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변화에 따른 모교의 변화
명산, 계룡의 정기가 동쪽으로 이어져 금병산에 이르고, 그 아래 파도 무늬처럼 펼쳐진 산내들(山川野)을 지나 넓은 분지에 야트막한 산이 성처럼 둘러싸인 중앙으로 낮게 솟아오른 둔덕에 금성초등학교(錦城初等學校)가 자리한다.
개교 70년,
민족의 격동기를 지나 경제 성장기와 민주화를 거치고 지금의 최첨단 시기까지 고향은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에 못지않게 모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60~70년대 만여 명이 넘던 탄동면 인구가 80년대 중 후반에는 이천여 명으로 감소했다. 또한 60년대 후반에 한 기수(期數)에 200여 명 가까이 졸업한 모교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는 한 기수에 5~6명이 졸업하는 위기에 빠져, 폐교(廢校) 직전까지 몰린 때가 있었다.
이에 여러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고향과 모교의 변화를 논(論)하고자 한다.
Ⅰ.모교의 설립 배경
Ⅰ-ⅰ시기
모교 설립 배경은 아마도 모교의 본교(本校) 탄동초등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개화(開化) 흐름과 맞물려 신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옛 탄동면에 처음 탄동초등학교가 1930년 7월 7일 개교하였다.
탄동면은 조선 초기부터 공주군 탄동면 이었다가 1909년 회덕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회덕군과 진잠군이 대전군으로 통합되면서 대전군 탄동면이 되었다. 또 1935년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면서 대전군에 있던 10개 면(面)이 대덕군으로 분리되었다. 1983년 대전 시세(市勢) 확장으로 탄동면 일부 동리(洞里)가 대전시에 편입되었고,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탄동면 모든 동리가 대전시에 편입되어 탄동(炭洞)이라는 지명이 행정상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근현대사에서 탄동면 변화는 대전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고, 그로 인한 대전 위성지역(衛星地域) 옛 대덕군 각 면 초등학교 개교를 살펴보면, 옛 진잠현, 군이 있었던 진잠면에 진잠초등학교가 1913년에 개교하였고, 대청댐으로 수몰되면서 이전한 동명초등학교가 1918년에 동면(東面 추동. 세천동)에 개교하였다. 또 예부터 포구와 경부선 기찻길의 요충지인 북면(北面 신탄진)에 신탄진초등학교가 1919년에 개교하였다.
대전 중심에서 가까운 산내면에 산내초등학교가 1920년에, 탄동면 인근 유성면에 유성초등학교가 1927년에 개교하고, 3년 뒤 1930년에 탄동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일본은 우리 민족 글과 정신을 말살하고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기초가 될 초등학교를 앞다투어 개교하여, 1935년에 기성면 기성초등학교가 또 1936년에 회덕면 회덕초등학교가 개교하였고, 탄동면에 인접한 구즉초등학교가 1937년에 개교하였다.
이후 해방과 함께 일본 잔재를 없애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제헌국회는 국민교육을 강화하는 입헌. 입법 활동을 추진했다. 1948년 제헌헌법에 국민교육권을 명시하였고, 1949년 의무 교육법을 개정하여 초등학교 설립을 뒷받침했다.
이에 모교는 1949년 9월 1일 탄동초등학교에서 금성초등학교로 분리 개교하였고, 또한 탄동면의 외삼초등학교도 같은 시기에 외삼리에 분리 개교하였다.
1회 김동구(1935~ ) 선배님의 모교 분리 개교 당시 회고 대담(回顧 對談)에 의하면 ‘모교 신성 분교장(分校場)은 없었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추목리에 탄동초등학교 숯골 분교장이 있었으며, 모교가 개교하기 전에 숯골 분교장이 없어지면서 탄동초등학교로 전학한 뒤, 모교 개교와 함께 탄동초등학교에서 1~6학년까지 300여 명이 분리되어 금성초등학교 개교 학생이 되었다.’ 한다.
Ⅰ-ⅱ 위치
1927년 개교한 유성초등학교는 유성 면 소재지 장대리에 세워졌다. 아마도 개교할 당시 유성면은 물론, 구즉면 일부와 탄동면 전체가 유성초등학교 학구(學區)로 지정되었을 것 같다. 3년 뒤 탄동면에서 처음으로 탄동초등학교가 화암리 64(대덕대로 939)에 개교했다. 탄동초등학교가 탄동면 중심지나 면 소재지가 아닌, 탄동면 동쪽 끝 구즉면과 경계 위치에 개교했는지 여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개교할 당시 탄동초등학교가 구즉면까지 하나의 학구(學區)로 계획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 뒤 구즉면 봉산리에 구즉초등학교가 1937년 개교하여 탄동초등학교와 학구가 나누어졌다.
해방 후 탄동면 한쪽에 치우쳐 있는 탄동초등학교는 늘어나는 학생과 통학 거리의 불편함으로 인해 행정과 교통의 요충지 신성리 210-12(신성로 72)에 금성초등학교가 세워졌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삼성이라고도 부르는 분지 중앙 낮은 둔덕 비산비야(非山非野)에 터를 잡아 남남동향(南南東向)으로 교실 6칸과 부속실 3칸을 갖춘 교사(校舍) 1동(棟)과 작은 운동장을 갖추고 개교하였다.
또 하기리 퇴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외삼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Ⅰ-ⅲ 학구(學區)
서두에서 밝혔듯이 모교가 개교하기 이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모교와 외삼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탄동초등학교는 탄동면 덕진리. 내동리. 화암리와 구즉면 관평리가 같은 학구였고, 모교는 가정리. 도룡리. 신봉리. 신성리. 자운리. 장동리. 추목리. 하기리 일부이고, 외삼초등학교는 반석리. 수남리. 안산리. 외삼리. 하기리 일부와 유성면 지족리가 같은 학구였다.
1949년 당시 각 학교의 학구 인구수는 탄동초등학교 4개리에 1,970여 명이 살았고, 금성초등학교는 8개리는 5,500여 명이 살았으며, 외삼초등학교 5개리에는 3,600여 명이 산 것으로 나타난다.
Ⅱ. 변화의 물결
민족의 격동기에 모교가 개교했지만 경제성장 시기인 1970년대부터 거친 풍랑의 시대를 맞는다.
1970년 12월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모교 학구, 즉 금성 8리(錦城 八里)는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호남고속도로 아래쪽은 연구시설이 또 위쪽은 군사시설이 약간 시간 차이를 두고 점령당하듯이 변화를 가져왔다.
Ⅱ-ⅰ 중학교 무시험제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해당 중학교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명문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입시 과열로 인한 과외와 초등학교 교육의 비정상화, 그리고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의 건강 등의 문제로 중학교 무시험제도가 도입되었다.
1969년 서울시부터 시작하여 1970년에는 우리나라 10대 도시가 실시했고, 모교 졸업생도 1971년(22회)부터 본인이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고 모교 지역 학군(學群)에 배정받아 진학하였다. 하지만 지역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려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하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졸업생 수가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Ⅱ-ⅱ 대덕연구개발특구
호남고속도로로 둘로 갈라진 남쪽 지역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하여 1973년 1월 과학기술처 연두순시 때 과학기술 입국을 지시하여 산. 학. 연이 통합 연구개발을 촉진하였다.
이를 위해 5월에 연구학원도시 기본 계획이 확정되고, 동년 11월에 건설부 고시 지정되었고, 같은 해 12월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입지선정에 대한 회고록(월간조선 2009년 4월호)에 의하면
'대덕연구단지 지역(당시 충남 대덕군 일원)은 우리나라 중심부에 위치한 대전을 모(母) 도시로 하는 지역일 뿐 아니라,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및 철도 간선(幹線)이 分岐交叉(분기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우수두뇌들의 집결이 용이하며 전국의 各(각) 산업기지와의 연결이 편리하여 각 공업단지에 대한 기술지원이 용이하고, 錦江(금강)을 옆에 끼고 있어 用水(용수)의 공급과 처리 등 연구 활동환경의 조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 후 정부는 여러 번 조정과 재정을 거쳐 1977년 6월 대덕전문연구단지 토지이용계획(안)을 수립하였고, 12월에는 840만 평이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본격적으로 개발에 착수했다.
1976년부터 시작된 토지 수용은 가정. 도룡. 신성. 장동 일부 마을을 천천히 아주 집요하게 개발하여 모교 학생은 전학 및 미취학으로 재학생 수는 조금씩 꾸준히 줄기 시작했다.
Ⅱ-ⅲ 금봉, 대덕초등학교 분리 개교
모교와 거리가 먼 옛 신봉리, 추목리 학생을 위해 1970년 설립 인가를 받아 신봉리 장터 마을 동쪽 낮은 둔덕 위에 2년여 공사 끝에 1972년 3월 1일 추목리 60번지에 금봉초등학교가 분리 개교하면서 신봉리, 추목리에 살았던 모교 1~5학년 재학생 380여 명이 1972년부터 금봉초등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또 1979년 10월 도룡리 우성이산 서록(西麓)에 새로 유입되는 연구단지 가족을 위해서 도룡리 394번지에 대덕초등학교가 분리 개교하였다.
Ⅱ-ⅳ 620 사업, 자운대
금병산 남쪽 넓은 분지는 예부터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之地)라 하여 만인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아늑한 곳으로 어느 풍수학자의 말에 의하면 ‘금병산이 주산이고 진산이라 하고 왼쪽 적오산이 좌청룡이고 오른쪽 산줄기 박산이 우백호라 하여 자운대 자리에 지덕(地德)이 있다.’ 하였다.
그 자리에 1983년부터 620사업으로 명명한 자운대(紫雲臺) 조성공사로 인하여 추목리, 신봉리, 자운리 일부, 장동리 일부, 내동리(탄동초등학교 학구)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어 당시 모교 학구 자운리, 장동리 주민이 이주하면서 모교 재학생 수가 줄고, 금봉초등학교는 1984년, 개교 12년 만에 폐교를 맞는다.
Ⅱ-ⅴ최대의 위기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973년 시작한 대덕연구단지가 여러 번 명칭이 바뀌면서 준공을 5년여 앞두고 조금씩 남아있던 연구단지 내(內) 마을이 모두 사라지고, 연구단지를 이끌 마을을 만드는 신성지구 택지개발조성사업으로 마지막 남은 모교 주변 마을마저 모두 헐리고 이주하여, 자운리(고내골) 일부와 하기리(아랫터골) 일부만이 모교의 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통계에서 보듯이 1969년 한 해 178명이던 졸업생 수가 1988년에 6명, 1989년 19명, 1990년 13명, 1991년에는 5명이 졸업하는 위기에 처했다.
Ⅲ. 통계
통계는 통계일 뿐이라고 하지만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이 통계이다. 특히, 기록이 많지 않은 고향과 모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참고로 통계 중에서 전국 출생아 수 대비 모교 졸업생 비율은 졸업생이 8살에 취학(就學)했을 경우의 수치이다.
Ⅲ-ⅰ 인구 수
통계를 살펴보면 탄동면 인구는 1930년대부터 점차 늘기 시작해서 전국 인구대비 0.03(%) 이상으로 자연증가율을 보이다가, 1970년대부터 숫자도 줄고 비율도 줄기 시작해서 1985년과 1990년도에는 인구수가 3,000여 명으로 줄면서 비율도 0,007(%)까지 떨어진다.
1995년 분동(외삼. 안산. 반석. 수남. 하기일부)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 1995년에는 17,000여 명이고 2010년에는 30,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늘어나는 이유는 신성지구 택지개발이 끝나고 재건축으로 유입되는 인구와 도룡지구 대단위 아파트 입주민과 자운대 군인 가족이 늘어나면서 탄동면, 아니 신성동의 인구가 제일 많았다.
2010년 30,000여 명이던 신성동 인구는 출생아 수 감소와 인근 세종시 유출 그리고 근래에 도룡지구 아파트 재개발로 인하여 감소추세이다.
2018년 8월 현재 신성동 인구는 24,437명으로 신성지구가 12,001명. 도룡지구 6,333명이고 자운대지구가 6,103명으로 집게 된다.
Ⅲ-ⅱ 졸업생 수
탄동초등학교가 개교하여 입학한 학생이 졸업 연도와 2년 정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개교할 당시 다른 초등학교에서 분리되었거나 전학을 온 것으로 보인다. 또 기수별 졸업생 수 편차가 큰 것이 특징인데, 그 시대사회의 불안정으로 취학 연령이 일정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모교 기수별 졸업생 수를 살피면 1회에서 14회까지 전(前) 기수대비 증감률 폭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 탄동초등학교에서도 보듯이 취학 연령이 다양해서 9살, 10살, 11살에도 입학하는 시대적 상황이라고 본다.
또 한 이후 기수는 우리나라 전후 세대에 걸맞게 전국 출생아 수와 같은 비율로 졸업생 수가 늘면서 20회가 178명으로 제일 많고, 이후 전국 출생아 수와 관계없이 변화의 물결을 맞으면서 줄기 시작해 43회 졸업생 수가 5명까지 줄어든다. 또 전국 출생아 수 비율을 살피면 14회 졸업생이 148명으로 전국 출생아 수 대비 만(萬) 배율이 2.33명이었다가 43회 졸업생 수가 5명으로 0.05명으로 줄어든다. 즉, 같은 해에 전국에서 만 명이 태어나면 14회 졸업생은 2.33명이었고, 43회 졸업생은 0.05명인 셈이다. 또 2003년 54회 졸업생 전국 출생아 수 대비 만 배율이 4.0명으로 제일 높고, 55회 졸업생 수가 261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고, 전 기수대비 증감률은 전국 출생아 수 못지않게 줄어서 2018년 69회 졸업생 수가 118명으로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Ⅲ-ⅲ 인구수와 재학생 수
본 통계에는 없지만 재미있는 분석이 하나 있다.
모교가 개교하고 23년간 금성 8리는 마을간 조금씩 떨어져 있지만 한 울타리 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별로 지역이 나누어지면서 살아가는 형태나 정서가 사뭇 다르다.
다시 살펴보면, 모교가 있는 신성지역은 신성동. 하기동. 자운동 일부. 장동 일부로 12,001명이 살고 있으며 모교의 재학생 수는 650명이다. 또 대덕초등학교가 있는 도룡지역은 도룡동. 가정동으로 6,333명이 살고 있고, 본교와 분교포함 515명이 재학 중이다. 끝으로 자운초등학교가 있는 자운지역은 추목동. 신봉동의 인구가 6,103명이고, 재학생 수는 689명이다.
세 지역 내 인구 분포를 보면 신성지역이 49.1(%). 도룡지역이 25.9(%). 자운지역이 25.0(%)이다. 반면 재학생 수는 모교가 650명으로 35.1(%)이고, 대덕초등학교는 515명으로 27.8(%)인 반면 자운초등학교는 재학생이 689명으로 37.1(%)을 차지한다. 다시 정리하면 신성지역 인구 중 모교의 재학생 수 비율이 5.4(%)인 데, 반면 자운지역 인구 중 자운초등학교 재학생 비율이 11(%)로 모교와 자운초등학교 재학생 비율 차이가 5.6(%)P로 두 배가 많다. 즉 자운대에 사는 사람들은 지역 특성상 젊은 층으로 초등학교 학부모 층이 많이 있고, 신성지역에는 초등학교 학부모 세대보다 더 고령층이 많다고 추정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인구 중 초등학생 비율은 5.23(%)이고 대전광역시는 5.6(%)로 나타난다.
Ⅳ. 교정(校庭)
모교가 개교할 당시(1949년)의 교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회 김동구 선배님 회고(回顧)에 의하면 ‘교사(校舍)는 한 동(棟)이었고, 운동장은 지금의 절반 정도였다’고 하신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졸업 앨범과 1968년부터 촬영한 항공사진을 살펴본다.
Ⅳ-ⅰ 졸업사진
보통 졸업 기념사진은 교사 중앙의 배경으로 촬영하기 때문에 교사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기수(期數) 사진은 볼 수 없어 몇몇 기수 사진을 살펴보면,
1960년 11회 졸업기년 사진
1964년 15회 졸업기념사진
1959년 말쯤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11회 졸업사진에 의하면 항공사진 ①동(棟) 교사(校舍) 배경이 보인다. 또 1962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14회 졸업사진에는 교사 ①. ②. ③ 동(棟)과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④ 동도 보인다. 또 1963년 촬영한 15회 졸업사진에는 교사 ①. ② 동이 동시에 보이고, 20회부터 33회까지 교사 ④. ⑤ 동이 졸업 기념사진 배경으로 잡혀있다.
Ⅳ-ⅱ 항공사진
1968년에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촬영한 사진과 대전광역시에서 1974년부터 촬영한 항공사진은 모교 교정변화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제일 먼저 촬영된 1968년 사진을 보면 현재 모교 지형과 똑같이 묘사되어 있고, 교사는 물론 울타리 나무들 화단, 약간 뒤쪽에 화장실까지 그 당시 교정을 말해주고 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1974년 2월에 촬영된 사진에는 교사(校舍) ② 동(棟) 절반이 없어지고, 교사 ③ 동이 완전히 없어진 자리에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또 1980년 6월 사진에는 교사 ①. ② 동이 없어지고 ② 동이 있던 자리에 일부 신축을 하여 1985년에는 교사 일부분이 완성된 사진이 보인다. 1990년 4월 ④. ⑤ 동 교사가 신축을 위해서 없어지고, 1995년에 ④. ⑤ 동 자리에 모교 본관 ⑦ 동이 현대식으로 세워지고, ② 동이 있던 끝자락에 급식용 ⑧ 동이 세워졌다.
2000년에는 ③ 동과 같은 방향으로 ⑨ 동 교사가 세워지고, 2005년 11월 사진에는 지금 ⑨ 동 교사가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또 ⑥ 동 교사 위에 다목적 체육관 ⑩이 증축되어 있다. 2010년부터 컬러 시대에 맞추어 원색 항공사진이 제공되어서 모교 교정이 한층 밝아졌다.
1968년 이전 자료가 없어서 안타깝지만 10장 항공사진을 살펴보면 50여 년 동안 교내, 외는 그 시대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통계에서 졸업생 수를 보았듯이 80년대 하반기에서 90년대 상반기에는 모교 교정과 신성지구 주변 택지개발로 인하여 획기적인 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모교 울타리는 한 치 변화가 없이 50년을 이어왔고, 교문 안 화단도 옛 모습 그대로 모교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70년 사(七十年 史)를 전하고 있다.
Ⅴ. 오늘
동서고금을 통틀어 개발과 보존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양해져서 대립하거나 호응하기 일쑤이다.
고향 사람들이 좋든 싫든 세월은 흘러 모교가 개교한 지 70년이 지났고, 고향이 변화 물결을 이룬지 50여 년에 가까워진다. 흐른 세월만큼 모교나 고향 초등학교 학군(學群)과 고향산천이 많이 변했다.
Ⅴ-ⅰ 학교의 변화
금성초등학교 본교(本校) 탄동초등학교는 개교 64년 만에 59회 졸업을 끝으로 1994년 2월 28일 폐교(廢校)되었다.
나라의 큰 흐름을 알지 못해서일까, 막지 못해서일까?
다행인 것은 대덕초등학교가 1979년 10월 대덕대로 556(도룡리 394)에 모교에서 분리 개교하여 현재 26학급에 447명이 공부하고 있으며, 39회 졸업을 하여 총 5,13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2010년 도룡동 4번지에 대덕초등학교 도룡분교가 개교하여 모교에 버금가는 명문 학교로 자리 잡았다.
또 자운대에 신봉초등학교가 1996년 유성구 자운로 97(신봉리 208)에 개교하였다. 그 후 2006년 자운초등학교로 개명하여 현재 35학급에 689명의 재학생이 있으며, 연 2,54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때 폐교 위기를 맞았던 모교는 변화무상한 세월 속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땅 한 평 내어주지 않고 제자리에서 변화하여 대지 23,492.7m2(7,119평)에 총 건축면적 10,510.63m2(3,185평), 운동장 7,058m2(2,149평)이 있으며 87개의 교실을 비롯한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650여 명의 재학생이 30학급으로 편성하여, 70명의 교직원과 함께 착하고, 슬기롭고, 건강하게 배우고 있으며, 연 졸업생이 8,421명에 이른다.
2011년, 개교 62년 만에 총동문회 창립 대의원 총회가 발족 하여, 매년 7월에 정기총회와 10월에 모교 운동장에서 동문화합 한마당 체육대회를 비롯한 팔천오백여 동문을 위한 갖가지 행사를 하고 있다.
Ⅴ-ⅱ 동북아 허브, 대덕연구개발특구
대덕연구학원도시로 시작한 대덕연구단지는 2000년 대덕테크노밸리로 바뀌면서 산.학.연 복합단지로 발전하게 되었고, 지금은 대덕연구개발특구로 변경하여 국가 혁신클러스터(innovation cluster)로 도약하게 되었다. 초창기 27.5m2규모로 건설되었던 대덕연구단지는 2005년 특별법을 제정하여 연구단지 인근 대덕테크노밸리와 대덕산업단지를 포함하여 약 67.8km2 규모로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대덕연구개발특구는 212개 연구소와 1.669개 업체에 69,613명이 종사하고 있으며 그 중 국내 이공계 박사급 연구 인력의 11%(15,269명)의 연구진이, 또 우리나라 총연구개발비의 15%(7조 8천억 원)의 연구 투자로 년 매출 17조 원을 올리며 동북아 연구개발 허브(Hub)로 자리 잡고, 우리나라 4차산업혁명 특별시로 발돋움 하고 있다.
Ⅴ-ⅲ 군사교육의 요람, 자운대
1983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자운대는 약 10km2(300만 평) 부지에 대한민국 3군 통합 군사교육 및 훈련시설을 조성하여, 교육사령부. 3군 대학. 육군정보통신학교. 국군의무학교. 국군간호사관학교. 국방부 자운대근무지원단. 육군종합군수학교. 국군대전병원. 육군보병학교. 등이 우리나라 군사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1,950세대, 6,103명이 상주하여 자운대(紫雲臺)를 이끌어가고 있다.
1968년 모교주변 항공사진
2017년 모교주변 항공사진
맺는 말
옛 금성 8리의 산야는 참으로 정스러웠다.
해발 364m 금병산이 마치 금성 8리 지킴이처럼 북쪽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양쪽으로 산굽이가 이어지면서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중앙으로는 금병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잔잔한 동산(山)을 돌아 내(川)를 만들고, 내는 풍부한 곡식 창고 들(野)을 만들어 산내들 사이에 크고 작은 마을이 뭉게구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올곧은 나무는 선산(先山)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였던가?
자운대 지역은 예로부터 천하승지(天下勝地)라 하여 삼운지간(三雲之間)에 만인을 살릴 수 있는 곳으로 명승지로 손꼽았으니, 금병산을 중심으로 남으로 자운동(紫雲洞:자운대), 북으로 청운동(靑雲洞:구룡동), 동으로 백운동(白雲洞:바구니)이니 자운대가 삼운 사이에 있다.
또 1714년에 간행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 기록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계촌(溪村)으로 공주 갑천(公州 甲川) 즉, 갑천 주변으로 대덕연구단지가 그곳이다.
이렇듯 하늘이 내어준 고향산천을 나라에 다 내주었다.
하지만 고향산천은 모교를 남겼다.
“금성(錦城)의 ‘금(錦)’은 금병산(錦屛山) 정기에서 온 것이니 하늘이요, ‘성(城)’자는 산성(山城)의 터전에서 왔으니 땅이라“ 하겠다. 고로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 세워진 금성초등학교(錦城初等學校)는 개교 70년을 지나고 100년, 아니 천년을 이어질 이름과 터를 간직했다.
2019. 1. 1
아름드리 경철.
[자료출처]- 가나다 순
국토지리정보원. 금성초등학교. 대전시교육청. 대전시동부교육지원청. 대전시서부교육지원청. 대전시청. 신성동주민자치센터. 통계청. 학교알리미.
[주석]
[금성 8리(錦城 八里)] : 금성초등학교 개교할 당시 학구(學區), 즉 입학했던 법정리(法定里)로 가정리. 도룡리. 신봉리. 신성리. 자운리. 장동리. 추목리. 하기리라 칭한다.
[모교 연혁] : 모교 연원에는 1942년 탄동초등학교 신성 분교장이 설립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1회 김동구 선배님은 '신성 분교장은 없었고, 숯골 분교장이 있었다'고 증언하셨다.
이에 다양한 고증을 거쳐 바로 잡아야 마땅하다.
[비산비야(非山非野)] : 산도 평야도 아닌 땅, 모교를 짓기 전 모교 터는 창녕성씨(昌寧成氏) 소유의 뽕나무밭이었다.
[혁신클러스터(innovation cluster)] : 기업과 관련된 기관, 대학, 연구소 따위의 지식 생산 기관이 한데 모여서 네트워크를 이루어 경쟁 우위를 확보한 지역.
[전국 ‘금성’초등학교] : 대전(유성). 서울(중량). 충남(금산). 전남(담양). 전남(진도). 경북(의성). 경남(진주). 충남(아산). 부산(금정). 경기(김포). 충북(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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