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느러리 마을은 높은 산이나 넓은 들, 깊은 내(川)가 없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하지만,
봄에는 너른 청룡 밭 창공에
종다리 노랫소리 들리고,
여름에는 분둣골에서
자라는 참외. 수박 맛을 음미하며,
가을에는 동안들에
누렇게 익어가는 볏 잎 빛을 바라보고,
겨울에는 길고 긴 동둑길에
차거운 눈보라 피부에 스치는
사계절 멋이 어우러진 마을이 느러리 마을이다.
그 느러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작은 동네가 새뜸이고,
그 새뜸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십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새뜸마을
남서방향 정면으로 600m 남짓한 곳에,
높이가 150m쯤 되는 산이 있고,
그 앞으로 십여 채 마을 호박골 있었다.
내 얼굴은 내가 못 보듯이
눈을 뜨면 우리 마을보다 호박골 뒷산이 보이고,
그 아래 아침저녁으로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광을
하루에 한두 번씩 보이는 마을이 호박골이다.
흰 눈이 수북이 내린
초등학교 고학년 겨울방학 어느 날.
동무 셋과 동생들 셋,
말로만 들었던 산 토끼몰이를 하기 위하여
헌 운동화 끈은 동여 매고,
손에는 나무 막대 하나씩 들고 마치 호랑이라도 잡을 용맹으로
호박골 뒷 산으로 향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 동안들을 지나고,
동둑 옆 숯골내를 건너 접다랑들을 가는 길에
수북이 쌓인 눈은 우리를 막지 못했고,
눈 덮인 산은 토끼몰이 열기에
우리 발자국을 얼리지 못했다.
5부 능선쯤 오르니
토끼 발자국을 발견하고 산토끼를 잡은 것처럼 탄성을 지르며,
우리는 더욱 의기양양하여 토끼 발자국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토끼 발자국,
뒤 따라오는 동생들을 부르며 미끄러지고,
뒹굴면서 다다른 산 꼭대기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허망함을 느낄 쯤에
저 멀리 우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보다 더 높은 곳에서 처음 보는 마을은 정말 평화로웠다.
마치 하얀 목화 솜이 살포시 살포시 내려앉은 속에서
숨죽여 소곤대고 있었다.
이제는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고향의 여운(餘韻)이
한해 한해 잊혀 간다.
2018. 12. 26
아름드리 경철.
'故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첫사랑, 짝사랑 & 풋사랑 (0) | 2019.01.11 |
---|---|
금성초등학교 개교 70년사 (0) | 2019.01.01 |
하이킹 가던 날 (0) | 2018.10.18 |
시월, 추억의 가을 운동회 (0) | 2018.10.05 |
유성시장 가던 9월 (0) | 2018.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