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초가지붕 이엉 잇던 날

아름드리 블로그 2014. 11. 24. 10:47

  희미한 등잔 불빛에 궐련(卷煙) 타는 연기가 자욱하다.

  사랑방에서 아버지는 볏짚으로 새끼(산내끼)를 꼬신다.

  내일 지붕에 이엉을 씌우나 보다.

 

 

 

  추수를 마친 농한기, 추위가 오기 전 마을 아저씨들과 품앗이로 초가지붕에 이엉을 잇는 일이 연례행사였다.

 

  이른 봄, 나락을 물에 담가 약간 발아(發芽)시킨 다음, 못자리판에 볍씨(나락)를 뿌려 가꾼 아기 모가 점점 자라 한 뼘쯤 되면 모내기를 한다. 십여 분의 마을 아저씨들이 품앗이로 이 논, 저 논 분주하게 모내기가 끝나면, 다음날 뜬 모를 손질하고, 며칠 지나 어린 모가 흙내를 맞으면, 퇴비를 골고루 뿌리고 풀매기를 해준다.

  긴 장마와 뜨거운 여름을 잘 견딘 벼는 어느새 어른 가슴까지 자라있다.

  지금의 벼는 키가 작지만 그때의 벼 품종 일명 '아끼바리'는 이삭보다는 볏짚이 좋았다.

  늦은 태풍과 참새, 메뚜기의 유혹을 잘 넘겨,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면서 누렇게 변해갈 즈음 또다시 벼 베기 손을 빌리곤 했다.

"쓱싹쓱싹"

  다섯 줄씩 가지런히 벼 포기가 옆으로 쓰러진다.

  이렇게 논에서 하루 이틀 자연 건조된 벼는, 예닐곱 줌으로 묶어 볏단으로 바뀐다.

  이십여 단씩 지게에 메고 넓은 논둑으로 옮겨, 낮은 토담처럼 구불구불하면서 길게 줄가래(줄가리)를 쳐놓고 며칠을 더 자연건조 시킨다. 완전히 건조된 볏단을 소달구지에 차곡차곡 한 마차 싣고 분둑골 논에서 논두렁을 지나 느러리 마을 윗뜸을 거쳐, 새뜸 마을 입구에 들어서서 워낭소리가 들릴 때쯤 누렁이가 먼저 반겨주었다.

십여 차례 실려 온 볏단은 커다란 집채를 이루며 쌓였다. 또다시 좋은 날을 받아 탈곡기인 호롱기(회전기)를 밝아가며 타작을 하면, 볏단의 벼 이삭은 낱알로 바뀌면서 나락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여 토광에 저장한다.

  저장된 나락을 방앗간(정미소)에서 방아를 찌면, 흰 쌀과 함께 왕겨(윙게)와 등거(딩게)가 나오는데, 왕겨는 보온용 덮개나 부엌에서 취사나 난방의 재료로 쓰이고, 등거는 가축 먹이였다. 흰 쌀은 햅쌀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주식이었다.

  나락을 떨군 볏단은 볏짚으로 이름이 바뀌어 또 한 번 집채만큼 쌓아 볏가리(볏가래)라는 이름으로 저장하여, 가축의 먹이나 농산물의 보온 덮게 또는 취사나 난방 그리고 엄선하여, 초가지붕 덮개인 이엉이나 농가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등 농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재료였다.

 

  그중 하나, 초가지붕의 덮개인 이엉을 이야기한다.

 

  닷새 전부터 아버지는 마당에서 올 고른 볏짚을 추려 이엉을 엮으신다.

  마당 한쪽에서 엮기 시작한 이엉은 반대쪽 마당까지 길게 엮은 뒤, 두 아름씩 말아 묶어두신다.

  어느 사이 삼십여 개의 이엉 다발이 마당 가득하다.

  또 초가지붕에 중요한 것이 용마름(용구새)이었다.

  용마름은 만들기 까다로워 마을에서는 정노아버지(윤호섭)가 맡아서 엮으셨다.

  용마름을 작게 만들어 'V'자의 암 닭 산란 집으로도 쓰였고, 초가지붕의 용마름은 'ㅅ'자로 제일 윗부분의 소재로 쓰인다.

 

  초겨울 맑은 날,

  마을 아저씨 세 분이 아침 일찍 오셨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어느새 사다리를 타고 초가지붕에 오르신다.

  작년 이엉이 어두운 회색빛으로 지붕을 덮고 있었다. 그 회색 이엉을 조금 걷어내자 약간 밝은 속살이 드리워진다.

  속살이 드러낸 지붕에 이엉 다발이 올라간다.

  한 손에 이엉 다발을 메고, 한 손으로는 사다리를 잡아가며 올라가는 일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매우 위험했다. 마치 유성장터에서 보았던 서커스 묘기 같았다.

  한쪽에서는 이엉 잇기가 처마 쪽부터 시작한다. 빗물의 흐름대로 아래에서 시작한 이엉 잇는 작업은 지붕의 용마루 쪽으로 갈수록 빨라진다. 그때쯤,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1km 떨어진 동둑 점방(가게)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러 간다. 방앗간을 겸한 점방은 최소한의 생필품이 있고 한쪽에는 양조장 막걸리 단지가 묻어있다. 이북 말씨의 아주머니가 넉넉히 퍼주는 막걸리를 들고 뜀 걸음을 치며 집에 도착할 즈음 두어 잔은 흘리듯 했다.

  마지막으로 용마름이 올라갈 때는 지붕 위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커다란 용마름 다발 가운데에 굵은 바지랑대를 끼우고, 양쪽에 밧줄을 묶고 위에서 두 분이 당기고 아래에서 한 분이 용마름과 같이 올라간다.

  마치 커다란 달덩이가 지붕 위로 올라가는 듯하다.

  용마루 위에 올려진 용마름의 바지랑대를 두 분이 잡고, 반대쪽으로 풀고 나가는 광경은 용 한 마리가 용틀임하는 풍광이다. 용마름까지 잇고 나면 미리 준비한 산내기로 이엉을 앞, 뒤 양옆으로 '井'자로 고정한다. 일 년간 변화무상한 날씨에 잘 견디기 위함일 것이다.

  이엉 잇기 작업이 끝난 지붕에 싸리비로 이엉을 편편하게 피면서 부서진 볏짚을 쓸어내리고, 또 한편에서는 처마 끝에 이엉 볏짚이 삐쭉삐쭉한 볏 끝을 낫으로 잘라 말끔하게 해주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중방이 뒷산으로 기울어진다.

  11월의 해는 너무 짧아 어둑어둑해 져야 모든 초가지붕 이엉 잇기가 끝나고 농주(農酒)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이엉 초가지붕이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잘 모르지만, 학자들은 삼국시대 초기인 2000여 년 전부터 이용했다 하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으로 고향 마을의 초가지붕 이엉은 골진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오십여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엉을 잇던 아버지나 마을 아저씨들은 돌아가신 지 여러 해 되었고, 지붕 개량으로 변한 스레이트지붕의 마을은 국책사업인 자운대 군사시설로 4개 리가 없어진 지 사십여 년이 가까워진다.

 

  날씨가 추워지는 이맘 때가 되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2014년 11월 24일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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