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충남 대덕군 탄동면 화암리(화암동)

아름드리 블로그 2018. 3. 6. 16:35

화암리(花岩里)

 

 

  화암리는 용 모양을 닮은 산악지대가 머리 쪽은 구즉면 금고리 쪽에 두고, 몸통은 구룡리 아래쪽에 또 다리 부분은 금병산 앞 쪽에 두고, 그 아래 발톱 같은 지점을 북쪽에 두어 남쪽으로는 구름 같은 판 점을 산으로 남게 하여 도참설에 의하면 하늘로 오르는 용의 기점이 된다는 것이다. 즉, 화암리 남쪽은 지상이고 그 위쪽은 떠 있는 하늘이란 뜻이란다.

  삼국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농촌의 터전을 마련하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기름진 땅에 정착하기 위해 여러 씨족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500여 년 전에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설목마을에 정착하여 19대를 이어오며, 1980년대에 40여 호의 집성촌락을 이루는 것이다.

  80여 년 전 1936년 꽃바위 가호 수는 16호였고, 설목을 19호였다. 그 후 개발되기 전 1979년에는 화암리의 전체 가호 수는 69호에 인구는 357명이었다.

 

[마을]

* 꽃바위 - 설목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꽃봉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어서 꽃바위 또는 화암(花岩)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설목(雪目) - 꽃바위마을 동북쪽에 설목이라는 사람이 처음 살았다 하여 붙여진 마을로 연안김씨의 집성 마을이다.

 

[고개]

* 매낙골고개 - 꽃바위마을 동남쪽에 있는 고개를 매낙골고개라고 부른다. 또한, 고개에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고개라고도 부른다. 매낙골고개는 꽃바위 마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매낙골골짜기에서 동쪽으로 전민마을로 가는 길이 있고, 그 아래 동남쪽으로는 문지 배나무골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 고갯길에서 다시 남쪽으로 고갯길이 있는데 이 고갯길이 도룡 경운이로 넘어 다니는 고개이다.

이렇듯 꽃바위에서는 이 세 갈래의 고갯길로 많은 사람이 넘어 다녔다.

* 오릿골고개 - 꽃바위에서 서쪽에서 장동 장재울로 넘어 다니는 골짜기가 오리골짜기라 하여 오릿골고개라고 부른다.

 

[골짜기]

* 매낙골 - 꽃바위마을 남쪽으로 있는 골짜기를 매낙골이라고 부르고, 그 골짜기에 매낙골고개가 있다.

* 연분쟁이골 - 설목마을 동남쪽에 연분쟁이골아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옛날에 대감의 연(輦)과 현감의 연이 싸웠다는 골짜기로 연분쟁이골이라고 부른다.

 

[들]

* 비룡바위들 - 설목마을 서남쪽에 비룡바위가 있고 그 바위 주변에 펼쳐진 들을 비룡바위들이라고 부른다.

전해오는 구전에 따르면 비룡바위를 두르고 있는 산이 있어서 산에 가려 바위가 보이지 않았으나 용이 하늘로 승천하던 날 억수같이 비가 와서 산을 뭉개어 들에 넓게 깔고는 비룡바위만 사방에서 보이게 하였다 한다.

 

[바위]

* 치마바위 - 설목마을 북서쪽에 있는 바위가 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 같이 생겼다 해서 치마바위 또는 상암(裳岩)이라고 부른다.

* 질마바위 - 꽃봉바위 남서쪽에 질마바위가 있는데 바위 모양이 길마(짐을 나를 때 말이나 소의 등에 얹는 도구)를 닮았다 해서 길마바위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질마바위라고 부르는 바위이다. 안암(鞍岩)이라고도 부른다.

* 꽃봉바위 - 꽃바위마을 북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 위에 꽃나무가 많이 있는 바위라 꽃봉바위 그리고 화암(花岩)이라고 부르는 바위이다.

* 비룡바위 - 설목마을 남서쪽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비룡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백 년 간 수도한 이무기가 이 바위를 통해서 승천했다 하여 비룡바위 또는 비룡암(飛龍岩)이라고 부른다.

 

[민속]

* 설목마을 산신제 - 매년 음력 정월 14일 아침에 적오산 아래 돌장승 앞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돌장승은 적오산 아래 작은 절에 있었으나 절이 폐허가 되고 큰비에 돌장승이 떠내려와 논 속에 묵혀 버렸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돌장승을 위해야 한다는 공론으로 마을 앞에 세우고 거리제를 지냈다. 그 후 1980년 경지정리 때 다시 땅속에 묻힌 것을 그대로 방치하여 마을에 병고가 잦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파내어 적오산 아래에 세우고 산제를 지낸다.

 

[전설]

* 연분쟁이골의 신대감 - 조선시대 광해군 때 유교칠신(儒敎七臣)의 신대감(申大監)의 연()과 지방 현감의 연이 연분쟁이골에서 서로 비키라고 연싸움 한 전설로 신대감의 여유 있는 삶과 인품을 전하고 있다.

 

[주(註)]

  화암리는 예나 지금이나 길목의 중심에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회덕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이었고, 1930년경에 유성에서 신탄진으로 통하는 신설된 도로의 길목에 놓여있다. 그런가 하면 1973년 호남고속도로가 화암리를 관통하였다. 현재는 도룡에서 넘어오는 길과 전민에서 넘어오는 길이 화암 사거리에서 만나고, 호남고속도로 북대전 나들목이 설목에 생기는 것을 보면 우연이 아니라 설목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오는 길목인지도 모른다.

  화암리는 이름에서 보듯이 전해오는 바위가 많다. 그중 법정지명이 된 꽃봉바위(花岩)는 바위 주변에 꽃나무가 얼마나 많고, 그 바위가 얼마나 이쁘고 신성했으면 그 바위로 인한 화암리(花岩里)라는 법정지명을 얻었을까?

 불현듯 오르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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