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맹형옥선생님과 보고픈 친구들

아름드리 블로그 2014. 2. 21. 14:35

 

  내가 중학교 진학할 때에는 입학시험 제도가 없어지기 시작한 때이다.

즉, 지원한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거쳐 합격한 학생이 그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아니고, 일명 뺑뺑이로 불리는 추첨으로 중학교에 배정받아 입학하는 제도가 시작된 시기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내의 배정 중학교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5, 6학년 때 여 타 한 초등학교로 전학 가는 것이 유행이라, 한 반의 20% 정도는 좋은 중학교에 배정받기 위해서 전학을 갔다. 왜냐하면, 전학하지 않은 초등학생들 배정 중학교는 학교법인 남성학원이 운영하는 중학교로 역사나 재정이 매우 열악해서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교정의 시설이 학업에 좋지 않다는 평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금성초등학교에서 30여 명, 탄동초등학교에서 30여 명이 1972년 3월 충남금성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그마한 산을 깎아 세운 학교는 작은 운동장에 한 동(棟)의 교사(校舍), 어정쩡한 부속건물, 무엇보다 한 학기면 한두 번 바뀌는 선생님, 이 모두가 사춘기에 접어드는 친구들에게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때쯤 오신 선생님이 담임 맹형옥(孟荊玉) 선생님이시다.

  훤칠한 키에 온화하게 생기신 용모,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명문 중학교에 진학 못 한 아쉬움과 정감이 가지 않은 교정(校庭), 또 아직 서먹서먹한 친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할머니요. 투정을 받아 주시는 엄마요. 사춘기의 고민을 들어주시는 언니요, 누님 같았다.

 

  집마다 가정방문을 다니시며 친구들의 환경을 살피시고 골진 친구에게는 다독여 주시고, 용기 있는 친구에게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머지않은 시간에 그렇게 중학교 학창 시절은 배움의 문(文)과 우정의 교(交)와 사랑의 애(愛)를 알고 청소년의 꿈을 키워갔다.

 

  1972년, 봄 소풍 기념사진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였던가. 긴 여름을 지나 벼 이삭이 익어갈 무렵(추정) 선생님께서 전근(轉勤)이라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에 여학생들은 겉으로 울었고, 남학생들은 속으로 울었다.

 

 선생님 가시는 길 누가 막으랴!

 

  그때 송별식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교실에서 우리 친구들이 순서에 의해서 한 명씩 교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기억에는 김영숙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을 그때 알았고, 창수는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를 어찌나 씩씩하게 불렀는지 한참 별명이 되었다. 그리고 소심한 나는 “해변의 여인”을 어떻게 불렀는지 모른다. 혼자 흥얼거리기를 좋아하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처음 부르는 노래였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요즘은 제일 무서운 시기가 중학교 2학년 사춘기라 하지만, 그때 우리는 특별히 기댈 곳 없이 사춘기도 잘 넘어 3년의 중학교 배움을 마치고, 1975년 2월 더 큰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그로부터 40여 년, 친구들이 변한 것만큼 모교도 많이 발전했다.

1985년 학교법인이 동덕여학단으로 바뀌고, 1994년 교명도 성덕중학교로 바뀌었다.  교정 또한 현대식으로 4층의 본관과 다목적 강당을 비롯한 49실(室)로 늘어났고, 교직원 46명이 15학급 400여 명의 후배를 열성으로 지도하여 명문 중학교로 발돋움하였으며, 올해 44회 졸업식에 총졸업생 수가 5,433명의 중견 중학교에 이른다.

 

  기억은 멀고 추억은 가깝다고 하였던가,

  40여 년이 지난 이 시간에 그 추억이 그리워 만나고자 한다.

 

 

 

 2014년 2월 21일

 아름드리 류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