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대통령의 원대한 꿈과 풍수쟁이의 선견 "
-고 박정희대통령이 미국 실리콘벨리에 버금가는 한국형 연구학원도시를 만들고자 물색 하던 그때의 이야기-
당시 국가자립을 실현하기 위한 과학의 요람을 물색하기 위하여 여러 곳을 탐문하고, 직접 방문하였지만 마음에 맞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헬기를 타고 이곳 도룡리를 지나게 된 것이 한 운명의 순간을 만든 것이 되었다. 어두운 밤 하늘을 날아가다가 간간히 비치는 불 빛 속에 문득 아득하고 괜찮다는 느낌이 드는 장소를 발견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도룡리는 갑천으로 막혀 대전을 가려면 멀리 만년교로 돌아서 가거나, 간이 다리로 건너가거나, 바지를 동동 걷어 올리고 신발을 양 손에 들고 건너야 했었다. 갑천의 남쪽 즉,대전은 대부분 논 농사를 짓는 농토이었고, 지금의 둔산동은 공군 비행장으로서 공군 훈련부대였다. 그러니 갑천 북쪽은 오지인, 미개발지로서 논, 밭 농사에 의지하여 사는 전통적인 촌락이었다. 도룡리의 동서, 북쪽은 모두 첩첩산중으로서 나무꾼이나 들어서는 곳이었다.
이같은 장소를 어둠 속에서 내려다 본 박대통령의 마음속에 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대통령은 장소를 점 찍어 두고, 다음 날 확인하여 보고하도록 시켰으며, 풍수쟁이를 대동하게 하였다. 정찰대는 갑천을 건너고, 산을 넘나드는 좁은 길만 있는 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풍수쟁이는 오목조목한 산들에 둘러싸인 도룡리가 풍부함을 주는 명당임을 즉시 알았고, 이곳이 주로 양반인 여흥민씨(麗興閔씨)들이 조선 중기부터 터를 잡고, 근처의 삼정동(대청댐 부근)까지 걸쳐서 살고 있는 집성촌 임을 쉽사리 알게되었다.
박대통령이 원하시는 과학단지에 두뇌들을 모아 일하는 장소로서는 큰 문(門)에 글(文)이 들어선 민(閔)씨들이 모여 사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여흥민씨로 말하면 4대 양반에 속하며, 조선시대에 4명의 왕비를 배출하였고, 여러 정승과 학자를 배출한 좋은 가문입니다. 여흥민씨는 조선 중기 때부터 이곳에 살았고, 그 이후로 훌륭한 분들이 계속배출된 명당입니다. 특히 구한말의 세도가들이 어찌 이같은 시골에 계속 자리를 잡고 살았겠습니까?"
사실 도룡리의 입지를 보면, 우성이산을 배산으로 정 남향에 마을이 있고 그 앞에는 보래보들이 넓게 펼쳐저 있으며, 그 앞으로 갑천이 흐르니, 옛 지형으로는 명당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1714년에 간행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地) 기록에 이르기를 " 계촌(溪村)으로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첫째가 공주 갑천(公州 甲川)이라" 하였나 보다.
"도룡골이라는 곳은 민씨들이 세를 누리고 살고 있으며, 대한민국 명당에 서 가장 낮은 산에 속하는 계룡산의 명당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 있으며, 대표적인 산이 바로 우성이산입니다."
그는 지도를 가리키며 계속 설명하였다.
< 1970년 도룡리 일부 사진 >
"우성이 산은 남북 방향으로 평평한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능선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장군 바위로서 이 산의 핵심입니다. 지금도 장군 바위에 올라 가 보면, 장군이 무릅을 대고 두 손을 집고 올라왔다는 무릅 자욱과 두 손 자욱이 바위에 선명하였습니다.(장군 바위 아래 쪽을 잘 살펴 보면 알 수 있슴). 이곳은 산림이 우거졌고, 산자락에는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여 옛 부터 호계골(지금은 깍여 나갔지만 전 롯데호텔 부근까지 산 기슭이었으며, 전 롯데 호텔의 90도 꺽인 곳을 지금 호계 삼거리라고 명칭을 붙였으며, 호텔 아래의 길 거리 이름도 호계 1리 등으로 거리 이름을 붙였음, 특히 대덕국민학교 옆에 여흥민씨의 자랑이라고 하는 민씨삼세칠효 정문을 모신 곳에는 호계라고 돌에 지명이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높이는 약 70cm 정도로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함)이라고 합니다.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개 모습을 한 곳이 바로 앞에 누어 있는 이 지형(현대 아파트와 KNFC 사옥 사이의 조그만 산)입니다(대덕 초등학교 옆의 우성이 산 자락에서 내려다 보면 개산을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슴). 이같은 명당은 찾기 힘들며, 개 모습을 한 지형은 현재 성황당이 있으며, 앞으로 개발하여도 이곳은 절대로 파손시켜서는 안됩니다. 이곳이 없어지면 먹이가 없는 호랑이 산은 명당의 수명을 잃게되니 절대 보호하여야 합니다. 도룡골 이름만 하여도 우수한 인재를 배출할 온갖 정기를 잉태한 곳입니다. 우성이산을 주축으로 사방으로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인재들이 번성할 것이며, 수 십년 뒤에도 저절로 인재들이 모여서 대한민국의 장래를 책임질 것입니다. 아마 이곳의 발견은 각하에게 하늘이 내리신 뜻으로 생각됩니다."
풍수쟁이는 입에 침을 닦으면 말을 이었다.
"우성이산 서쪽은 매봉산이라하며, 대표적인 연구소가 나오고, 이어지는 산세가 어은리로 계속되어 계룡산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은리, 신성골이라는 동네 이름도 모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차비를 갖추고 있는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이들에는 과학 기술발전과 한국 과학 기술의 총본산이 되는 인재를 배출하는 장소로서 발전할 형상입니다.
우성이 산의 남쪽은 갑천을 바라보고 멀리 공군부대와 연결되는 광활한 터로서, 둔산동 이라 하며, 동 이름이 의미하듯이 앞으로 행정 수도에 버금가는 중추 도시로 발전할 곳입니다. 도룡리 일대와 둔산동 일대는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줄곧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갑천 유역이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갑천 유역은 대전에서 가장 먼저 인간이 정착해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일대는 삼천동(三川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세 개의 하천이 흐르다 합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전천(大田川), 유등천(柳等川), 갑천(甲川)이 제각기 발원지를 출발해 한밭이란 넓은 들을 적셔주면서 구비구비 흘러 합쳐서 우성이 산을 멀리 감아 돌면서 동쪽 방향을 통하여 금강으로 흘러갑니다.
이곳은 연구소는 물론 주거지로서도 적합하며, 구비구비 흐르는 강세로 보아서 뱀같은 형상을 하며, 앞으로 뱀 모양의 기업(아마 실리콘 밸리의 주 성분인 Si를 의미 한 듯 하며, 벤처 기업을 포함하는 듯도 하다)이 성장 할 것입니다. 현재는 멀리 호남선 철도가 달리고 있지만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속의 철마(고속 전철을 의미하는 듯함)가 천을 따라서 달릴 지형입니다. 이같이 육로로 전국을 연결하고, 멀리 산에서 발원하는 냇가는 금강을 따라서 서해에 닿습니다. 즉, 뱀 모양의 지형과 이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지혜가 합쳐지면 점차 용으로 발전할 것이며, 서해쪽이 발달하여, 거대한 용이 중국을 바라보며 커가는 형상입니다. 이용의 정기를 받는 중국은 앞으로 거대한 국세를 이룰 것이며, 또한 용도 더욱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풍수쟁이의 말은 용안에 침을 튀게 하는 것도 모르고, 명당을 설명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박통도 흐믓하게 듣고 있었다.
"우성이산의 북쪽을 말하자면 멀리 보덕산이 자리잡고, 전 국가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담당할 힘이 솟아 나오고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현재의 원자력연구소, 핵연료 주식회사 부근), 국토를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가 달리니 사방팔달 발달할 여지가 상당한 지형입니다. 특히 우성이산 바로 아래의 계곡은 아늑한 숙소로 적절하므로 거주지로 정하면 많은 인재들이 배출 될 것입니다."
"계룡산 명당에 포함된 이곳은 토정비결에서 계시하였드시 언젠가는 정도령이 국가를 이끌어 갈 것이며,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밭이 결국 대한민국의 중추가 되도록 키워야 하며, 그런 인재가 빨리 배출되도록 터를 닦아 주는 것이 현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도리가 아닌가 삼가 아룁니다."
박통은 눈을 뜨고, 풍수쟁이가 수염을 한번 쓰다듬는 것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턱에 갔다 댔지만 매끄러운 턱을 만졌을 뿐이었다. 그만큼 풍수쟁이의 말에 빠져 들었던 것이었다.
풍수쟁이의 말에 박통은 입이 헤 벌어지는 것을 군주로서 체면상 간신히 참으며, 내심 자신이 이 같은 명당을 발견했다는 자부심으로 '역시 하늘은 성군을 돕는다'고 해석하고, '다음에는 씨바스리갈 네가 국산화 제 일 목표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중에 자신의 운명과 함께 할 씨바스리걸을 따르면서 자축하였도다.
여흥민씨와의 공존당시만 하여도 절대 군주에 절대 권력을 지고 있는 박통의지시대로 대덕과학단지 개발의 역사적인 삽질이 시작되었고, 뭐니뭐니 하여도급한 것이 도로였다. 토목 설계사들이 죽죽 일직선으로 줄을 그어 도로망을 표시하고 이어서 장비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갑천 대덕대로에서 전 롯데호텔을 거쳐 원자력 연구소까지 거의 직선으로 연결시키는 도로가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요지는 전 롯데호텔을 통해 직선상으로 조그마한 야산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데, 민씨들의 훌륭한 분의 산소가 있어서 민씨들의 반대에 부딪친 것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도룡동에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여흥민씨가 안주한 집성촌이다. 아무리 절대군주의 지시로 건설되는 것이지만 민씨의 뿌리가 이어오는 곳이므로 중심을 흔들면 당연히 반발이 있기 마련이었다.
현재도 여흥민씨 19세조인 삼계공 민환(閔桓)(1595 ~ ? ) 할아버지라고 하여 매년 음력 10월 15일이면 성대한 시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분으로 말하면 '민씨삼세칠효' 라고, 3대에 걸쳐 7명의 효자가 배출되었는 데, 그 중의 한분이시다. 대덕초등학교 입구에 효자 정문이 세워져 있다. 이런 중요한 명당에 민가의 중심적인 선조가 자리 잡은 것도 하늘의 뜻이요, 그 자리를 당연히 보존하여야 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하늘이 이에 대한 준비가 소홀할 리가 있겠는가.
박통의 절대 군주인 당시에 3부 요인으로 민복기 대법원장이 있었으니, 산소 이장을 반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대법원장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대법원장은 하늘의 계시인지를 짐작하고, 건설부장관에게 은근한 뜻을 전하였으니 꼼꼼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박통도 두려워 했던 분의 말씀을 감히 누가 거역하랴. 그리하여 산소를 피해 전 대덕호텔에서 90도 좌측으로 꺾여 도로가 건설되었다. 그 자리에는 국가 인재들이 이용하기 위한 건물을 짖기로 하여 과학자의 문화 시설이나 과학단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용토록 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운영해서는 소득이 없으므로 롯데 측에 운영권을 대여한 것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도 산소에서 멀리 전망이 보이도록 건물을 양쪽으로 나누어 산소에서 건물 사이로 전망을 트게 하였다. 만일 도로를 직통으로 내었다면 이곳의 정기도 쇠퇴하여 부국흥망의 국가는 고사하고, 오늘의 연구단지와 벤처기업의 요람으로 클 수 있었겠는가? 이 모두 하늘의 뜻이요 의지인지라 3부 요인인 대법원장에 민복기(1913~2007)씨를 앉히고, 국가에 봉직토록 하였으니 하늘의 뜻은 어찌 오묘하지 않으리요.
연구단지는 박통이 쓰러지고 나서 활기찼던 기세는 주춤하여지고, 한밭으로의 수도 이전 설도 사라지고 질적인 팽창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국가 및 민간 연구기관이 들어서고,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이곳을 떠 받치고, 또 다른 인재를 배출하였도다. 멀리 충남대학교에서 과기원, 충남전산 전문대학까지 인재를 배출하고 있으며, 계속 각종 연구기관이 자리 잡고, 이들의 연구성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엑스포 과학공원, 중앙 국립박물관이 건설되었다. 밴처 기업이 성장하고, 지금도 변화의 바람은 계속 이어져 주변의 주거지들도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 2023년 도룡동일부 사진 >
풍수쟁이의 예언대로 둔산동에는 행정수도의 일부가 입점하고 있으며, 신탄진과 열결되는 넓은 토지에는 대덕밸리가 건설되고 있으며, 이들은 국가의 중추를 담당할 것이다. 서해안은 용의 에너지가 되는 거대한 유화학단지가 건설되었으며, 거대하게 일어선 중국과의 직항로가 개발될 것이다. 서해안은 고속도로가 뚫리어 크게 개발되고 있다. 행정 수반의 의지가 좀 더 뚜렸하였으면 발전이 훨씬 빨랐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공해단지가 들어와서 도시가 발전되는 것은 미래에는 애물단지가 될 것이므로 , 현재와 같이 비교적 깨끗하게 과학단지로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성이산을 중심으로 한 과학단지는 과학없이 경제성장도 는 절대절명의 명제아래 박대통령과 우성이산에 대한 진실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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