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열두새우

아름드리 블로그 2014. 12. 9. 15:12

[본 글은 고향 선배이신 민원기님이 쓰신 글을 옮겨온 내용에 위성 사진만 첨부한다.]

 

       『열 두 새 우』

 

      - 고향마을의 옛 지명(이름)을 찾아서 -

 

1. 글을 시작하며

 

시골마을(충남 대덕군 탄동면 도룡리 370번지)에서태어나  당시 면사무소가

있던 신성리 소재 금성초등학교를 다녔던 내가 중학생이 되어 처음  대전시내

로 학교를 진학하면서, 먼 거리를 장마철에도 큰 냇물(갑천)을 건너서 다녀야

하는 어려움과 더불어 어린마음에 작지만 또 다른 하나의 불편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먼 통학거리를 오가면서 가금씩 마주치는 어른들이“학생 너 어디사니?”라는 질문에 그 시절의 어린 나는 “대덕군 탄동면 도룡리 살아요” 라고 대답하면 우리 마을의 소재를 잘 모르던 대전 지역의 어른들은‘도룡리?’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시고 나에게는 귀찮을 정도의 질문을 계속하곤 하였다.

나는 한참의 설명을 곁들인 대답을 하고 나서야 ‘아~ 새우 민씨네 동네서

 다니는구나’라는 말과 함께 길었던 질문공세가 끝이 나곤 했었다.

 

그 시절 대전시내로 학교를 다니면서 텔레비전 안테나를 빨래대로 알 만큼 작고 촌티 나던 나에게 이처럼 내가 어디 사는지를 묻는 시내 어른들의 질문은 유성에서 갑천을 따라 이어지는 ‘열두 새우’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 고향의 주변 지명을 끝없이 예기해야하는 고문 아닌 고문이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우리 국민 중에 우리나라 국책/민영 연구소 및 국립과학관과 KAIST 등 각종 과학시설이 자리하고, 1993년 대전 과학엑스포를 치러낸 우리나라 과학의 메카인 동시에 첨단 도시와 전원이 어우러진 최고의 삶의 터전인‘대전시 유성구 도룡동’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국책 연구기관이 들어오기 시작한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은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입지를 갖춘 천혜명당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 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전에 인접하여 갑천을 따라 이어지는 우리고향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는 대부분 마을이주 후 각종 연구기관 및 KAIST, 충남대학교 등 국내 유수의 교육시설이 자리한 우리 고향의 엣 지명과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2. ‘열두 새우’의 유래 및 구성

 

어느 지도에도 없는‘열두 새우’라는 지명 이름은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던 지금의 충남대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대전시 유성구 궁동’에서부터

엑스포과학공원이 자리한 '유성구 도룡동'에 이르는 등이 굽은 새우모양 지형에

길게 펼쳐진 열두개 촌락을 통틀어 부르는 통합적 지명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옛부터‘새우’라고 불리던 지명은 현재는 모든 마을이  대전시 유성

구로 편입되었지만, 대전시가 광역화되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덕군 유성읍’과‘대덕군 탄동면’에 소속된 열두개 촌락의 통칭으로 불리워졌던 우리고향의 독특한 이름인 것이다.

 

이처럼 여기에는 유성읍 궁동 - 유성구 어은동(궝말 -삼전이) - 유성구 구성동

(영거리-새터말) - 대덕군 탄동면 가정리(방아다리-덕대골-너머새우-가경자) - 대덕군 탄동면 도룡리(선창말 -도룡골 -경운)에 이르는 12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촌락들은 크고 작은 마을의 규모차이는 있었으나 ‘여흥 민씨’와 '    

천씨' 및 ‘울산 김씨’등 여러 성씨들의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개발로 인한 이주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에서도 도룡리와 (도룡골 - 경운) 가정리(가경자) 및 어은동(궝말)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거주하던 ‘여흥 민씨’는‘새우 민씨’라는 씨족으로 불릴 만큼 대전과 충청지역의 커다란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곳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유성읍내와 현재의 서구 갈마동까지 마을 마다약 3 - 5킬로미터 까지 걸어 나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대전 시내를 다녔으나,

내가 중3 무렵인 1971년 어느날 '대전역-도룡리'를 약 두시간 간격으로 하루에 여덟변 오가는 27번 시내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하여 '열두 새우' 주민들의 많은 애환과 추억을 실어 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글은 나의 부족한 식견과 주변에서 보고 들었던 기억만을 바탕으로

옛 추억을 더듬어 잊혀져가는 옛 지명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 함이니,

고증을 통한 역사성과 정확성이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도룡/가정)을 중심으로 어릴적 고향의 옛 모습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3. 열두새우의 시작 : 유성지역(궁동-어은동-구성동)

 

1) 궁동 - 어은동(궝말 - 삼전이) : 지금은 커다란 교육기관인 국립 충남

  대학교(궁동) 와 카이스트 및 국책 연구소(어은/구성동)가 자리하며

  명실 공히 대한민국의 교육 과 과학의 메카로 상진 되고 있는 이곳이

  '열두새우'의 시작이다.

 

잘 기억되진 않지만 충남대학교가 자리한 지금의 궁동은 유성읍내를 벗어나

유성천의 지류인 작은 개울을 따라 허름하고 길게 형성되었던 작은 마을로

작은 가게와 선술집, 이발소 등이 늘어서 추운겨울 유성버스 종점에서 내리     거나 유성온천을 다녀오는 시골 사람들 발길을 잡곤 하였던 것 같다. 

 

또한 현재는 카이스트와 한빛아파트, 항공/우주연구소 등이 자리하고 있는

어은동은 궝말 과 삼전이라는 동네로 구성된 지역으로 말그대로 고기어(魚)

숨을은(隱)의 뜻을 지닌 지명으로 동네 앞을 흐르는 개울에는 정말 고기가

많아서 멀리 살던 우리들도 그곳으로 고기를 잡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나지막한 산자락을 뒤로하고 앞으로 개울과 들판이 펼쳐진 ‘궝말’이라는 

 마을은 작지만 부촌이었으며 궝말 뒤쪽에 자리한 삼전이 마을은 포도밭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며, 특히 울산김씨 집성촌으로 자손들이 번창하여 수 

 명의 교수와 법조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2) 구성동(영거리 - 새터말) : 지금은 카이스트가 자리한 영거리와 대전지역

기상청과 환경청이 자리한 새터말은 현재의 구성동 지역으로 70년대초 부터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선진 영농기법으로 부유한 농촌마을이었으며, 새터말은

천씨들의 집성촌을 형성하며 3성 장군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영거리 마을에서부터 지금의 과학로를 따라 이어지는 유성천과 갑천의 제방

둑은 아랫마을(새터말.도룡.가정)에서 유성온천과 유성장터(5일장)를 오가는

이들과 유성읍에 소재한 학교(유성중 - 유성농고)를 다니던 학생들에게

많은 추억과 살을 에는 추위와 같은 애환을 안겨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궝말 앞에서부터 영거리와 새터말 사이를 가르며 갑천으로 흘러가는

개울은 상술한 바와 같이 고기도 많았지만‘호모롱이’라는 지역에 이르러

장마철엔 깊이와 물살이 너무 거세어 먼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수고와 함께

학생과 주민들의 애를 태우곤 하였다.

 

 

4. 열두 새우 의 중심 : 대덕지역(가정동 - 도룡동)

 

1) 가정동 지역(방아다리 - 덕대골 - 너머새우 - 가경자)

 

- 지금은 자원연구소와 한국조폐공사가 자리하고 있는 ‘방아다리’는 낮은

동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로‘아래숯골’이란 지명으로 불려 지기도

하였다.

 

- 또한 ‘덕대골’(*주1)은 덕대라는 옛날 직업군이나 전설적의미의 지형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유래는 모르겠으며, 매봉산 자락을 따라 길게 형성된

작은 마을로 버들가지가 많았던 개울과 가끔 우리의 등.하교 길에 발길을

잡았던 오색헝겊이 늘어진 서낭당이 있었다. 

 

-‘너머새우’는 가경자와 매봉산 줄기의 큰 너머새우 고개를 경계로 이루어진 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새우내’를 따라 펼쳐진 논과 밭을 터전으로 살 아 오던 작은 마을이었으며 지금은 조폐공사와 연결된 대전시 교육. 과학시 설 및 유성문화원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매봉산 뒤편의 ‘백산’이라는 마을은 몇 채의 외딴집으로 구성되어 매 봉산을 넘어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 우리들의 중간 휴식처이기도 하였다.

 

-‘가경자’는 매봉산 자락의 큰 마을로 ‘여흥 민씨’등의 집성촌으로 마을 어귀에는 큰 (버드)나무가 있었던 ‘동산뿌리’라는 특이한 지명의 언덕이 있어 지금‘대덕교회’의 전신인 ‘도정교회(이후 도룡교회)’자리하였으며

우리들의 학교 길에 중간 기착지 및 집결 장소였다. 

 

또한 가경자 앞의 들판에 자리한‘청부들’이란 마을은 몇 채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1960년대 ‘4H 운동’의 시발지로 과수 및 비닐하우스 등의 선진농업을 먼저 도입 전파하였다.

 

2) 도룡동 (선창말 - 도룡골 - 경운)

 

 

- 도룡동은 우리나라의 과학의 메카인‘93 대전과학엑스포’의 개최지로 현재는 각종 연구기관 및 과학시설과 지역 언론사 및 대전지역 최고의 주거시설(초고 층 아파트 및 고급 단독주택지 등)로 탈바꿈 하였으나,

새우마을의 가장 큰 마을로 조선 중기부터 거주해 오던‘여흥 민씨의 집성 촌인‘도룡골’과‘경운’을 비롯해‘밀양박씨’들이 많았던‘선창말’이란

마을로 구성되어 예로부터 관료 및 학자는 물론 법조 및 의료인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해왔다.

 

- 먼저 ‘선창말’은 예전에는 금강줄기를 따라 신탄진으로부터 나룻배가 반

드나들었던 지명의 유래대로 ‘갑천’과 인접하여 넓고 비옥한 농토를 기반

으로 비닐하우스 채소농사가 번성하였으며, 또한 갑천의 제방에는 도룡동의

넓은 들판(모래부들)에 물을 공급하던 ‘양수장’이 있어 냇가에서 목욕하던

어린아이들에게 신기한 볼거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무엇보다 ‘갑천’은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최대지류로 70년대 연구기관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깨끗한 물과 하얀 백사장 및 시원한 제방 둑은

어린이들은 물론 지역 및 인근지역 주민들의 수영장이자 철렵 장소로 많은

낭만과 추억을 간직했던 우리 마을 최고의 자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도룡동’ 이란 지명의 유래지인 ‘도룡골’은 道(길) 龍 (용)의 의미대로

용이 지나던 길이라는 의미로‘우성이산’ (*주2) 자락의 기슭에‘열두

새우’의 끝‘경운’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도룡골’과 ‘경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여흥 민씨 가문의 효자 정문과 충효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수백년을 이어온 집성촌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었으며 그후 최근에 대덕초등학교 앞 ‘범골(옛지명)’마을에 민씨 재실 및 각종 충효비를 이전 복원하여 시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 특히‘경운’(*주3)은 우성이산 기슭에 자리한 고려시대 사찰인 ‘경운 사’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우성이산’의 줄기가 뻗어‘모래부들’과 갑 천’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최적의 주거지형이며, 수백년간

여흥 민씨의 집성 촌락으로 조선중기 우암 송시열 선생의 은진(회덕)송씨 가문과 교류하며 충청지역 양가 최대의 집성촌으로 이어져 왔다.

 

또한, 수백 년간 ‘여흥 민씨’ 가문의 재실이 있어 왔던 ‘범골’마을은

지금의 대덕초교 및 연구단지 사거리가 소재하며 고급 주거지 및 가장 번 화한 도시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아주 깊은 산골로 ‘삼천리밖’이라는 지명을 지나 범이 나온다는 깊은 산중마을로 우리들의 사냥과 가재잡이의 재미있는 산골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5.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유성에서 도룡동(경운)에 이르는 새우모양의 12개 마을을 돌아보며

제한적이고 어설픈 지식으로 간단히 서술해 보았으나, 깊고 자세한 내용은 향후 전문지식을 가진 분들의 정확한 고증을 통한 학술적인 연구 및 저술을 기대하며 잊혀져가는 옛 고향의 지명에대한 부족한 서술을 마칠까 한다.(끝 )

 

               

             = 주 석 (注 釋) =

 

* 주1) 덕대골 : 이 지명은 사전적 의미는 특정 직업군(채광꾼 : 광부)이

   거주하던 지역이나 또는 전설적 의미의 ‘애기무덤’지역으로 유래되고

    있으나, 이곳 지명의 정확한 유래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 주2) 우성이산 : 최근 지도상‘우성이산’으로 표시되고 있으나 ‘경운’

   마을의 뒤에 자리한 이 산은‘여흥 민씨’등의 종중산으로 정상 부근의

  ‘의성 재’를 유래로 의 (義 :옳을 의) 성(城 :재 성) 산’이 정당하다.

    또한, 이산은 경운사 석탑이 자리 했던 ‘탑성골’및 ‘툇마루 끝’과 

   ‘돌모롱이’ '새밀고개’와 멀리는 ‘오박골’이란 지명으로 이어진다. 

 

* 주3) 경운(景雲) : 상기 설명과같이 이곳은 고려시대의 사찰‘경운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景(볕 경) 雲(구름 운)으로 먹구름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을    

   연상시키듯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빛을 의미하는 바,

   나는 오래 전(고등 학교 시절)부터 불민한 나를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의 또 다른 이름 (아호)으로 간직하고 있다.

 

 

 

'故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친의 생애(先親 生涯)  (0) 2015.03.21
이정승 묘(李政丞 墓)  (0) 2015.02.17
초가지붕 이엉 잇던 날  (0) 2014.11.24
느러리 팽나무  (0) 2014.11.10
내 고향 숯골  (0) 2014.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