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영화 도리화가(桃李花歌) 감상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동리 신재효. 진채선을 찾아 정리한다.
신재효(申在孝)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다.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신광흡이 고창으로 이사하여
1812년(순조 12년) 11월 6일 전북 고창에서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신재효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매우 총명하여 근동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학문은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날 그는 1852년(철종 3년)에 고창 현감 밑에서 아전 노릇을 했고, 말년에는 관속이나 광대,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戶長)의 직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재효는 평소 판소리나 춤 같은 기예에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신재효의 가정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26세 때 첫째 부인 진주 김씨가 자식도 없이 죽었고, 둘째 부인 밀양 박씨도 결혼 2년 만에 외딸만 남기고 죽었다. 셋째 부인 당악 김씨는 아들 신순경과 두 딸을 낳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56세까지 세 명의 아내를 잃은 그는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신재효는 40대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근검절약하면서 불린 끝에 천석 지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재산을 움켜쥐고 거들먹거리는 샤일록이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던 장발장이었다.
그는 지배층의 수탈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늘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한 편으로 그들의 간교 하고 이기적인 일면도 직시했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표현 양식을 판소리 사설에 실감나게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는 평생 집안의 노비들에게 ‘해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애정으로 대하면 배반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중인이었던 신재효가 천민들의 기예였던 판소리에 천착하게 된 동기는 분명치 않다. 아전으로서 관아의 연회에 소리꾼이나 기생을 동원하며 판소리의 색다른 문화를 접했고, 그 과정에서 소리꾼 들 마다 중구난방이었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표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전 생활을 마친 50대 중반부터 신재효는 본격적으로 판소리 세계에 뛰어든다.
널따란 집을 자신의 호를 따서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 짓고, 그 안에 소리청을 만든 다음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조리 없이 부르는 판소리 사설을 일일이 채록하고,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제자들에게 인물이나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 등을 강조함으로써 판소리의 공연적인 측면을 일깨워주었다. 아울러 그때까지 어른들만 익힐 수 있었던 판소리 교육의 허점을 직시하고, 어린 광대도 판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대본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의 소리꾼에 대한 남다른 지원과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이 세간에 알려지자 서편제와 동편제의 유명한 명창들까지 앞다투어 동리정사에 들어왔다. 그들 외에도 신재효는 80여 명의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장차 여류 명창의 출현을 예고했다.
신재효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 여섯 마당의 사설을 고쳐 쓰고 그 내용을 제자들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춘향은 이별하는 임 앞에서도 의젓했고, 심청은 죽음에 임하면서도 효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렇듯 신재효에 의해 합리적이며 윤리적이고 흥행성까지 갖춘 판소리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양반 계층의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국민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다.
그는 단가와 잡가 창작에도 열중하여 〈도리화가〉·〈치산가〉·〈호남가〉·〈성조가〉·〈광대가〉·〈오섬가〉·〈어부사〉·〈방아타령〉·〈괘씸한 양국놈가〉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론가 신재효와 실력자 김세종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진정한 명창으로 거듭났고, 반가의 연회는 물론 궁중에까지 들어가 실력을 뽐냈다.
1867년 11월, 신재효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고 경복궁의 경회루 낙성연에 명창 김세종과 여제자 진채선(陳彩仙 1842 ~)을 올려보냈다. 그때 도포 차림에 갓을 쓴 진채선은 흥겨운 몸짓으로 〈방아타령〉과 〈춘향가〉 등을 불러 좌중의 감탄을 자아냈다. 미모에 득음의 경지에 오른 진채선을 보고 한눈에 반한 흥선대원군은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待令妓生)으로 임명하여 운현궁에 잡아 두었다.
신재효는 그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3년 뒤인 1870년(고종 7년)에 이르러 〈도리화가〉라는 사모곡을 지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 흴사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당시 신재효의 나이 59세, 진채선의 나이 24세였다. ‘도리화(桃李花)’란 ‘붉은 복숭아꽃과 흰 오얏꽃’이니 붉은 복숭아꽃은 젊고 활기찬 진채선을, 흰 오얏꽃은 늙어버린 신재효 자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 이었으므로 언뜻 보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지만 예인들의 분방한 세계에서는 가능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진채선의 입장에서보면 천민으로서 지방의 가기(歌妓)였던 그녀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의 대령기생이 되었으니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화가〉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알게 된 진채선은 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이란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하향을 허락하자 고창으로 돌아와 신재효를 모셨다고 한다.
신재효는 1884년(고종 21년) 11월 6일, 73세의 나이로 태어난 집에서 태어난 날짜와 똑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으니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경자년 칠월 열엿셋날.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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