時酒)를 스스로 즐기시던 봉황정(鳳凰亭)을
봉황정을 김연미연구원이 쓴 글이다.]
봉황정(鳳凰亭) 터
■소 재 지 : 연기군 서면 봉암리 봉황산 아래 (추정)
■건립연대 : 조선 중기
1. 위치 및 자연환경
봉황정은 류형국(柳亨國)이 지은 정자로 서면 봉황산 위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류형국의 절친한 벗이었던 최진원(崔進源)은 자신의 문집에서
奇峰玉立迥臨流 기이한 봉우리는 옥같이 서서 멀리 흐르는 물에 임하였구나
峯上巍然百尺樓 봉우리 위에는 백척 누각이 외연하도다
大野茫茫天共闊 큰 들은 아득하여 하늘과 같이 광활하고
平沙活活月長留 평탄한 모래백사장은 넓고 넓어 달빛이 길이 머물러 있네
라고 하여 봉황정의 입지와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에 대하여 읊은 내용을 통해 유추해보건대, 넓은 들판과 강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연기지』(1934),『조선환여승람』(1934) 등에 따르면, 류형국은 봉황산록에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기년편고(紀年便攷)』(1917)에 “류형국이 동진강(東津江) 위에 봉황정(鳳凰亭)을 짓고 술 마시며 시가(詩歌)를 ?셈만庸? 보냈다”는 기록과, ������육일당집(六逸堂集)������에 실린 최진원의 시에 “동진강 위 봉황정”이라든지 “우리 벗이 강가에 누각이 있다”는 등의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물가가 한 눈에 보이는 봉황산 기슭에 정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산은 연기군 서면 봉암리에 있는 나즈막한 산이다. 금강의 지류인 동진강 건너편으로 동면 송룡리와 문주리가 보이며, 연기현의 치소가 있던 연기리와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다. 이 때문인지 최진원의<육일당집>에는 연기 현감과 함께 봉황정에 올라 읊은 시들이 많다.
2. 관련인물
정자를 건립한 류형국은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자는 경오(慶吾), 호는 봉황정(鳳凰亭)이다. 세자시강원 필선을 지낸 류기문(柳起門)의 아들로 음직으로 도사(都事)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연기에 머물고 있었는데, 민후건(閔後騫), 채종고(蔡宗吉), 최진원(崔進源), 허격(許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병사들을 해산하고 수집한 군량을 모두 관에 바쳤다. 이로부터 은거하면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동진강 위에 봉황정을 짓고 술 마시며 시가(詩歌)를 ?셈만庸? 보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최진원의 문집인 <육일당집>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들이 관에 공납한 군량은 뒷날 연기환자미(燕岐還子米) 기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류형국이 어떤 연유로 연기현에 봉황정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그의 가계가 연기지역에 정착한 시기는 언제인가에 대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연기지』(1824) 인물조-묘소록에 보이는 류의관(柳義寬)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류의관은 본관이 문화이고, 벼슬이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에 이르렀는데, 묘는 현 북쪽 양지동(陽之洞)에 있으며 이후 자손들이 북이면 군량동에 살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류형국의 아버지인 류기문에 대해서도 “묘가 현의 북쪽 부곡촌(釜谷村 : 현 연기군 서면 부동리) 동쪽 가양동(柯養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선대가 이미 연기현 서면(당시 북이면) 지역에 정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류형국 대에 이르러서는 병자호란 당시 민후건, 최진원, 채종고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만큼 이미 지역적 기반이 탄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인 해주최씨(海州崔氏)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 역시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지역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씨는 최준(崔濬)의 딸로 병자호란 당시 오빠인 승지(承旨) 최유연(崔有淵)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정축년(1637)에 성이 함락되자 손가락을 물어뜯어 혈서를 써서 남편과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연기지』(1824)에는 “나라에 누차 알렸으나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비록 포상은 받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수차례 알리는 과정에서 지역 사회에서 문화류씨의 위상을 높이고 지역 사족들의 여론을 모으는 데 중요한 명분이 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문화류씨 집안은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충청도읍지』및『연기지』등 지리지에는 문화류씨가 여러 명 등장한다. 류형국의 아들인 류세장(柳世穡)은 1651년(효종 2)에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僉正)이 되었으나, 효종이 승하한 뒤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류형국의 증손인 류시채(柳始采)는 1832년(순조 32)에 명정을 받고 동몽교관에 증직된 내용이 실록에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동생 류시명(柳始明)도 같은 해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류행직(柳行直)은 사림들이 등장을 올렸으며, 그의 세 아들인 류제태(柳齊泰), 류제형(柳齊衡), 류제화(柳齊華)가 모두 효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이에도 류헌(柳瓛), 류발영(柳發永), 류건영(柳建永) 등이 효자로 올라 있다. 또한 류제화의 처 결성장씨와 류형국의 처 해주최씨도 연기지와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조선환여승람 등에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3. 봉황정을 읊은 최진원의 시
『연기지』(1934)에는 류형국이 민후건, 최진원 등과 주고받았던 시문을 모아놓은 수창집(酬唱集)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최진원의『육일당집』에 봉황정에 올라 읊은 시가 몇 편 확인된다. 최진원은 병자호란 때 류형국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도 했던 인물로 시의 제목에 “柳友”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쓸 정도로 류형국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1>與諸公遊友慶吾(亨國)鳳凰亭次韻
제공과 더불어 류우(형국)의 봉황정에서 놀면서 운자를 따서 지음
奇峰玉立迥臨流 기이한 봉우리는 옥같이 서서 멀리 흐르는 물을 임하였구나
峯上巍然百尺樓 봉우리 위에 백척 누각은 외연하게 보이는 도다
大野茫茫天共闊 큰 들은 아득하여 하늘과 같이 광활하고
平沙活活月長留 평탄한 모래백사장은 넓고 넓은데 달빛이 길이 머물러 있노라
閑中指送三江雁 한가한 가운데 지정하여 보내는 것은 삼강의 기러기요
物外機忘萬里鷗 세상밖에 기틀을 잊은 것은 만리탄에 갈매기로세
嘯倣乾坤無一事 건곤사이에서 휘파람 불며 놀면서 하나의 하는 일도 없어서
濯纓朝暮弄芳洲 아침 저녁으로 갓끈을 빨면서 아리따운 물가를 희롱하는 구나
東津江上鳳凰亭 동진강 위에 봉황정은
森列羣峯萬点靑 나무가 우거진 많은 봉우리가 만점이나 푸르렀네
探景忘却西日暮 경치를 살펴보다가 서쪽해가 저무는 것을 잊었으니
不妨歸路戴明星 돌아가는길에 밝은 별을 이고가는 것도 해롭지 않구나
疇昔多年上此亭 옛날에 여러해 이 정자에 올랐었지
依俙雲物夢中靑 어렴풋이 생각나는 구름 속에 물건이 몽중에 푸르렀네
初秋旣望重尋處 초가을 십육일에 거듭 찾아온 곳에는
素月流天帶酒星 흰 달이 하늘에 흘러 주성(酒星)을 이고 있구나
眼底明沙十里平 눈앞에 밝고 흰 모래는 십리가 평탄한데
笛聲暸亮倚高亭 젓대소리가 맑아 높은 정자에 의지하여 듣는구나
一生飽得江山趣 일생에 강산의 취미를 배불리 얻었으니
歸夢迢迢隔帝城 돌아가는 꿈은 멀리 제성에 막히었도다
秋天寥闊暮江平 가을 하늘은 고요하고 넓은데 해저문 강이 평탄하구나
無盡光風護一亭 다함이 없는 풍광은 하나의 정자를 호위하고 있네
醉裏憑欄遊遠目 취한 속에서 난간을 의지하여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十年今日破愁城 십년만에 금일 수성(愁城)을 파하는구나
吾友有江閣 登臨身欲淸 우리 벗이 강가의 누각에 올라가니 심신이 맑아지고자 하누나
半天雲舒券 一面鏡空明 하늘 가운데는 구름이 폈다 걷히고 한쪽에는 거울같이 나타났다 사라지네.
風月生涯足 功名草芥經 풍월이 생애에 만족하니 공명은 초개같이 가볍구나
重開舊日酒 說罷久離情 거듭 옛날의 술자리를 벌려놓고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정을 설파하는도다
2>柳友鳳凰亭次主倅韻
류우가 봉황정에서 고을 사또의 운자를 따서 지은 것을 따라서 지음
江閣巍然象外開 강가에 누각이 외연하게 형상밖에 열려있는데
高名遠慕鳳凰臺 높은 이름은 멀리 봉황대에서 사모하누나
明波護地溶溶去 밝은 파도는 땅을 호위하면서 넓고 조용하게 흐르는데
列峀浮天点点來 벌려있는 산봉우리는 하늘에 떠서 흩어져 오는구나
美酒佳賓兼勝會 좋은 술과 아름다운 손님이 盛會를 겸하였는데
綠衣朱紱共徘徊 푸른 옷과 붉은 인끈이 같이 배회하누나
使君一筆●千景 사또의 하나의 필적으로 천가지 경치를 쏟아내니
四坐停吟若死灰 사방에 앉은 사람이 읊음을 정지하고 죽은 재같이 되었구나
小亭臨大野 江上碧山隈 작은 정자가 큰 들에 자리잡아 임하였으니 강 위에 푸른산 모퉁이로세
岳峻雲徐捲 簷虛月早來 봉우리가 높으니 구름이 천천히 걷히고 처마가 비어 있으니 달이 일찍 비추는구나
睡鷗驚晩笛 飛鶩映湥盃 졸던 갈매기는 늦은 젓대소리에 놀래고 날아가는 따오기는 깊은 술잔에 비치네
騒客淸遊日 幾多朗咏回 소객이 맑은 풍치를 유람하는 날 낭낭히 읊조리고 돌아온 것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孤峯巖上一危樓 외로운 봉우리 바위 위에 하나의 높은 누각이 있고
樓下平沙十里洲 누 아래는 평탄한 모래가 십리나 물가에 연하였네
登臨使我淸心骨 물가에 오르고 임하니 나로 하여금 심신을 맑게 하니
恐是三山眼底浮 아마도 삼산(三山)이 눈 밑에 떠있는 것이로세
明府訪江樓吾民 수령께서 강 위의 누각의 백성을 찾아주시니
賴一遊郊迎竹馬 성문 밖까지 나아가 죽마고우를 맞이하여 한번 노니니
處處有脚春光浮 곳곳에 유각호에는 춘광이 떠있도다
▮참고문헌
『여지도서』,『충청도읍지』,『연기지』(1824),『호서읍지』(1871),
『기년편고』(1917),『연기지』(1934),『조선환여승람』(1934)
『육일당집』
[독후록]
먼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김연미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러 참고문헌을 발췌하고 봉항정터 현지를 답사하여 선대의 행적을 소상히 써 주셔서 가슴 뭉클하다.
선생님이 글을 쓰기 전에 수창록을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평소 알았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정리한다.
먼저 柳氏의 성(姓) 음을 '유'에서 '류'로 정정했다.
그리고 충북 진천에서 충남 연기로 이거(移居) 하신 계기가 류의관(柳義寬-시랑공파)님의 영향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아닌 것 같고, 13대 조 필선공 (휘,起門)의 처가가 남양홍씨로 연기 서면 시대리에 5代 전부터 세거하였으니
그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도사공(휘,亨國)의 子, 휘 세장(世檣)의 檣을 穡으로 오인(誤認)한 것 같고, 또 증손(휘,始采)께서는 명정을 받으셨고, 차증손(휘,始明)께서 동몽교관에 추증 되셨다.
'宗事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류씨보감]부군의 체백을 모신 경주정씨 (0) | 2016.02.24 |
---|---|
[문화류씨보감]청풍원묘득점기 (0) | 2016.02.13 |
영재 류득공(1749-1807) 선생의 생애와 <이십일도회고시>에 대하여 (0) | 2015.11.18 |
문화류씨 대동항렬 (0) | 2015.03.24 |
문간공양자차서 고증질의변(文簡公兩子次序 考證質疑辨) (0) | 2015.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