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대덕연구학원단지 이렇게 만들어 졌다

아름드리 블로그 2013. 12. 21. 10:31

중학교 시절,

고향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연구단지, 연구단지' 하신다.

처음 들어보는 '대덕연구단지'가 내 고향에 생긴다는 이야기다.

누가, 언제, 왜 생기는지 나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쫓기듯 고향을 내어주고

살아왔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2009년 4월호에 실린 월간조선을 보면서

대덕연구학원도시의 시설 배경을 정리한다.

 

대덕단지요? 崔亨燮(최형섭) 장관과 吳源哲(오원철) 수석, 安京模(안경모) 사장이 만들었어요.”
 
  ‘대덕단지는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金正濂(김정렴) 前(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대답이었다.
 
  최형섭 前(전) 과학기술처 장관(1971~1978년 재임·作故). 初代(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으로, 最長壽(최장수) 과기처 장관으로 과학기술행정 분야에서 탁월한 족적을 남겼던 그는 1973년 1월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과기처 연두순시 때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건의해 대덕전문연구단지 건설의 단초를 열었다.
 
  오원철 전 대통령경제제2수석비서관(1971~1979년).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을 총지휘했던 그는 1976년 대덕단지 관련 업무를 넘겨받아 당초 대덕단지의 개념을 연구학원도시에서 전문연구단지로 조정하는 한편, 정부出捐(출연)연구소와 민간연구소들의 대덕단지 입주업무를 수행했다.
 
  안경모 전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제16대 교통부 장관(1964~1967년)을 지냈고, 1967~1968년 국가기간고속도로계획조사단장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참여했던 그는 1974~1983년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대덕단지 조성을 담당했다.
 
  이 세 사람은 과학기술자(최형섭) 아니면 엔지니어(오원철, 안경모)였다. 지금은 정부에서 멸종되다시피 한 理工系(이공계) 출신 엘리트들이 대덕전문연구단지, 오늘날의 대덕연구개발특구를 만든 것이다.
 
 
  대덕 前史
 

1979년 2월 2일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소를 둘러보는 朴正熙 대통령.

  대덕단지 건설논의는 과기처 발족 직후인 1968년에 나온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1967~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계획에서는 “연구기관이나 대학을 분산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집합시켜 연구·학원단지를 조성할 때 연구시설의 공동활용, 연구자료의 공동이용, 다수 분야와 관련된 종합적 연구의 추진 등 연구능률을 최대화하며, 대학교육과 연구를 연계시킴으로써 인재양성 면에서도 그 효과가 클 것”이라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1980년대를 지향한 과학한국의 구상으로서 연구·학원도시 조성을 추진할 것을 연구검토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구상은 ‘서울연구개발단지’(홍릉단지) 조성으로 이어졌다. 1970년 金善吉(김선길·후일 해양수산부 장관 역임·作故) 과기처 진흥국장 등은 그동안 서울 홍릉을 중심으로 이미 건설되어 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및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장차 들어설 한국과학원(KAIS·과학기술인재양성기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방과학연구소(ADD) 등을 유기적으로 묶어 ‘知的(지적)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구상을 했다. 1971년 4월 한국과학원, 한국개발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등이 착공되면서 이 구상은 현실화됐다.
 
  과기처는 이와 함께 홍릉단지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될 경우에 대비해 제2연구단지 조성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 과기처는 1971년 초 李德善(이덕선·에너지연구소 원자력연수원장 역임) 경제과학심의회 과학기술분석관(공업技正, 서기관급)에게 제2연구단지 건설 타당성 조사연구를 의뢰했다.
 
 
  최초 후보지는 삼성 에버랜드 자리
 
  이덕선 분석관은 1971년 7월 15일 <연구교육단지 건설을 위한 마스터플랜>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연구단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주장했다. 그가 연구단지의 立地(입지)로 지목한 곳은 오늘날 삼성에버랜드가 있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일대(당시 행정구역 기준). 그는 이곳에 10년에 걸쳐 10만명의 인구가 들어갈 700㏊(210만평) 규모의 연구학원도시를 조성하고 22개 국·공립 시험연구기관 등을 입주시키자고 제안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새로운 연구개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종합과학기술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로는 이러한 수요에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여긴 정부는 선박연구소·해양개발연구소·기계기술연구소·석유화학연구소·전자기술연구소 등 5대 전략기술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고 1973년 12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서울에는 이 연구소들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1970년 현재 70개 국·공립 시험연구기관 중 35개가 수도권에, 그중 22개가 서울시내에 있었다. 국립공업연구소는 동숭동 대학로에, 중앙전매연구소(現 KT&G중앙연구원)는 종로 4가, 국립지질조사소(現 한국지질자원연구원)는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식이었다.
 
  이들 서울시내에 있는 시험연구기관들의 경우 소음, 진동, 대기오염 등 도시공해 때문에 연구환경이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대덕연구단지 30년사>에 의하면 동숭동에 있던 국립공업연구소의 경우, 연구소에서 나오는 냄새 때문에 인근에 있던 서울대 법과대학생들이 연구소 철거 등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 홍릉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나마 나은 환경이었지만, 홍릉단지도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들어서면 조만간 포화상태가 될 상황이었다. 때문에 서울시내에 散在(산재)한 기존의 연구기관들과 신설되는 연구기관들을 이전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단지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1973년 연두순시에서 ‘제2연구단지’ 건의
 
대덕연구단지 건설을 朴正熙 대통령에게 건의한 故 崔亨燮 과기처 장관.

  10월 維新(유신) 이듬해인 1973년 1월 12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年頭(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全(전)국민 과학화 선언’을 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우리는 절대 선진국가가 될 수 없다. 80년대에 가서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汎(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다”면서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제창했다.
 
  이후 한 시절을 풍미했던 ‘10월 유신,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국민소득’이라는 구호도,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성장동력들도 이날의 기자회견에서 탄생했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이 있은 지 닷새 후인 그해 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과기처를 연두순시했다. 당시 대통령 연두순시는 공직사회의 가장 큰 행사였다. 각 부처의 長(장)들은 전년도 11월부터 자기 부처의 총력을 기울여 연두순시 브리핑 준비에 들어갔다. 연두순시에서 대통령의 눈에 든 관료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당시 과기처 장관은 최형섭 박사였다. 1966년부터 5년간 初代 KIST 소장으로 있다가 1971년 제2대 과기처 장관에 임명된 그는 장관으로 부임한 직후 <연구교육단지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던 이덕선 경제과학심의회 분석관을 과기처로 불러 종합계획관(2급)으로 임명했다.
 
  최형섭 장관은 이날 연두순시에서 선박·기계·석유화학·전자 등 전략산업 기술연구기관의 단계적 설립 ▲서울에 산재되어 있는 국·공립 시험연구기관들 이전의 긴급성 등을 강조한 후, 서울 홍릉단지에 이은 ‘제2연구단지 건설試案(시안)’을 건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 장관에게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을 구체화해 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덕·용인·청원 등 검토
 
대덕연구단지 실무책임을 맡았던 全相根 前 과기처 종합기획실장.

  최형섭 장관이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 수립을 맡긴 사람은 全相根(전상근) 과기처 종합기획실장이었다.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을 지낸 그는 KIST 설립 당시 실무책임자였고, 과기처 창설의 産婆役(산파역)을 맡았던 과학기술행정가였다. 최형섭 장관은 그해 3월 과기처에 종합기획실을 신설하면서 전상근 국립중앙과학관장을 실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종합기획실은 1급 실장 아래 각각 10명의 1, 2급 심의관을 둔 매머드 부서였다.
 
  종합기획실장이 된 후 그에게 떨어진 첫 번째 지시가 연구학원도시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덕선 계획관의 <연구학원도시 마스터플랜>을 검토하는 한편, 호주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金炯萬(김형만) 박사, 權原基(권원기·과기처차관 역임) 종합계획관, 徐正萬(서정만) 과장 등에게 실무작업을 맡겼다.
 
  이들은 입지선정 기준으로 ▲서울의 기존 대학 및 연구기관과 지방의 중화학공업기지가 유기적으로 연계를 맺을 수 있도록 전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할 것 ▲계획면적 350~500만평의 충분한 부지조성이 가능한 위치일 것 ▲교통·用水(용수)·電力(전력) 등 도시기반조성 비용이 적게 들며 地價(지가)가 저렴할 것 등 세 가지를 제기하면서, 연구학원도시 후보지로 충남 대덕, 경기 화성, 충북 청원 등 세 군데를 선정했다.
 
  전상근 실장은 “여러 가지 조건상 우리들의 의견은 충남 대덕으로 모아졌다. 과기처를 관장하고 있던 鄭韶永(정소영·농수산부 장관 역임) 경제제1수석비서관도 ‘대덕으로 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윗분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3군데 모두 후보지로 올렸다”고 述懷(술회)했다.
 
  1973년 5월 18일 청와대에서 ‘제2연구단지 건설계획(안) 보고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 金鐘泌(김종필) 국무총리, 太完善(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南悳祐(남덕우) 재무부 장관, 金玄玉(김현옥) 내무부 장관, 閔寬植(민관식) 문교부 장관, 李洛善(이낙선) 상공부 장관, 張禮準(장예준) 건설부 장관, 崔亨燮(최형섭) 과기처 장관, 金正濂 대통령비서실장, 鄭韶永 경제제1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김종필 총리가 대덕 주장
 
  브리핑은 전상근 과기처 종합기획실장이 맡았다. 그는 39매 분량의 브리핑을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브리핑이 끝나자 박 대통령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할 때는 어떻게 했지요?”
 
  장예준 건설부 장관이 “경제기획원에서 구상하여 특별법을 제정하여 추진했다”고 대답했다. 이어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해서는 경주관광종합개발의 예를 따라 청와대를 중심으로 기획단을 구성하고 건설은 건설부에서 주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태완선 부총리는 “청와대도 일이 많은데 모든 것을 청와대에만 미루면 곤란하다”면서 “이번 계획은 과기처나 총리실에서 수립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반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완선 부총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와대도 일이 많으니 서울대 건설본부와 같이 과기처에서 건설본부를 만들어 추진 감독하되, 계획은 총리실이나 관계기관에서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수립하라”고 한 것이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 대통령의 말을 받아서 “연구학원도시의 계획수립과 건설은 과기처에서 주관하고 관계부처 간의 업무 조정은 총리가 담당하겠다”고 말했다.
 
  입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김정렴 비서실장이 의견을 냈다.
 
  “부지 확보를 위해 우선 100만평만 구입한다면 낙동강 유역 매립지에도 적당한 후보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반대했다.
 
  “우수한 두뇌를 용이하게 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연구학원도시를 대전 以南(이남)에 건설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 공업용지나 농업용지는 연구학원도시 건설에서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때 김종필 국무총리가 “3개 후보지 가운데 대덕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면서 대덕을 지지하고 나섰다. “경기 화성은 방송시설 관계로 곤란하고, 청원 또한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항공사진을 보니 대덕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연구학원도시가 대덕으로 결정되면 충남대를 이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3개 후보지 가운데 충남 대덕이 연구학원도시 후보지로 결정됐다.
 
 
  왜 대덕이 선택됐나?
 
  일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과기처 장관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후보지를 돌아보고 난 후 대덕으로 결정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전상근 당시 과기처 종합기획실장은 “그건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아마 박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후보지를 돌아보고 난 후 대덕으로 결정했다는 얘기는 회의석상에서 박 대통령이 “항공사진을 보니 대덕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것이 訛傳(와전)된 것인 듯하다.
 
  1973년 5월 28일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에 대한 대통령 裁可(재가)가 떨어졌다. 과기처는 김형만 박사의 국민환경문제연구소에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 용역을 맡겼다. 김형만 박사 등이 제출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은 “대덕연구학원도시의 기본이념은 연구소와 學園(학원)이 共存(공존)하는 知的(지적)공동체를 형성하여 지적 교류의 촉진과 시설 및 인력활용의 극대화를 도모함으로써 국가산업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효율적 개발과 이의 전국적 확대를 기하는데 있다”고 선언하면서 대덕을 후보지로 결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同 지역(당시 충남 대덕군 일원)은 우리나라 중심부에 위치한 대전을 母(모)도시로 하는 지역일 뿐 아니라,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및 철도 幹線(간선)이 分岐交叉(분기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우수두뇌들의 집결이 용이하며 전국의 各(각) 산업기지와의 연결이 편리하여 각 공업단지에 대한 기술지원이 용이하고, 錦江(금강)을 옆에 끼고 있어 用水(용수)의 공급과 처리 등 연구활동환경의 조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은, ‘대덕연구학원도시는 약 810만평(26.7㎢)의 敷地(부지)에 약 5만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게 될 것’이라면서, 1974년에서 1981년까지 ▲도로·상하수도·교량· 인터체인지 등 도시하부구조 건설 ▲5대 전략산업연구기관 신설 ▲12개 국립연구기관 이전 ▲1개 대학 설립 ▲공동 이용시설 및 관리기구 설치 등을 추진하기로 예정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서정만 과기처 과장은 <대덕연구단지 30년사>에서 연구단지 예정 구역 내에 있던 11가구의 나환자촌 주민들을 설득해 이전토록 한 것과 閔復基(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의 一族(일족)인 驪興 閔氏(여흥 민씨) 가문의 묘소 20여 기를 옮기도록 한 것을 큰 보람으로 꼽았다. 그는 “두 경우 모두 큰 어려움 없이 해결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최고통치권자의 강한 의지와 관심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국민들도 국가계획사업을 위해서는 私益(사익)도 양보하게 만든 것이 근본요소였다”면서 “요사이 개발계획과 관련된 각종 시위를 지켜볼 때마다 나는 퍽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진노
 
대덕연구학원도시를 대덕연구단지로 조정한 吳源哲 前 경제제2수석비서관.

  당초 ‘연구학원도시’개념으로 출발했던 대덕단지는 1976년 4월에 이르러 주관 부서가 과기처에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로 바뀌면서 ‘대덕전문연구단지’로 조정됐다. 당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은 김종필 국무총리였지만, 실제로 이를 움직이는 것은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맡고 있던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이었다. 따라서 대덕단지 건설업무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 맡게 됐다는 것은 청와대가 직접 이 사업을 챙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3년 5월 18일 청와대 보고회의 당시 “청와대도 일이 많으니 과기처에서 건설본부를 만들어 추진 감독하도록 하되, 계획은 총리실이나 관계 기관에서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수립하라”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일까?
 
  전상근 당시 과기처 종합기획실장 등 당시 과기처 관계자들에 의하면, 1976년 3월 말 박정희 대통령의 대덕 시찰 때 있었던 과기처의 브리핑이 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 브리핑은 그해 2월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최형섭 과기처 장관은 해외출장 중이었고, 전상근 종합기획실장은 공무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昌錫(이창석·作故) 과기처 차관은 자신이 직접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 차관은 실무진을 진두지휘하면서 그때까지 진척되어 온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물론 이 사업의 전체 투자계획을 다시 조정하는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다. 전 실장은 “대통령이 현장을 시찰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정부가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유도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대덕시찰과 브리핑은 계속 연기되다가 3월 말에 이르러 갑자기 성사됐다. 최형섭 장관은 전상근 실장에게 브리핑을 맡게 했다.
 
  브리핑 준비에 참여하지 않았던 전 실장은 ‘내가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그는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추진 상황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보고했지만, 앞으로의 사업의 윤곽과 투자계획에 관한 데에 이르자 막히고 말았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보고를 듣던 박 대통령은 급기야 브리핑을 중단시키고 “지금 말한 투자계획의 숫자와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고 따졌다. 전 실장이 우물거리자 박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브리핑 봉을 잡고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主客(주객)이 顚倒(전도)되어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을 하는 형국이 되자, 배석했던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韓基益(한기익·표준과학연구원 기술부문 회장 역임) 당시 과기처 종합계획관실 연구단기건설추진담당 사무관은 <대덕연구단지 30년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박 대통령은 ‘과기처의 방향은 이상적이지만,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산형편을 감안하여 도로건설의 단계적 확대, 상수도 引入(인입)예정지 변경, 연구소 건설은 기술개발의 성과를 보아가며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떠냐. 자원연구소와 해양연구소의 해양광물 탐사기능의 중복성 및 핵연료공단 예산 500억원의 과다 책정 등의 문제점을 제기했으며, 계획기간 중 기반시설과 연구소 건설비 1100억원은 우리 경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에 브리핑을 한 전상근 실장은 기술적인 답변이 부족했고, 최형섭 장관도 汎(범)부처적 차원의 문제점에 대한 소신 있는 답변이 부족했다.”
 
  자리에 앉은 박정희 대통령은 차가운 눈으로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찾더니 이렇게 지시했다.
 
  “앞으로 이 사업은 과기처에만 맡겨두지 말고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국가의 재정규모를 감안해서 투자계획을 再(재)조정하시오. 사업별로 투자 우선순위를 정하고 예산 형편에 따라 연차적으로 무리 없게 사업을 추진하시오.”
 
 
  연구학원도시에서 연구단지로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덕단지 관련 업무를 맡게 된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1976년 4월 14일 제1차 수정기본계획을 내놓았다. 이 계획은 국가적·연구소 차원에서 경제성과 연구소 운영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수정계획 기본방향의 제1항에 따르면 “대덕연구단지는 단계별로 예산 범위 내에서 추진한다”는 전제 아래 ▲연구소는 산업이 요구하는 연구소부터 순위에 따라 건설하고 (국가적 경제성) ▲연구소별로 하나씩 완성하며 ▲연구소 자체도 단계적으로 건설한다(연구소 경제성)고 되어 있다.
 
  “연구소는 自立(자립)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한 제2항도 눈길을 끈다. ▲정부투자는 최대한으로 줄이고 민간자본을 가능한 한 참여시키며 ▲연구소 운영에 있어 정부 보조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고, 負債(부채) 및 借款(차관)도 자체적으로 상환하며, 연구과제별로 예산을 계상하며 책임을 완수케 하는 방안을 취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SOC 건설 등에서 많이 도입된 民資(민자)유치, 1980년대 영국 등에서 정부개혁의 일환으로 시작된 책임행정기관 운영방식과 유사한 방식이 이때 이미 시도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기본계획 제3항에서는 “입지계획은 현재의 案(안)을 가능한 한 살리되, 공업단지 조성계획과 같은 개념하에서 조성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아래에 ▲도로·용수 및 전기공급 간선 건설은 정부지원공사로 하고 ▲지원시설에 대한 투자와 활용도를 고려하여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집중화한다는 등의 내용이 이어진다.
 
  오원철 수석은 “연구소 등을 단지 내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집중화함으로써 연구단지 내에 연구소들이 散在(산재)할 경우 불필요한 도로 건설 등으로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막았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단지 내 도심지 건설계획은 일단 유보한다”면서, 주택문제는 대전에 아파트를 건설해 해결하도록 했다. 종합공대 건설도 유보됐다.
 
  결국 이 제1차 수정기본계획을 통해 대덕은 ‘연구학원도시’에서 산업공단 개념에 준하는 ‘연구단지’로 개념이 바뀌었다. 이에 대해 전상근 실장은 회고록 <한국의 과학기술정책-한 정책입안자의 증언>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청와대의 오원철 수석비서관은 예리하게 날이 선 칼을 휘둘러 당초의 대덕연구학원도시계획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연구학원도시는 연구단지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시퍼런 칼날에 과학자들이 안주할 주택계획도 여지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리하여 최형섭 장관이 구상한 ‘연구하는 푸른 공원도시’의 꿈은 한여름 구름처럼 날아가 버렸다.”
 
  연구학원도시의 최초 발의자인 이덕선 전 원자력연수원장도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에서 예산절감을 내세워 연구단지건설기본계획을 대폭 조정한 결과, 연구협동체제를 지향한 연구기관의 계열별 배치가 무시됐으며, 연구소 입지와 연결성이 부족한 주거형태가 됐다”고 비판했다.
 
 
  산업단지 개발 개념으로 접근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작성한 제1차 수정기본계획의 일부. 도로개설, 수도·전기 설치 등에 들어가는 예산을 아끼기 위해 연구소를 단지 내 幹線도로변에 짓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원철 수석도 과학기술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모르지 않는 듯했다. 그의 말이다.
 
  “내가 대덕단지 업무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당시 나는 중화학공업 건설 업무만으로도 바빴다. 과기처에 일을 맡겨 놓았더니, 상하수도 끌어오는 것이나 도로 닦는 것 하나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때문에 대덕연구단지를 하나의 공업단지로 생각하고 산업기지개발 방식을 도입해서 관련법에 따라 단지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다.”
 
  <대덕단지 30년사>에서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때의 건설추진 방식은 기반시설 건설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연구소 건설은 해당 연구소가 시행함으로써 토지 보상에 따른 민원의 발생과 개발업무의 미숙으로 인하여 건설사업 추진에 많은 애로사항을 가지고 있었다.
 
  기반조성공사 및 연구소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토지매입 및 개발의 효율적 수행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1977년 12월 8일 대덕연구단지 지역을 산업기지개발촉진법(현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대덕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1979년 1월부터는 중부 주거지 개발사업자로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지정하여 공영개발 방식에 의한 최초의 개발을 시작하였다.>
 
  산업기지개발공사가 대덕단지 건설에 나서게 된 것도 이러한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대덕단지를 만든 사람의 하나로 안경모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을 꼽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78년 3월 18일, 한국표준연구소(現 한국표준과학연구원)가 대덕단지에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선박연구소·한국화학연구소·한국핵연료공단·충남대 공업교육대학 등이 속속 입주하기 시작했다.
 
 
  대덕단지, 그 후
 
  1978년 제10대 총선이 끝난 후 改閣(개각)이 단행됐다.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꿈꾸었던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7년6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 사망했다.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그가 ‘國寶(국보)’라며 아꼈던 오원철 수석의 시대도 끝났다. 방위산업 건설과 관련해 軍部(군부)와 마찰을 빚었던 그는 1980년 5·17 계엄확대조치 이후 고초를 겪었다. 그의 지휘 아래 건설된 중화학공업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조정됐고, 방위산업도 많은 부분이 포기됐다. 대덕단지의 연구소들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이 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책연구기관들이 통폐합되거나 관리주체가 바뀌는 惡習(악습)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 와중에도 대덕단지 건설은 계속됐다. 1984년 8월 정부는 대덕산업기지개발기본계획을 변경했다. 첨단산업분야의 시범적인 기술연구단지로 건설해 정부 및 민간연구소와 고급인력양성기관의 集合(집합)단지로 육성하기로 한 것이다. 단지 전체의 계획적 균형개발과 복합기능의 新(신)도시 건설 차원에서 단지조성사업은 한국토지개발공사가 담당하도록 했다. 1985년 11월에는 서남부 미개발지역 일원에 대한 1단계 개발사업이, 1987년 6월에는 동북부 미개발 지역 일원에 대한 2단계 개발사업이 시작됐다.
 
  1992년 11월 27일,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대덕연구단지 기반시설 준공식이 대덕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렸다.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이 나온 지 24년, 1971년 <연구교육단지 건설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나온지 21년, 1973년 1월 17일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제2연구단지 건설 시안’을 보고한 지 19년 만에 대덕단지 건설의 大役事(대역사)가 일단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