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내 고향 숯골

아름드리 경철 2014. 10. 6. 09:38

1980년, 동둑에서 바라본 금병산

 

 

  명산, 계룡의 주봉 천왕봉(845m)에서 동북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장군봉(503m)에 이르고, 또다시 동쪽으로 갑하산(469m)에 닿는다. 이어 북쪽 우산봉을 거쳐 동북 방향으로 더 가면 내 고향의 진산인 금병산(368m)에 이른다. 일찍이 금평산(錦平山)으로 부르던 이 산을, 조선 이태조(이성계)가 비단 병풍 같이 아름답다 하여 금병산(錦屛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봄에는 언니와 누나의 얼굴처럼만큼 화사한 진달래꽃이 등성이마다 피어나는 산. 여름이면 높푸른 녹음이 아버지 닮아 부지런히 숲을 이루는 산. 가을이면 마음 넉넉한 할머니처럼 숯골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던 산.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는 엄마의 따스한 품처럼 북풍을 막아 주었던 그 산이 바로 금병산이다.

 

  근원이 없는 우주 만물은 없듯이 나 또한 나고 자란 고향은 있을 터,

이제 ‘내 고향 숯골’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숯골’ 또는 '탄동'(炭洞)이라는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로부터 목탄(木炭)이라고 부르던 숯은, 난방과 취사 그리고 생활 전반에 고급 제로 널리 쓰였고, 그 숯을 가공하는 고을이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내 고향 숯골'은 과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1970년, 3개리(추목리. 신봉리.자운리) 항공사진

 

 

  넓은 의미의 숯골은, 옛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忠淸南道 大德郡 炭洞面) 전체를 일컫는다. 왜냐하면, 숯골을 굳이 풀이 하자면 "숯을 굽던 골짜기" 또는 "숯을 만들던 고을"쯤 되고 한자어로 "炭洞"이 된다.

 

  좁은 의미의 숯골은 금병산 아래 자리했던 추목동 자연마을 숯골이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본동네' 또는 '본동'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곳이 숯골의 본디 터전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의미의 숯골은 금병산 정기가 이어지고 산그늘이 드리워지는 지역, 곧 옛 법정지명(法政地名) 추목리(秋木里), 신봉리(新峰里), 자운리(自雲里)를 아우르는 곳이다.

 이 지역에는 숯골(본동). 우마장. 만선동. 선인동. 자선동. 천복동. 가는골. 가래울. 원가는골. 새울. 장터. 중방이. 절골. 알봉. 느러리. 새뜸. 호박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정겹고 친근한 마을이다.

 예전에는 31번 숯골 버스를 타고 내려야 닿을 수 있었던 이 지역은 면적이 9,264m2에 이르며, 대략 호남고속도로 북쪽에 자리한 마을들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 고향 숯골"이 바로 이 지역을 말한다.

 

 

  내 고향이 왜 "숯골"이라는 자연마을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주봉이 해발 368m의 금병산은 동서로 열두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제1봉 옥련봉을 시작으로 일광봉, 공덕봉, 도덕봉, 옥당봉, 연화봉, 운수봉, 출세봉, 감찰봉, 현덕봉, 대법봉을 지나, 노루봉 전설이 전해지는 제12봉이 창덕봉에 이른다. 

  특히 금병산 남쪽 사면은 숯의 원료가 되는 갈참나무나 굴참나무가 자라기에 천혜(天惠)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참나무로 만든 숯은 화력이 뛰어나 한양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숯골에서 만든 숯을 지고 한양에 가서 산매(散賣)하여도 넉넉한 수익을 남길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금병산 숯이 한양에까지 이름을 떨치면서,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자연스럽게 숯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외사평(外史評)에 따르면 계룡산 주봉에서 남쪽 신도안을 일국(日局)이라 하였고. 금병산 아래를 오국(五局)중 월국(月局)이라 불렀다. 또한 도참설(圖讖設)에서는 '우리 것이 숨 쉬는 곳으로는 계룡산보다 금병산이 더욱 수려하다'.고 하여, 금병산 앞 분지를 "만인 가활지지(萬人 可活之地)"라 일컬었다. 

  아울러 1714년에 간행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地)에는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계촌(溪村) 가운데 하나로 공주 갑천(公州 甲川), 곧 갑천 유역을 꼽고 있다.

  이렇듯 금병산 아래에는 주역(周易) 64괘(卦)를 바탕으로 금병산 아래 수운교 천단이 들어섰고, 도참설 예언에 따라 군 시설 자운대가 세워졌으며, 또 택리지가 극찬한 땅에는 훗날 대덕연구단지와 갑천 너머에 둔산 신도시와 정부대전청사가 생겨 대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랜 세월 금병산에서 품어 온 정기(精氣)와 땅의 이치(理致)가 빚어낸 결과인지 모른다.

 

 

  그러면 숯골이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불리기 시작했을까?

 

  숯골 지역 행정적인 지명을 살펴보면, 백제 때에는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하였고, 신라 때에는 비풍군 영현인 적오현(赤鰲縣)에 속했었다.

  고려 시대에는 공주부에 속한 덕진현(德津縣)의 관할이었으며, 조선 초기 공주군 탄동면(炭洞面)이 신설되면서 비로소 '탄동'이라는 행정지명이 등장하였다.

  조선 말기인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는 대전군 탄동면으로 개칭되었다. 이어 1935년 대전부가 신설되면서 대덕군 탄동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3년 대전시의 행정구역 확장으로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면서 "탄동"이라는 법정지명은 약 60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유성구 관할이 되었고,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성동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

  다시 정리하면, '숯골'이라는 자연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탄동(炭洞)'이라는 행정지명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주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불러 왔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 시기를 대략 고려 말 무렵으로 추정해 본다.

 

 

  또 하나, 숯골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을까?

 

  자운리 삼현들에 통일신라 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고, 2002년 자운대 골프장 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추목동 유적을 살펴보면,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움집터(住居址) 두 기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고인돌(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이 확인 되었다. 학자들은 이 유적들을 자운동 유적과 같은 시기인 기원전(紀元前) 5~6세기로 보고 있다.

 또 한 자운대 골프장 안에 남아 있는 고인돌과 금병산 자락 너럭바위에 새겨진 150여 개가 넘는 성혈(性穴)을 보면, 숯골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 성혈에는 옛 숯골 사람들이 품었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자은동(慈恩洞)에는 102가호(家戶)가 있었으며, 인구는 남자가 190명, 여자가 166명 등 모두 356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이미 250여 년 전부터 이 지역이 안정된 농촌 사회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중기에는 추목리에 경주이씨(慶州李氏) 35호가 살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이곳이 경주이씨의 집성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08년 이전에는 탄동면사무소가 추목리 숯골에 있었다. 이어 1927년 수운교가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신도가 금병산 아래에 터를 잡았고, 1928년에는 신봉리에 장이 서면서 시골 장터로서는 제법 큰 규모의 시장으로 번성하였다.   1929년 수운교 본전인 도솔천 낙성식과 함께 신도들이 들여온 직조 기술은 숯골의 새로운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숯골에서 생산된 소창은 예전 금병산 숯 못지않게 명성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을 술골로 불러 모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대전 외곽의 평화로운 농촌 마을로 이어져 오던 숯골은 국책사업 자운대(일명, 620 사업) 조성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자운대 개발로 인해 많은 숯골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자운대 개발 직전인 1979년 기준을 보면, 추목리는 307호 1,681명, 신봉리에는 172호, 999명, 자운리에는 116호, 630명이 살고 있었다. 이를 모두 합하면 595호 3,310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마을 이었다.

 

 

  어느 나라나 지방, 또는 마을은 그 지역의 지형이나 기후에 따라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형성된다. 내 고향 숯골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숯골의 역사와 삶, 그리고 문화와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결국 모든 것은 첫째 금병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금병산은 '숯골'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산이다.

 

 둘째는 산줄기 못지않게 중요한 물줄기이다. 

 

1970년,  탄동천(숯골내) 물줄기

 

 

  공식 명칭이 탄동천(炭洞川)인 숯골내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금병산 중턱 옹달샘에서 발원한다. 물줄기는 선인동과 만선동을 거쳐 옛 금봉초등학교 뒷편에 이르러, 수운교 천단 서쪽 등골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난다.

  그 물줄기는 다시 가는골 마을 서쪽으로 휘어져 장터들과 삼현들을 적시고, 느러리 마을 앞 동둑에 이르러 동둑과 손을 맞잡은 듯 굽이굽이 흐른다.

  또 다른 지류는 절골에서 시작된다. 이 물줄기가 중방이 마을 앞을 지나 중방들을 적시고 내려와 호박골 앞 동둑에서 숯골내와 만난다. 그리고 고내골 마을 앞 넓은 번답들에서 물 한 모금 내어주고 유유히 흘러간다.

 

  금병산 동쪽 소반골에서 시작한 또 하나의 물줄기는 원가는골과 가는골 마을 사이를 스치듯 지나 장재울과 새뜸 구룽 지대를 내달린다. 이어 장재울 남동쪽 물과 황충미 앞에서 만나 수천이 들을 이루고, 새터 앞에서 숯골내 본류와 뒤섞인다.

 이렇게 물줄기가 제법 거세진 숯골내는 두루봉 협곡(峽谷)을 지나 정삼골을 멀리 두고 비선거리골에 이른다. 여기서 숯골내는 또 다른 지류(支流)인 하기지류와 만난다.

 

 하기지류는 멀리 퇴고개에서 시작해 윗터골과 아래터 앞 느더리들에 잠시 숨을 고른뒤 아래텃골 서수근들로 내려온다. 그 아래에는  갈마을들이 펼쳐져 있으니, 모두가 터 좋은 텃골이다. 텃골을 적신 물줄기는 아래숯골 마을을 감싸듯 휘어져 한섬지기들에 이른다.

  굽이굽이 돌아 한섬지기들을 적신 물줄기는 비선거리골에서 숯골내 본류와 만나 제법 하천다운 위용을 갖춘다. 이어 'S'자로 방아다리를 지나 구실들, 덕대들에서 또 한 번 휘어지고, 노무새와 가정자 마을을 거쳐 선창말에 이른다.

 

 마침내 숯골내는 7.4km의 긴 여정을 마치고 갑천과 만난다. 갑천은 드넓은 보래보들 앞에서 대전천, 유등천과 함께 삼천을 이루고, 다시 금강 본류와 서해로 흘러든다. 

 

 셋째, 금병산 정기를 받아 들어선 수운교 천단(天壇)이다.

 

 1929년 수운교 도솔천 낙성식

 

 

 수운교(水雲敎)는 조선 말기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1860년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으로 창도한 동학(東學)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종교로, 1923년 이상룡(李象龍 1858~1932)이 창시하였다. 처음에는 서울에 본부가 있다가 1929년 금병산 아래에 도솔천궁(兜率天宮)을 짓고 옮겨 왔다.

 

  도솔천 낙성식에 전국에서 찾은 신도와 관람객이 오천 명이나 운집 했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대전시 전체 인구가 25,452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중 있는 행사였으며, 그 이후에 불.천.심(佛.天.心) 뜻을 찾아 전국에서 숯골로 이주하였고, 특히 6.25사변, 1.4 후퇴 때에는 이북에 수많은 신도들이 숯골로 모여들어 만성동, 선인동, 자선동, 천복동 등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다. 그때 이주하던 신도들은 신앙심과 함께 직조기술 그리고 이북 문화나 음식, 특히 냉면 맛도 함께 가지고 정착했다.

 

  수운교 천단 조성할 때 500m가 넘게 심어놓은 소나무가 자라서 마을 놀이터로, 인근 학교 봄, 가을 소풍 장소로 손색이 없었고, 각종 단체 훈련 및 휴식 장소로 인기가 있었으며, 단순 종교 건물로 알았던 건축물은 근대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건축학자들에게 매우 좋은 자료로 알려져 있다.

 

  도솔천(兜率天 유형문화재 28호)은 1929년 지어진 건축물로 정문에 제일 큰 광덕문(廣德門)을 비롯한 4개 문이 있고, 그 문 사이로 4면에 낮은 담이 있다. 그 안에 도솔천은 57평 규모 건축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 옆 모양은 팔작(八作)지붕이다. 지붕을 받쳐 주는 공포방식은 다포방식(多包方式)으로 그 당시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崔元植)이 중건한 조선 후기 훌륭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붕에는 궁궐 건축물에만 사용하던 십이지 상을 배치해 도솔천 위엄을 강조하였다.

 

  봉령각(鳳靈閣 등록문화재 331호)은 1929년에 지었다가 1939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그 자리에 1947년 지어진 수운교 3단 중 하나로 좌우 툇간(退間)을 제외한 5칸 목조기와 건물이다.

 

 용호당(龍虎堂 등록문화재 322호)은 1926년에 지어졌다가 1940년 낙뢰로 소실되어 1948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건물로 납도리 장식을 취했다.

 

  법회당(法會堂 등록문화재 333호)은 1936년에 건립된 수운교 대법당 정면 10칸 팔작지붕의 근대 한옥이며, 좌측 2칸에 온돌방식으로, 3칸에 다다미로 조성되어 양. 한식이 절충된 건축물이다.

 

  수운교 본부건물(등록문화재 334호)은 1929년에 지어진 동향으로 'ㄱ'자 평면 겹처마 형식이며, 툇간을 제외한 정면 5칸, 중앙은 한옥으로 현관과 상. 중. 하인방이 뚜렷한 벽면을 가진 건축물이다.

 

  종각과 범종(鐘閣. 梵鐘 등록문화재 335호) 1930년에 건립한 종각은 육모정 자각 형태로 외 11포, 내 15포 겹처마 다포약식이며, 상륜부는 청동으로 탑처럼 만들어 그 위에 궁을기(弓乙旗)를 주조하였다.

  범종은 1935년 일본에서 처음 주조하였으나 1942년 일본이 공출로 약탈해 가고, 지금의 범종은 1952년 부산에서 주조한 종으로 무게 6,740kg, 지름 1.6m, 높이 2.3m이며 종구(鐘口) 아래에 명동(鳴洞)이 있다.

 

 이 외에도 1921년에 지어진 장실과 1948년에 지어진 보호 각이 있다.

 

  그리고 석종(石鐘 문화재자료 13호)을 비롯한 일월성신 족각. 금강탑. 무량수탑. 불보살, 선관, 성군, 사천천왕 조각. 동진보살 탱화. 천수천안관자제보살 탱화. 삼천대천 세계도. 미륵불. 조왕단. 그리고 경정으로는 불천묘법전수,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도대전, 훈법대전 등이 있다.

 

  단순히 놀이터로 알았던 어린 시절, 교주 탄신일 음력 4월 15일에는 전국 신도는 물론 탄동면내 잔치로 수운교 솔밭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수운교본부에서 하는 행사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했다. 그중에 부락(部落)대항 배구대회는 일 년 동안 갈고 닦은 청년들이 벌이는 이벤트 중에서 이벤트였다.

  자운대가 생기지 않고 원주민이 그대로 살았다면 지금쯤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넷째, 금병산이 주는 또 하나 변화는 직조산업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물레와 베틀을 이용하여 삼베·모시·비단·무명 등 전통적 천연섬유를 가공, 생산해 왔는데, 이는 주로 부녀자들에 의한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대 섬유산업이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함경도와 평안도 등 이북지역에  섬유산업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함흥지역에는 방적공장을, 1934년경부터 평안남도 덕천 지방에 명주공장을 세워 운영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나라 근대 섬유산업의 기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중 일부 사람들이 경북 풍기(豊基), 충남 유구(維鳩), 또 하나는 내 고향 금병산 아래 숯골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지역이 공교롭게 모두 정감록에 승지(勝地)로 알려진 지역이다. 8.15 해방과 6.25 동란으로 이주는 더 본격화되어 경북 풍기는 인견(人絹)을 부흥시켜 현재 대구 섬유산업의 꽃을 피웠고, 충남 유구는 인견에서 우리나라 쟈카드(iacquard) 섬유의 모체가 되었다.

 

1953년, 소창공장 내부 

 

 

  금병산 아래 숯골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군수용 장갑이나 양말을 생산하는 소규모 직조산업이 이루어 졌다.  8.15 광복과 6.25 동란으로 수운교를 찾는 신도와 더불어 활성화되어, 두 집 건너 한 집꼴로 수직기(手織機)를 갖추고 가내수공업형태로 소창(小瘡)을 짰으며, 발동기(發動機) 도입으로 소규모 공장이 생겨나면서 점점 숯골 소창 생산이 늘어나, 대전은 물론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에서까지 질 좋은 숯골 소창을 찾았다.

  그 시절 숯골은 잠들지 않는 직조마을이었다. 마을 어디를 가나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직조기(織造機) 움직이는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곧 숯골 사람들의 삶의 소리이자 희망의 소리였다.

 

 

  다섯째, 숯골 마을 문화와 풍습의 변화이다.

 

  어느 시대나 전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남긴다. 그러나 굳이 전쟁이 남긴 긍정적인 변화를 꼽는다면, 문화와 풍습의 변화일 것이다. 전쟁과 피난으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면서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지역 고유의 언어와 생활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 숯골에서도 처음에는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에 언어소통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언어 못지않게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음식문화였다.

  함경도 지방의 왕만두와 동치미는 숯골 사람들에게 새로운 음식문화를 선사하였다. 또한 평양냉면의 한 획을 긋는 숯골 냉면은 한국전쟁 과정, 특히 1·4 후퇴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장터에서 시작한 숯골 평양냉면은 처음에는 토착 주민보다 함께 월남한 이주민들의 입맛에 더 잘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중앙아시아 몽골 지방이 원산지로,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서북부 지방, 특히 평안도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또한 '이냉치냉(以冷治冷)'이라는 말처럼 추운 북녘 지방에서 냉면 문화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냉면은 크게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나뉘며, 맛과 조리 방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숯골 냉면은 평양냉면 계통의 원조격으로, 그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면의 본고장 평양에서 3대에 걸쳐 전수받은 비법을 숯골에 뿌리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평양냉면의 맛에 익숙하지 않았던 숯골에서 성공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로지 '정직'이라는 경영철학에 있었다. 정직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만들면 정직한 맛이 난다는 철학이 1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한 정직의 철학 덕분에 오늘날에도 많은 미식가들은 숯골 냉면에서 특별한 미식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숯골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인 만큼 마을도 많고, 민속과 전설 또한 풍부하다.

  그중 하나가 숯골 산신제이다. 매년 음력 1월 6일과 4월 6일, 그리고 10월 6일이면 금병산 자락에 돌로 쌓아 만든 제단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제단 뒤 소나무 사이에는 금줄을 두르고, 그 사이사이에 위목을 끼운 뒤 제단 아래에는 황토를 깔아 금병산 산신께 제를 올렸다.

  또 돌성 또는 돌장승이라 부르는 숯골 돌성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 입구 논 가운데 서 있는 갓 모양의 선돌 앞에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며 지냈다.

  그리고 숯골 용왕제가 있었다. 정월 3일과 4월 3일, 그리고 10월 3일이면 마을 앞 팽나무와 선돌 사이에 제단을 마련하여 제를 지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선돌과 팽나무가 고목이 되어 쓰러지자, 마을 안 우물가에서 지내던 옛 용왕제는 사라지고 수운교식 제의로 이어졌다.

  느러리마을에서도 산신제를 지냈다. 느러리마을 뒷산 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 마을에 부정이 없는 남녀 제관을 선정하여 제를 올렸다.

  또 느러리에는 돌성제가 있었는데, 마을 앞 높이 열 자 남짓 되는 갓 모양의 선돌 앞에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돌성제를 지냈다. 이곳에 선돌을 세운 것은 고냇골 뒤 칼날봉의 기운이 마을에 해를 끼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돌성제는 마을에서 선출한 유사와 축관이 주관하였다.

 

 

  민속만큼이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도 다양하다.

  그중 하나가 노루봉 전설이다. 옛날 노루봉에서 죽어가는 노루를 정성껏 보살펴 살려 준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그 노루가 은혜를 갚기 위해 명당자리를 알려 주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 느러리 팽나무 전설이 있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 서로 사랑하던 총각과 낭자가 있었는데,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 총각이 전쟁터에 나갔다. 얼마 후 총각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낭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총각은 살아 돌아왔고, 낭자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녀가 기다리다 숨진 언덕에서 뒤따라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이 잠든 자리에서 어린 나무가 자라 마을의 수호수가 되었다고 전한다.

  또 금병산 옥녀봉 중턱에 있는 용바위에는 이무기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용이 되어 승천하기를 기다리던 이무기 셋이 서로 다투다가 끝내 승천하지 못하고 바다로 내쳐져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백 년에 한 마리씩 용으로 승천하였으며, 지금도 바위 속에는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한다.

  유명한 수운교 석종 전설도 있다. 충남 보령에 살던 송석호와 수운교 최교주가 같은 날 똑같이 황소 꿈을 꾸었고, 그 인연으로 황소를 닮은 석종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마을 이름의 유래를 비롯하여 고적, 고개, 바위, 들, 골짜기 등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마을 이야기』에 자세히 정리해 두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더 적지 않는다.

 

 

  내 고향 숯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숯골에도 거세게 불어왔다.

  대부분 초가지붕이던 집들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알록달록한 색깔까지 입었다. 마을 골목길은 넓어졌고, 도랑에는 작은 다리도 놓였다.

  아주머니들은 부녀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정보를 나누었고, 절미(節米)를 위한 절미단지를 만들어 알뜰히 살림을 꾸려 나가는 한편 밭일도 거들었다. 청년들은 4-H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농법을 익히고 퇴비 증산에 힘썼으며, 야간 방범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즈음 우리는 마을에 꽃길을 만들고 그 길을 쓸었으며, 집집마다 꽃밭을 가꾸었다. 꽃을 심고 돌보는 일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몫이었다.

 1977년, 공동 풀베기 작업

 

 

   이 무렵 숯골에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시내버스의 운행이었다.

  1970년, 숯골과 유성을 오가던 시외버스가 중단되고 대전까지 직접 운행하는 31번 시내버스가 개통되었다. 이 버스는 숯골 수운교 앞에서 출발하여 유성을 경유한 뒤 대전 원동사거리를 돌아 대전역과 도청을 거쳐 다시 숯골로 돌아오는 노선이었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운행되었다.

  그 버스는 서로 다른 숯골 마을 사람들을 태웠지만, 마치 한 마을 사람들만 타는 마을버스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숯골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느러리마을 앞 동둑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되었고, 버스 안에서는 인사와 정담이 끊이지 않았다.

 

  1973년경에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전봇대가 세워지면서 비로소 전기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전기제품이 흔하지 않았지만, 낮처럼 밝은 전깃불은 그야말로 밤의 낙원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통신수단인 전화가 개통되면서 숯골도 비로소 현대적인 문화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81년부터 시작된 자운대 조성공사로 인해 3,500여 명의 숯골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에는 우리나라 군사교육의 요람인 자운대가 들어섰다. 그 안에는 육군정보통신학교, 합동군사학교, 국군간호사관학교, 국군군의학교, 육군교육사령부가 자리하고 있다. 옛 마을과 들, 도로와 하천은 물론 작은 동산 하나까지도 사라져, 이제는 어디에서도 옛 숯골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금병산과 수운교 천단만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옛 숯골 사람들을 말없이 반겨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4년, 자운대(숯골) 항공사진

 

 


  옛 장터와 알봉, 새울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자운대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숯골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또 다른 고향, 숯골을 만들어 가고 있다.

  옛 숯골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세(萬世)의 구곡(九曲)을 어찌 터럭 몇 줄의 글로 모두 밝힐 수 있겠는가.

  넓게 살피지 못하고, 많이 듣지 못하여 다양한 내용을 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비록 소고(小考)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글에 공감하는 고향 제위(諸位)님들이 계시다면 그 또한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외인(外人)들이 내 고향 숯골을 무미(無味)하다 말할 때, 이 글이 작은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혹여 사실과 다르거나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기꺼이 질정(叱正)해 주시기를 바란다.

 

2014. 10. 3 

느러리 고향인 류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