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이야기

이정승 묘(李政丞 墓)

아름드리 블로그 2015. 2. 17. 14:47

 

이정승 묘(李政丞 墓)

 

 

 

이정승 묘 근경

봉분 뒷편에 금병산이 살짝 보인다.

사진자료(경주이씨 익재공후 판윤공파 카페)

 

  우리 마을 뒷동산에 왕릉만 한 묘가 있었다.

  묘가 얼마나 큰지 옆으로 100여 보가 되었고, 앞, 뒤로는 50여 보가 넘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나 인근 마을 사람들은 이정승 묘라고 불렀으며 자랑거리였다. 그 묘는 마을에서 가까운 야트막한 뒷동산에 있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친근했다.

  이른 봄, 할미꽃이 피어날 때 꽃을 좋아하는 소녀들에게 꽃을 안겨주었고,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부터 악동들에게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이요, 놀이터인 셈이었다. 낮은 산등성이 마루에 있어서 어른들에게는 지게를 지고 가다 쉬어가는 쉼터였고, 가까운 밭에서 추수한 농작물을 건조하는 잔디밭이었다.

 

 

  30여 년이 지나 오늘에서야 이야기를 정리한다.

 

  이정승 묘의 주인은 경주이씨(慶州李氏) 28世로 자(字)는 수옹(壽翁), 호(號)는 양와(養窩)이고 명(名)은 세구(世龜)이다. 1646년(인조 24년)에 태어나 일찍이 1672년(현종 1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예산현감과 장령, 첨정을 거쳐 홍주목사에 역임하였다. 경학(經學). 예설(禮說). 역사 등에 걸쳐 박통하였으며, 당대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많았다.

  1700년(숙종 26년)에 졸(卒)하니 55세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홍주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양와집(養窩集)이 전한다.

 

 

 

1973년 촬영한 항공사진(사진 윗쪽이 새뜸 마을이고, 오른쪽 아랫쪽이 이정승 묘이다)

사진으로는 평면으로 보이나 작은 동산마루이었다.

 

 

  이정승 묘는 명산으로 불리는 금병산 남쪽으로 산줄기가 낮아지면서 진산을 이루는데, 동쪽으로는 백운이고, 북쪽으로는 운, 남쪽으로는 자운(紫雲)의 삼운 사이에 있는 자은산(慈恩山)이 남쪽으로 1.5km 뻗은 야트막한 산등성이에서 느러리 마을을 지나 새뜸 마을 뒤 제일 높은 편편한 지대에 자리하여 앞뒤, 양옆이 확 튀인 지형으로 정 남향으로 멀리 대전시가 아련히 보인다.

 

  약 700여 평 규모의 묘역은 양옆으로 약 60m에 이르고, 앞뒤로는 약 40m쯤 된다. 묘역 북쪽에 높고 긴 사성(莎城)이 묘역을 감싸고 있고, 중앙에 지름 5~6m 정도에 높이 2m의 봉분이 정 남향으로 자리한다. 봉분 앞에는 4자(尺) 정도 크기의 표석(表石)이 공의 행적(行蹟)을 알리고, 그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낮게 깔려 상석(床石)과 연결하는데 그 상석이 어찌나 큰지 가로 5尺, 세로 3尺이고 높이가 2尺 쯤 되고 그 앞에 향로석(香爐石)이 자리한다.

  묘 제단 3~4보 앞으로 양쪽에 5尺 정도의 망주석(望柱石)이 있으며, 앞에서 보아 오른쪽에 기단의 높이가 2尺 위에 크기가 5尺의 비신석(碑身石)과 그 위에 가첨석(加檐石)이 올려 있으니, 비석의 높이가 10尺 정도는 될 듯싶다.

 

 

 

 

  묘가 언제 이곳에 설치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석물의 퇴식으로 보아서 공(公)이 졸(卒)할 당시인 1700년도는 아닐 듯싶다. 하지만 묘를 조성할 당시 믿기 어렵지만, 어른들의 구전에 의하면 질 좋은 잔디를 가지고 오기 위해서 10여km 떨어진 학하리에서 사람이 일렬로 서서 잔디를 손에서 손으로 옮겼다고 한다.

 

  들녘의 추수가 다 끝나고 억새풀의 하얀 솜털이 나부낄 때쯤에 공의 세향을 올린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운 좋게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는 시제의 구경과 맛있는 과일과 떡 등 제물 음식을 맛보는 호사도 누렸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3m 높이의 비석을 혼자서 올라가는 것이 큰 용기였고 자랑거리였다. 그 위에서는 묘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 12km 떨어진 대전 충무체육관 지붕이 아련히 보였다. 지금은 중간에 높은 건물과 매연으로 볼 수 없을 듯싶다.

  그리고 축구놀이가 한창 유행하던 어느 겨울방학 때, 우리 새뜸과 윗마을 윗뜸 친구들 간에 축구시합이 이정승 묘역에서 있었다. 새뜸에는 나를 비롯하여 무열이. 헌병이. 찬하. 정로. 헌주가 뛰었고, 윗뜸에서는 광열이. 상근이. 광욱이. 태성이. 광문이. 광고가 마을을 대표해서 돌로 쌓아 놓은 골문을 향해서 추운 줄 모르고 뛰고 또 뛰었다.

  중학교 시절에 조금 배우기 시작한 탁구를 하기 위해 상석 위 가운데에 나무 막대를 걸치고 마냥 탁구를 하며 사춘기를 보냈고, 피 끓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넓은 잔디 묘역에서 공부에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도 했다.

  먼 곳에서 보내던 대학 시절에 가끔 찾아와 떠듬떠듬 옥편을 찾아가며 비문을 읽어가기도 했었다.

 

 

 

1975년 이정승 묘역에서 찍은 사진(오른쪽부터 항노 형. 친구 무열이. 후배 찬하. 나)

왼쪽 상단에 성재산(적오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1981년 군사시설인 자운대 개발로 인근 마을 5개리와 함께 1984년에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 북록(北麓)으로 면례(緬禮)하였다.

 

  이제 육십을 목전에 둔 오늘, 태어난 집과 고샅길, 논밭이 있던 마을과 뛰고 놀았던 뒷동산과 이정승 묘가 없어진 지 벌써 30년이 넘었고, 같이 공 차기 하며 푸르른 꿈을 꾸었던 친구들은 본지 여러 해가 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우리나라 군사교육의 요람인 자운대(紫雲臺)가 생겨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2015. 2. 17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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