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아가는 현 시대에는 대단위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 조성이 단 몇 년만에 완성하여 이름 지어지고 단지를 형성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전통시대에는 한 마을이 생기려면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의 새월이 흘러야 비로소 마을이 형성되고, 그 마을에 걸맞는 이름이 지어지고 또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속이 이어져 민속으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이치로 우리 고향에도 몇 천 년 전, 선사시대부터 우리보다 앞선 고향인들이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고 그에 걸맞는 고향의 아름다운 마을 이름과 다양한 풍속이 만들어지고 민속을 남겼다.
그러기를 수십 세기,
지금은 국가의 기획 개발에 의해 10여 년 만에 1,181호의 집과 6,417명의 고향 사람들이 연차적으로 이주를 하여 고향의 흔적이 사라지고, 자운리 고내골 몇 호와 하기리 아래텃골 십여 호 만이 옛 고샅길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위안인 것은 금병산 아래 수운교 본부의 송림과 도솔천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들이 지방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고, 또 초등학교 모교인 금성초등학교가 제 자리에서 현대적인 교사(校舍)와 함께 후배들의 배움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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