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先親)의 성(姓)은 류(柳)이고, 관향(貫鄕)은 황해도 문화(黃海道 文化)요, 명(名)은 휘 지섭(志燮)이시니, 시조 대승공(始祖 大丞公) 휘 차달(車達)의 33世 孫이시다.
1929(己巳)년 8월 7일, 할아버지 휘 창열(昌烈)과 할머니 흥양이씨(興陽李氏) 사이에, 충청남도 대전군 유성면 봉명리 272번지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안동로 523에서 청빈(淸貧)한 양반가 6대 장손 무녀독남(無女獨男)으로 태어나셨다.
선계(先系)를 잠시 살펴보면 중문지후사공파조(中門祗候使公派祖)이신 휘 인수(仁修)는 22대조이시고, 필선공(弼善公) 휘 기문(起門)은 12대조이시며, 8대조 휘 시채(始采), 시명(始明)의 형제와 7대조 휘 행직(行直). 6대조 휘 제태(齊泰), 제형(齊衡), 제화(齊華) 3형제 그리고 6대조비 결성장씨(結城張氏)는 3세 6효 1열(三世 六孝 一烈)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심암 조두순(心庵 趙斗淳)과 호하 박회수(壺下 朴晦壽) 등 상신(相臣)들의 증시(贈詩)가 있었다. 5대조는 휘 규진(奎鎭)이시고, 고조는 휘 원학(源學)이시며 증조는 휘 기은(基殷) 이시고, 조부는 휘 인석(寅奭)이시다.
거주지(居住地)를 살피건대 12대조부터 6대조까지 연기군 봉암 마을에서 사셨으며, 5대조, 고조, 증조께서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과 인근 대전시 중구 안영동에서 세거(世居)하신 것으로 보이고, 조부께서 유성으로 이거(移居) 하셔서 아드님 두 분과 따님 한 분을 보시니 큰 아드님이 선친의 가친(家親) 이시다.
상처가 망처라고 하였던가?
할머니 즉, 선친의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부친 휘 진하(珍河)와 모친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1911(辛亥)년 장녀로 태어나셨다. 1928년 무렵 할아버지와 혼인하여 19세에 아버지를 낳으시고, 2년 뒤 1931(辛未)년 돌림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21세이고, 아버지는 3살이었다.
할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젖먹이 아버지를 떼어 놓고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 얼굴도 기억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다.
아! 어찌하랴,
그때부터 모질고 힘겨운 아버지의 인생살이가 시작되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혼인하여 3년도 채 안 돼서 할머니를 잃으시고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등 타향으로 방황하셨고, 아버지는 할머니의 젖도 채 떨어지지 않은 나이에 할머니를 여의고 유성 근교, 탄동면 자운리(느러리) 외가의 외할머니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손에 자라고 배웠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아버지 외가의 경제 사정도 넉넉지 않았고, 외할머니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하여 시골 장날마다 이장 저장 다니실 때 따라 다니셨으니, 아버지 또한 글을 배우거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천성이 부지런하신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남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셨고, 그 결과 성장하시면서 이집 저집 장리(長利) 쌀도 놓았다고 전하신다.
1950년, 6.25사변으로 아버지의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부름은 아버지도 피할 수 없었다.
1950년 8월 30일. 22살 때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였다.
육군본부 거주표의 아버지 군 생활 이력에 의하면,
1950. 8. 30. 훈련소 입소
1950. 9, 17. 3군병원 전속
1950. 10. 10. 일병 진급
1951. 2. 2. 제1보충대 전속
1951. 4. 1. 3사단 22연대 전속
1951. 5. 17. 현리(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전상, 원호대에서 59병원으로 전속
1951. 5. 19. 59병원에서 15병원으로 전속(입원)
1951. 6. 25. 하사로 진급
1951. 6. 26. 15병원에서 원호대로 전속
1951. 7. 15. 명예제대
이즈음 유성 집에서는 아버지가 전사하셨다는 전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절망하여 아버지께서 남겨 놓은 장리쌀 까지 모두 받아 쓰셨고, 아버지를 보살피셨던 아버지의 외할머니(驪興閔氏)는 탄식과 위로를 받으셨다고 하신다.
하지만 전사 전보를 받고 2개월 만에 장애의 몸으로 집에 오셨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에 불편한 몸은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인 1953년, 아버지는 인근 진잠면 대정리(두루바위)에 사시던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 신천강씨(信川康氏)인 어머니 이름은 금순(今順)이고, 1933(癸酉)년 6월 17일(음) 태어나시니, 외조부는 휘 영열(永說)이시고 외조모는 은진송씨(恩津宋氏) 기용(基用)이시다. 외가도 생활이 궁핍하여 입 하나 덜고자 아버지와 결혼했다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아무튼, 마음 둘 곳 없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아버지의 외갓집 사랑방에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로 신혼 방을 차리고, 혼자가 아닌 둘의 삶을 살기 시작하셨다. 아버지 평생에 가장 행복하셨을 것 같다. 그 행복으로 1954(甲午)년 무더운 6월 16일(음) 따님을 낳으시니 큰 누님, 경화(敬花)이다.
큰 누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돌날 돌떡을 집집에 가져다주었고, 초등학교 입학해서 학교 갈 때마다 마을 어귀를 지나 안 보일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것이 아버지의 큰 행복이었다고 하셨다.
큰 누님이 재롱을 한참 부릴 무렵, 1956(丙申)년 11월 5일(음) 둘째 누님을 낳으시니 경숙(敬淑)이다. 아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또 딸을 낳자 적이나 실망하시고 초삼일까지 얼굴을 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인정 많은 둘째 누님은 훗날 아버지 어머니께 봉양(奉養)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 누님을 낳고 2년이 지난 1959(己亥)년 2월 10일(음) 아들을 보시니 나(我)이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으셨을지 짐작이 간다.
선대부터 우리 집안은 자손이 귀하다.
나 또한 7대 장손으로 6세(世)가 단손(單孫)으로 이어져, 고조부 (휘 기은)께서는 양자(養子)로 오셨으며 증조부께서만 형제(휘 昌烈, 洪烈)를 두셨으니, 아버지의 한 가지 소원을 푼 셈이다.
6. 25사변의 여파로 1.4 후퇴 때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之地)로 일컫던 숯골(炭洞) 마을로 수운교(水雲敎)를 찾아 피난 오는 피난민들에 의해, 이북의 직조산업이 들어와 아버지께서도 집에 수직기(手織機)를 갖추었고, 알뜰하신 어머니는 밤낯으로 소창을 짜시고,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짠 소창과 함께 지고, 메고 30리쯤 떨어진 대전에 내다 팔면서 점차 가세가 피어갔다.
그즈음 마을에 있던 나의 생가(生家)인 작은 초가집도 사시고, 마을 뒤 분둑골에 있는 600평 남짓 논도 사셨다.
얼마나 좋으셨을까?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병약하시던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단산(斷産)과 동시에 끈질긴 병마와 싸워야 했고, 아버지는 군대에서 부상한 후유증인지 발을 더 많이 절었고 밤마다 앓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고 하신다. 또 타향살이하셨던 할아버지는 지병을 얻어 집으로 오셔서 5년여를 앓다가 1962(壬寅)년 10월 26일(음) 돌아가셨다.
그리고 가내 직조산업은 발동기의 보급으로 소규모 공장으로 바뀌면서 아버지는 소창 짜는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농사를 지으려니 농토가 넉넉하지 않아 남의 논에 농사를 짓는 선제와 남의 소 기르는 우께를 하셨다.
선제(先製)는 남의 논에 농사를 짓고 나서 가을에 추수하여 논 주인과 추수한 곡물을 반 씩 나누는 것이고, 우께는 일본말로 남의 송아지를 얻어다 사육하여 어미 소가 될 때 팔면 송아지 세 마리를 산다. 그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주인에게 주고 한 마리는 우리 소가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노력에 비해 이윤이 얼마나 박했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 때는 선제가 모자랐다. 하지만 논 주인들은 아버지에게 선제를 많이 주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은 불편하지만 부지런한 아버지가 짓는 선제는 다른 사람들 보다 가을에 추수한 곡물이 많았고, 우께로 키운 소는 다른 집 소 보다 값을 더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천성이 부지런한 큰 누님의 몫이 컸었다. 초등학교에 갔다 오면 집안 일과 동생들 돌봄이, 더 커서는 소 먹이인 소꼴을 베어오거나 소를 풀밭으로 끌고 다니는 소 풀 뜯기기와 밭농사 일을 도와야 했다.
집안 사정이 이러니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사치였다. 때마침 마을 가까이 정규 중학교는 아니지만 재건 중학교가 생기면서 총명한 큰 누님에게 배움의 길이 열려, 입학하고 새로운 배움의 즐거움을 체 알기도 전에 열악한 재건 중학교는 문을 닫고 큰 누님의 배움도 끝이 났다. 그길로 큰 누님은 배움이 아닌 가정과 가족을 위해 산업전선에 발을 디였다.
한 편 작은 누님도 큰 누님의 답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중학교에 진학을 못 한 작은 누님은 중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몰래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단다. 그 모습을 보는 아버지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7대 장손이자 2대 독자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큰 누님, 작은 누님으로부터 사랑을 한 몸으로 받았다. 마음이 옹졸하고 명석하지 못한 나는 가족의 사랑과 헌신으로 누님들이 하지 못한 공부까지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 두 누님에게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이다.
아무튼, 남의 송아지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한 소 외양간에는 우리 소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났고, 다른 사람에게 우께를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소를 키우는데 철칙이 있었다.
절대 어미 소를 안 키우셨다.
가을에 송아지를 사서 일 년 키우면 송아지 두 마리를 샀다.
논일 밭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하는 소가 필요했지만, 어미 소는 재산 증식이 늦어 항상 증식이 빠른 송아지를 키웠고, 그 송아지가 중간 소(中牛)가 되면 일하는 일소로 길들이는 것은 아버지와 내 차지였다. 3~4년이 지나면 아버지는 소를 다 팔아서 그 돈에 맞는 땅을 사시고 다시 한 마리의 소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우상(牛象)을 보시면 소의 성질이나 골격(骨格) 또는 식성을 아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인지 마을에서는 소를 살 때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우시장(牛市場)에 가셨다.
이렇듯 아버지는 소와 인연으로 재산도 증식되고 생활도 안정이 되어 갔다.
세월은 흘러 큰 누님은 1975년 12월 결혼하여 대전으로 떠나고, 작은 누님은 1979년 11월 결혼하여 인천으로 떠났다. 누님들이 떠난 그 빈자리가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매우 컸을 것 같다.
1981년부터 시작한 일명, 620 사업은 군사교육시설인 자운대(自雲臺)를 만들기 위한 국책사업으로 5개 리(里)가 아무런 이의신청도 못 하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국방부에 내어주고 떠나야 했다. 50여 년 동안 청춘을 다 바쳐 일군 터전을 토지 보상과 이주비를 받아, 1983년 옮긴 곳이 대전시 서구 탄방동이다. 집과 떠난 고향 근교에 농토를 장만하시고, 공사를 하지 않는 고향 농지와 새로 구매한 농지에 먼 거리를 오가시며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1985년) 나도 결혼을 했고, 속심이 깊으신 아버지는 내 아내를 꽤 예뻐하셨다.
1986년 아버지께 치명적인 위기를 맞으시니, 뇌졸중(腦卒中)이라는 질병이다.
그때 아버지 연세(年歲) 58세,
나는 아버지를 업고 동분서주했다. 문병 오시는 사람마다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기도하면 들어주는 줄 알고 많은 소원을 빌었다.
큰돈은 없지만 삼 남매 잘 키우셨고, 혼인도 다 했으니, 큰 누님은 김결수(金結洙)와 결혼하여 용민(勇旼), 은숙(恩淑) 두 남매를 낳았고, 지금은 강릉인(江陵人) 유광종(劉廣鐘)과 인천에서 살고 있으며, 작은 누님은 평산인(平山人) 신태화(申泰和)와 결혼하여 현철(賢哲), 보희(寶憙)를 낳아 인천에서 살고 있다. 나는 선산인(善山人) 김민희(金玟希)와 1985년 12월 결혼해서 제욱(帝旭), 태훈(太勳) 형제를 낳아 대전에서 살고 있으니, 이제 남들이 누리는 호사를 누리게 해 달라고...,
뇌졸중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아버지에게 또 다른 장애를 남겨 놓았다.
아버지의 장애를 가슴속으로 받아 숙명(宿命)이려니 할 즘에는 인천 두 누님댁에 줄곧 계셨다.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가 무슨 사치라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위암 판정과 수술은 우리 삼 남매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었고, 극기의 한계였다. 다행히 어머니의 위암 수술은 잘 돼서 인천, 대전을 오가시며 손자 손녀들 커 가는 모습도 보시며 여생(餘生)을 즐기셨다.
2001(辛巳)년 9월 9일(양), 7월 21일(음)
아!
원통하도다.
하늘이 무심하도다.
무더위가 한풀 꺾인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그 져 늦여름 바람만이 간간이 열어 놓은 창으로 들어왔다.
낯 3시를 갓 넘긴 시각에
질곡(桎梏)의 아버지의 삶이,
한을 풀지 못한 채....,
73 歲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가셨다.
6.25 참전용사로 국립묘지 임실호국원에 정성껏 모셨다.
어머니는 외로이 7년을 더 사시다
2008(戊子)년 12월 1일(음). 2009년 1월 15일(양)
대전 대성동에서 향년 76歲 로 돌아가시니, 임실호국원 아버지 곁에 모셨다.
아버지는 평소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평소 약주를 좋아하신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고, 아주 가끔은 흥얼거리시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어머님에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나는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그 노랫소리가 듣기 싫었다.
지금, 지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 노랫소리에는 할머니 즉, 얼굴 기억도 없이 상상으로만 남은 엄마에 대한 애한(哀恨)이 다 들어있었다고....,
내 어찌 선친의 생애를 다 안다 하겠는가?
그동안 아버지 생애에 마음을 주고받았던 지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선친의 외조모(外祖母), 여흥민씨(驪興閔氏)는 90수(壽) 하시면서 어머니를 일찍 여윈 아버지께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셨고, 또 선친의 숙부(叔父), 휘 홍열(洪烈) 작은할아버지는 오래 사시면서 음으로 양으로 아버지 맞춤이였다. 또 선친의 외숙부(外叔父) 휘 상배(相培), 휘 상순(相順) 할아버지는 아버지께서 태어나면서 인연이 되어 형제가 없던 아버지께는 한마을에서 형제보다 더 가까이 마음을 주고 받으셨다.
그리고 본관은 모르지만 추기만. 윤호섭. 윤창섭. 여운성. 최찬수 아저씨 등은 죽마고우 못지않은 우정을 나누며 50여 년을 사셨다.
예나 지금이나 처가와는 친숙하여 아버지 손위(遜位) 처남이 두 분 계셨으니 휘 동섭(東燮). 휘 용섭(龍燮) 외삼촌은 어머니로 하여금 많이 애끓으셨을 것 같다.
지금은 다 돌아가신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끝으로 나의 둘째 아들 수양 아버지인 윤태봉(尹太峰) 형님은 파평인(坡平人)으로 아버지께서 대전으로 이주하고 뇌졸중 장애 후 만나, 근래까지 교감(交感)이 많았고, 지금도 매년 현충일에 임실호국원에서 같이 참배하신다.
이제야 아버지 지인(知人)들께 이 글로 머리 숙여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다.
지금은 3남매 맏이인 큰 누님은 성실한 매형으로 하여금 조카들을 잘 돌보아 성공시키고 인천에서 유통업을 하신다. 조카 용민이는 경기도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은숙이는 교육공무원으로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작은 누님도 인천에서 부지런하고 인정 많은 작은 매형과 건강 식품업을 하시고, 조카 현철이는 한국담배인삼공사에 취업하여 타인의 인정을 받고 있으며, 보희는 큰 뜻이 있어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다.
못난 나는 장손부(長孫婦)답게 심성(心性)이 올곧은 아내와 봉사(奉祀)에 빈틈이 없이 조상의 유지(遺志)를 잘 받들며 대전에서 광고업을 수십 년째 하고 있다. 장남 제욱이는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와 뜻하는 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차남 태훈이는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 모두가 부모님이 주신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 군대 입대하여 전투 중 부상하시고 제대하신 지 64년이 되었다.
64년이 지난 오늘에 명예를 찾아 국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는다.
이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없고,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이에 미천한 글이나마 아버님께 바친다.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었습니다.
당신은,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당신은, 성실한 국민이었습니다.
2015(乙未)년 3월 19일
불초자(不肖子) 경철(敬澈) 올림.
2015년 5월 4일 육군 제32사단 연병장에서 유족을 대표하여 훈장을 비롯하여 훈장증과 기념 시계를 받았다.
영혼의 피리소리(음악가 - 김영동)
'故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53년 수원(병점)부근 사진 (0) | 2015.11.19 |
---|---|
금성8리 이야기를 마치며 (0) | 2015.10.30 |
이정승 묘(李政丞 墓) (0) | 2015.02.17 |
열두새우 (0) | 2014.12.09 |
초가지붕 이엉 잇던 날 (0) | 2014.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