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동둑에서 바라본 금병산
명산, 계룡의 주봉 천왕봉(845m)에서 동북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장군봉(503m)에 이르고, 또다시 동쪽으로 갑하산(469m)에 이르러, 북쪽 우산봉을 거쳐 동북 방향으로 다다른 곳이 내 고향 금병산(368m)이다. 일찍이 금평산(錦平山)으로 부르던 이 산을, 조선 이태조(이성계)가 비단 병풍 같이 아름답다 하여 금병산(錦屛山)으로 고쳐 불렀다.
봄에는 언니, 누나 얼굴만큼 화사한 진달래꽃이 등성이마다 피어나는 산. 여름이면 높푸른 녹음이 아버지 닮아 부지런히 숲을 이루는 산. 가을이면 마음 넉넉한 할머니처럼 숯골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던 산.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는 엄마의 따스한 품처럼 북풍을 막아 주었던 산이 금병산이다.
근원이 없는 우주 만물은 없듯이 나 또한 나고 자란 고향은 있을 터,
‘내 고향 숯골’을 두서없이 이야기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숯골’ 또는 '탄동'(炭洞)이라는 지명이 수없이 많은 곳에서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예로부터 목탄(木炭)이라고 부르던 숯은, 난방과 취사 그리고 생활 전반에 고급 제로 널리 쓰였고, 그 숯을 가공하는 고을이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내 고향 숯골은 어디를 보고 하는 것일까?
1970년, 3개리(추목리. 신봉리.자운리) 항공사진
넓은 의미의 숯골은, 옛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忠淸南道 大德郡 炭洞面) 전체다. 왜냐하면, 숯골을 굳이 풀이 하자면 "숯을 굽던 골짜기", "숯을 만들던 고을"쯤 되고 한자어로 "炭洞"이 된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숯골은 금병산 아래 추목동 자연마을 숯골이 있었는데, 그 마을을 본동(本洞)네라고 불렀으니 숯골의 원 지역인 것이다.
또 하나 의미의 숯골은 금병산 정기가 이어지고 산그늘이 드리워지는 지역, 즉 옛 법정지명(法政地名) 추목리(秋木里), 신봉리(新峰里), 자운리(自雲里), 이고 자연마을명이 숯골(본동). 우마장. 만선동. 선인동. 자선동. 천복동. 가는골. 가래울. 원가는골. 새울. 장터. 중방이. 절골. 알봉. 느러리. 새뜸. 호박골인데, 듣기만 해도 친근한 마을이다. 옛 31번 숯골 버스를 타고 내려야 했던 지역은 면적이 9,264m2에 이르고, 대략 호남고속도로 윗마을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역이다.
내 고향이 왜 숯골이라는 자연마을 지명을 얻었을까?
주봉이 368m 금병산은 동서 방향으로 12봉이 있는데, 제1봉 옥련봉을 시작으로 일광봉, 공덕봉, 도덕봉, 옥당봉, 언화봉, 운수봉, 출세봉, 감찰봉, 현덕봉, 대덕봉 그리고 노루봉 전설이 있는 제12봉이 장덕봉이다. 남쪽에 숯 원자재로 최고의 갈참나무나 굴참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천혜(天惠)의 조건을 갖고 있다. 그 참나무로 만든 숯이 화력이 좋아서 한양사람들이 좋아하는 숯이었으므로 숯골에서 만든 숯을 지고 한양에 가서 산매(散賣)하여도 돈이 풍족하게 남았을 정도 품질 좋은 숯이었다.
이렇듯 한양에서까지 금병산 숯을 찾았으니, 입에서 입으로 숯골 자연 마을지명이 생겨난 듯하다.
외사평(外史評)에 의하면 계룡산 주봉에서 남쪽 신도안을 일국(日局)이라 칭하고. 금병산 아래를 오국(五局)중 월국(月局)이라 불렀다. 도참설(圖讖設)에는 '우리 것이 숨 쉬는 곳으로는 계룡산보다 금병산이 더욱 수려하다'. 하여 금병산 앞 분지를 만인 가활지지(萬人 可活之地)라 일컬었다. 또 1714년에 간행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地) 기록에는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계촌(溪村)으로 공주 갑천(公州 甲川) 즉, 갑천 주변의 대덕연구단지와 둔산지역을 꼽았다.
이렇듯, 주역(周易) 64괘(卦)를 풀어서 금병산 아래 수운교 천단이 들어섰고, 도참설 예언에 따라 군 시설 자운대가 세워졌으며, 또 택리지 지리서에 의해 금병산 십여 리 앞에 우리나라 연구단지 메카 대덕연구단지가 생기고, 갑천 너머 정부 3청사와 대전시 심장부가 자리한 듯하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금병산 정기(精氣)요, 이치(理致)이다.
그러면 숯골 지명은 언제부터 불렀을까?
대략 숯골 지역 행정적인 지명은 백제 때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고, 신라 때에는 비풍군 영현으로 적오현(赤鰲縣)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한 덕진현(德津縣)에 속하고,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炭洞面)이 생기면서 처음 '탄동'이라는 행정지명이 생겨났다. 조선시대 말기, 1895년 지방 관제 개정으로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대전군 탄동면으로 불렀다. 그 후 1935년 대전부가 신설됨에 따라 대덕군 탄동면에 속했고, 1983년 대전시 지역 확장에 따라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어서 탄동이라는 법정 지명이 600여 년 만에 사라졌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유성구에 속하고, 지금은 대전광역시 유성구로 신성동 행정관할에 있다.
다시 정리하면 숯골이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행정지명이 생기기 한 참 전쯤 고려 말기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 숯골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을까?
자운리 삼현들에 통일신라 시대 기왓조각이나 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2002년 자운대 골프장 공사 때 발견된 추목동 유적을 살펴보면, 원삼국 시대(原三國 時代) 움집터(住居址) 2기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고인돌(支石墓)과 돌널무덤(石棺墓)은, 자운동 유적과 같은 시기로 기원전(紀元前) 5~6세기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또 한 자운대 골프장 내 고인돌과 금병산 자락 너럭바위에 대전 근교에서 찾아보기 힘든 150여 개가 넘는 성혈(性穴) 자국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옛 숯골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그 사람들의 알 수 없는 간절한 소망과 염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문헌에 나타난 시기는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에 자은동(慈恩洞)에는 102가호(家戶)가 있었으며, 인구는 남자가 190명, 여자가 166명으로 모두 256명으로 볼 때, 이미 그 시대에 농촌으로 기반이 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성씨로는 조선시대 중기 추목리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35호로 씨족 집성(氏族 集成) 마을임을 알 수 있다,
1908년 이전에는 탄동 면사무소가 추목리 숯골에 있었고, 1927년 수운교가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신도가 금병산 아래에 터를 잡았으며, 1928년 신봉리에 시장 문을 열어 시골 장터로는 꽤 큰 규모의 시장으로 번성하였다. 1929년 수운교 본전, 도솔천 낙성식과 함께 신도들이 들여온 것이 직조기술인데, 옛 숯골 숯 못지않은 숯골 소창은 많은 사람을 숯골로 끌어들였다.
그 후 대전 외곽마을로 정치나 경제의 흐름 속에 순응하던 숯골에 국책사업 자운대(일명 620 사업) 시설로 인하여 모든 숯골 사람들은 고향을 등져야 했다. 자운대 개발 전, 1979년도 추목리 가호 수는 307호, 인구는 1,681명에 이르고, 신봉리 가호 수는 172호, 인구는 999명이었으며, 자운리 가호 수는 116호, 인구수는 630명에 이르니, 모두 595호에 3,310명에 이른다.
어느 국가나 지방 또는 마을은 그 지형, 기후에 따라 풍습이나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 고향 숯골도 모든 것이 금병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중 제일은 앞에서 이야기한 '숯골' 이름을 낳게 한 금병산이고, 둘째는 산줄기 못지않은 물줄기이다.
1970년, 탄동천(숯골내) 물줄기
공식 명칭이 탄동천(炭洞川)인 숯골내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금병산 중턱 옹달샘에서 발원하여 선인동과 만선동을 거쳐, 옛 금봉초등학교 뒷편에서 수운교천단 서쪽, 등골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난다. 그 물줄기는 다시 가는골 마을 서쪽으로 휘어져 내리치고 장터들과 삼현들을 적시고 바로 느러리 마을 앞 동둑에 만나서 동둑과 손을 맞잡은 듯 굽이굽이 흐른다. 또 다른 지류는, 절골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중방이 마을 앞을 지나 중방들을 적시고 내리더니 호박골 앞 동둑에서 숯골내와 만나서 흘러 고내골 마을 앞 넓은 번답들에서 물 한 모금 내어주고 유유히 돌 구른다.
금병산 동쪽 소반골에서 시작한 또 하나의 물줄기는 원가는골과 가는골 마을 사이를 스치며 내딛더니, 장재울과 새뜸 구룽 지대를 내달아 장재울 남동쪽 물과 황충미 앞에서 만나 수천이 들을 만들면서 숯골내 본류와 새터 앞에서 뒤섞인다. 물줄기가 제법 거세진 숯골내는 두루봉의 협곡(峽谷)을 지나 정삼골을 멀리 두고 다다른 곳이 비선거리 골이다. 여기서 숯골내는 또 다른 지류(支流)와 만나니, 하기지류이다.
하기지류는 멀리 퇴고개에서 시작해 윗터골, 아래터 앞 느더리들에 잠깐 숨죽이고 내리니 아래텃골 서수근들이고, 그 밑이 갈마을들, 모두가 터 좋은 텃골이다. 텃골을 적신 물줄기가 아래숯골 마을을 감싸듯 휘어지면서 다다른 곳이 한섬지기들이다.
굽이굽이 돌아 한섬지기들을 적신 물줄기는 비선거리골에서 숯골내 본류와 만나 제법 하천 위용을 자랑하며 'S'자로 방아다리를 거쳐 구실들, 덕대들에서 또 한 번 휘돌아 노무새, 가정자 마을을 지나 선창말에서 7.4km의 대장정 끝에 갑천과 만난다. 갑천은 드넓은 보래보들 앞에서 대전천과 유등천의 삼천이 만나 선회하면서 금강 본류와 서해로 이른다.
셋째, 금병산 정기를 받아 들어선 수운교 천단(天壇)이다.
1929년 수운교 도솔천 낙성식
수운교(水雲敎)는 조선 말기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1860년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가지고 창건한 민족 종교인 동학(東學)의 파생 종교로, 1923년 이상룡(李象龍 1858~1932)이 창시해 처음에는 서울에 본부가 있다가 1929년 금병산 아래에 도솔천궁(兜率天宮)을 짓고 옮겨 왔다.
도솔천 낙성식에 전국에서 찾은 신도와 관람객이 오천 명이나 운집 했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대전시 전체 인구가 25,452명을 짐작하면 상당히 비중 있는 행사였으며, 그 이후에 불.천.심(佛.天.心) 뜻을 찾아 전국에서 숯골로 이주하였고, 특히 6.25사변, 1.4 후퇴 때에는 이북에 수많은 신도들이 숯골로 모여들어 만성동, 선인동, 자선동, 천복동 등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다. 그때 이주하던 신도들은 신앙심과 함께 직조기술 그리고 이북 문화나 음식, 특히 냉면 맛도 함께 가지고 정착했다.
수운교 천단 조성할 때 500m가 넘게 심어놓은 소나무가 자라서 마을 놀이터로, 인근 학교 봄, 가을 소풍 장소로 손색이 없었고, 각종 단체 훈련 및 휴식 장소로 인기가 있었으며, 단순 종교 건물로 알았던 건축물은 근대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건축학자들에게 매우 좋은 자료로 알려져 있다.
도솔천(兜率天 유형문화재 28호)은 1929년 지어진 건축물로 정문에 제일 큰 광덕문(廣德門)을 비롯한 4개 문이 있고, 그 문 사이로 4면에 낮은 담이 있다. 그 안에 도솔천은 57평 규모 건축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 옆 모양은 팔작(八作)지붕이다. 지붕을 받쳐 주는 공포방식은 다포방식(多包方式)으로 그 당시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崔元植)이 중건한 조선 후기 훌륭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붕에는 궁궐 건축물에만 사용하던 십이지 상을 배치해 도솔천 위엄을 강조하였다.
봉령각(鳳靈閣 등록문화재 331호)은 1929년에 지었다가 1939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그 자리에 1947년 지어진 수운교 3단 중 하나로 좌우 툇간(退間)을 제외한 5칸 목조기와 건물이다.
용호당(龍虎堂 등록문화재 322호)은 1926년에 지어졌다가 1940년 낙뢰로 소실되어 1948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건물로 납도리 장식을 취했다.
법회당(法會堂 등록문화재 333호)은 1936년에 건립된 수운교 대법당 정면 10칸 팔작지붕의 근대 한옥이며, 좌측 2칸에 온돌방식으로, 3칸에 다다미로 조성되어 양. 한식이 절충된 건축물이다.
수운교 본부건물(등록문화재 334호)은 1929년에 지어진 동향으로 'ㄱ'자 평면 겹처마 형식이며, 툇간을 제외한 정면 5칸, 중앙은 한옥으로 현관과 상. 중. 하인방이 뚜렷한 벽면을 가진 건축물이다.
종각과 범종(鐘閣. 梵鐘 등록문화재 335호) 1930년에 건립한 종각은 육모정 자각 형태로 외 11포, 내 15포 겹처마 다포약식이며, 상륜부는 청동으로 탑처럼 만들어 그 위에 궁을기(弓乙旗)를 주조하였다.
범종은 1935년 일본에서 처음 주조하였으나 1942년 일본이 공출로 약탈해 가고, 지금의 범종은 1952년 부산에서 주조한 종으로 무게 6.75kg, 지름 1.6m, 높이 2.3m이며 종구(鐘口) 아래에 명동(鳴洞)이 있다.
이 외에도 1921년에 지어진 장실과 1948년에 지어진 보호 각이 있다.
그리고 석종(石鐘 문화재자료 13호)을 비롯한 일월성신 족각. 금강탑. 무량수탑. 불보살, 선관, 성군, 사천천왕 조각. 동진보살 탱화. 천수천안관자제보살 탱화. 삼천대천 세계도. 미륵불. 조왕단. 그리고 경정으로는 불천묘법전수,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도대전, 훈법대전 등이 있다.
단순히 놀이터로 알았던 어린 시절, 교주 탄신일 음력 4월 15일에는 전국 신도는 물론 탄동면내 잔치로 수운교 솔밭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수운교본부에서 하는 행사 외에도 다양한 행사를 했다. 그중에 부락(部落)대항 배구대회는 일 년 동안 갈고 닦은 청년들이 벌이는 이벤트 중에서 이벤트였다.
자운대가 생기지 않고 원주민이 살았다면 지금쯤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승화시켰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넷째, 금병산이 주는 또 하나 변화는 직조산업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물레와 베틀을 이용하여 삼베·모시·비단·무명 등 전통적 천연섬유를 가공, 생산해 왔는데, 이는 주로 부녀자들에 의한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대 섬유산업이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이북지역 함경도와 평안도에 섬유 산업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함경도 함흥지역에 방적공장을, 1934년경부터 평안남도 덕천 지방에 명주공장을 설립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섬유산업을 발전시켰었다.
그중 일부 사람들이 경북 풍기(豊基), 충남 유구(維鳩), 또 하나는 내 고향 금병산 아래 숯골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지역이 공교롭게 모두 정감록에 승지(勝地)로 알려진 지역이다. 8.15 해방과 6.25 동란으로 이주는 더 본격화되어 경북 풍기는 인견(人絹)을 부흥시켜 현재 대구 섬유산업의 꽃을 피웠고, 충남 유구는 인견에서 우리나라 쟈카드(iacquard) 섬유의 모체가 되었다.
1953년, 소창공장 내부
금병산 아래 숯골은 일제 강점기에 군수용 장갑이나 양말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직조산업이 이었다. 8.15 광복과 6.25 동란으로 수운교를 찾는 신도와 더불어 활성화되어, 두 집 건너 한 집씩 수직기(手織機)를 갖추고 가내수공업으로 소창(小瘡)을 짰고, 발동기(發動機) 도입으로 소규모 공장이 생겨나면서 점점 숯골 소창 생산이 늘어나, 대전은 물론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에서까지 질 좋은 숯골 소창을 찾았다.
그 당시는 숯골 어디를 가나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직조기(織造機) 움직이는 소리가 밤, 낯을 가리지 않고 들렸다.
다섯째, 숯골 마을의 문화나 풍습의 변화이었다.
어느 시대나 전쟁은 하나에서 백까지 씻을 수 없는 피해만 속출한다. 단 하나 이로운 것이 있다면 문화나 풍속의 변화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즉, 몇십여 년 아니, 몇백여 년 동안 그 지방의 뿌리 깊은 사투리가 일시에 섞이는 것이다. 고향 숯골에서도 이주민과 토착민의 언어 전달이 처음에는 안 되었을 듯싶다.
또 언어 못지않은 것이 음식문화의 변화이다.
함경도지방의 왕만두와 동치미는 신선함을 가져왔고, 평양냉면의 한 획을 긋는 숯골 냉면은 한국전쟁 한 과정으로 1.4 후퇴로부터 시작됐다. 60년 전 장터에서부터 시작한 숯골 평양냉면은, 흔히 접하지 못한 현 주민보다는 같이 월남한 이주민의 기호에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그 메밀 원산지가 중앙아시아 몽골 지방으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메밀이 자라기 좋은 서북부, 특히 평안도지방에 많이 심었고, 이냉치냉(以冷治冷)이라는 말처럼 우리나라 북쪽에서 냉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냉면의 큰 갈래인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 있는데, 약간의 맛과 조리 과정이 다르다. 숯골 냉면은 평양냉면 원조 격으로 그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면 본고장 평양에서 3대에 걸쳐 배운 노하우를 숯골냉면 창업주가 숯골에서 뿌리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평양냉면 맛에 익숙하지 않은 숯골에서 성공 신화는 오르지 정직이라는 경영 철학에 있었다. 정직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만들면 정직한 맛이 난다는 1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철학이다.
정직한 철학으로 인해서 지금도 미식가(美食家)들은 맛의 호사(豪奢)를 누린다.
숯골은 터가 오래된 만큼 마을도 많고 민속이나 전설도 많다.
그중에 추려보면, 숯골 산신제를 들 수 있다. 매년 음력 1월 6일과 4월 6일 그리고 10월 6일에 금병산 자락에 돌로 쌓아놓은 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제단 뒤에 소나무 사이에 금줄을 두르고 사이사이에 위목을 끼우고 아래에 황토를 깔아 금병산 산신께 지냈다.
또, 돌성, 돌장승이라고도 부르는 숯골 돌성제는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 입구 논 가운데 갓을 쓴 선돌에서 마을 평안을 위해 지냈다.
그리고 숯골 용왕제가 있는데, 정월 3일과 4월 3일 그리고 10월 3일에 마을 앞 팽나무와 선돌 사이에서 제단으로 하고 지냈다. 그 후 선돌과 팽나무가 고목이 되어 쓰러지자 마을 안 우물가에서 옛날에 지내던 용왕제는 없어지고 수운교식으로 신도들이 지냈다.
느러리 산신제는 느러리마을 뒷산의 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 마을에 부정이 없는 남, 여 제관을 선정하여 지냈다. 또 느러리에서는 돌성제가 있는데, 마을 앞에 높이가 10자 정도 되는 갓을 쓴 선돌에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돌성재를 지냈다. 이곳이 선돌이 세워진 것은 고냇골 뒤 칼날봉이 마을을 해친다 하여 세웠고, 돌성제는 마을에서 선출한 유사와 축관이 주관했다.
민속만큼이나 구전으로 전하는 전설도 다양하다.
그중 하나가 노루봉 전설이다. 옛날 노루봉에 죽을 지경인 노루를 보살펴 살려 주었는데, 그 노루가 명당자리를 잡아주어서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느러리 팽나무 전설은 한마을에서 태어난 낭자와 총각이 있었는데, 나라에 변란이 있어 총각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낭자도 따라 죽었다. 죽은 줄 알았던 총각이 살아 돌아와 낭자의 죽음을 알고, 낭자가 기다리다 죽은 언덕에서 따라 죽고 난 자리에 어린나무가 자라 마을 수호수가 되었다. 또 금병산 옥녀봉 중턱에 있는 용바위 전설은 용이 되기 위해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 셋이 싸우다가 승천을 못 하고 바다에 버려져 바다에서 종노릇하였다. 그 후에 백 년에 하나씩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였고, 지금도 그 안에는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한다. 또 유명한 수운교 석종은 충남 보령에 사는 송석호와 수운교 최교주와 똑같은 현몽으로 황소 꿈을 꾸어 황소와 비슷한 석종을 얻게 된 전설이다.
이 외 마을 이름의 유래나 고적, 고개, 바위, 들, 골짜기 등 수없이 많이 전해오는 이야기는 '우리 마을 이야기'에 자세히 정리했으니 더 적지 않는다.
내 고향 숯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숯골에도 불기 시작했다.
대부분 초가이던 지붕은 슬레이트로 덮이고 알록달록 이쁜 색까지 칠했고, 마을 골목길이 넓어지는가 하면 도랑에는 작은 다리도 놓였다. 아주머니들은 부녀회를 만들어 새로운 정보도 교환하며, 절미(節米)의 수단으로 절미단지를 만들어 알뜰살뜰 집안 살림이며 밭일도 했다. 또 한 청년들은 4.H 및 청년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농법과 퇴비 증진, 또는 야간 방범 활동까지 했다. 그즈음 우리는 마을 꽃길을 만들고, 그 길을 쓸었으며 집에는 꽃밭을 만들어 가꾸는 일은 어린이, 청소년의 몫이었다.
1977년, 공동 풀베기 작업
이때쯤 찾아온 것이 시내버스였다.
1970년, 숯골 유성간 시외버스가 중단되고, 대전까지 직접 가는 31번 시내버스는 숯골, 수운교에서 출발해서 유성을 경유하여 대전 원동 사거리를 돌아 대전역, 도청을 거쳐 숯골로 한 시간에 한 번씩 오갔다. 그 버스에는 서로 다른 숯골 마을 사람들인데 한 마을로 가는 마을버스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숯골로 가는 길은 오르지 느러리 마을 앞 동둑으로 통했기 때문에 한 마을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지인(知人)이 되었다. 그러니 버스 안에는 서로서로 인사와 정담 나누기 바빴다.
그리고 1973년경에 비로소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전봇대가 세워지고 전기 에너지의 혜택을 누렸다. 처음에 전기용품이 흔하지 않았지만, 낯처럼 밝은 전깃불이야 말로 밤의 낙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야 통신수단인 전화가 개통돼서 현대의 문화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막을 수 없듯이, 1981년부터 자운대 조성공사로 인하여 3,500여 명 숯골 사람들은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을 떠났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자리에 우리나라 군사교육의 요람인 자운대(紫雲臺)가 생겼으니, 육군정보통신학교. 합동군사학교. 국군간호사관학교. 국군군의학교. 육군교육사령부가 자리하여 옛 마을과 들, 도로, 하천은 물론 작은 동산까지 그 어디에도 옛 숯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다행인 것은 금병산과 수운교 천단이 그 자리에서 옛 숯골 사람을 반긴다.
2014년, 자운대(숯골) 항공사진
옛 장터, 알봉, 새울 마을이 있던 자리에 자운대를 이끄는 새로운 숯골 사람들이 생활하는 터전을 만들고 또 다른 고향, 숯골을 만들어가고 있다.
옛 숯골 사람들 애환(哀歡)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세(萬世) 구곡(九曲)을 어찌 터럭 몇 줄로 밝히겠는가?
넓게 살피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다양한 내용을 담지 못해 못내 아쉽다.
소고(小考)이나마 공감하는 고향 제위(諸位)님이 계시면 조금이나마 보람된 시간이었다 생각하고,
외인(外人)들이 내 고향 숯골을 무미(無味)하다 이를 때 이글로 대답으로 삼겠다.
혹여, 틀리거나 다른 내용이 있으면 질정(叱正)을 바라는 바이다.
2014. 10. 3
아름드리 류경철.
'故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가지붕 이엉 잇던 날 (0) | 2014.11.24 |
---|---|
느러리 팽나무 (0) | 2014.11.10 |
맹형옥선생님과 보고픈 친구들 (0) | 2014.02.21 |
대덕연구학원단지 이렇게 만들어 졌다 (0) | 2013.12.21 |
대덕연구학원도시(대덕연구개발특구) 국가기록공개 (0) | 2013.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