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충청도가 왜 '양반의 고장'이라는 별칭을 얻었을까?
최근에 출판된 "엽기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충청도가 지금의 서울과 적당한 거리에 있으면서, 평야도 널찍하여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산세도 험하지 않아 서울의 똑똑한 양반들이 하나둘 내려와 살게 됨으로써 충청도는 '양반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여기서 '충청도 양반'이란 별칭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충청도로 내려와 사는 양반들은 완전히 낙향하기에는 서울에 미련이 남은 인물들인지라, 서울과 적절한 연결고리를 가지면서도 화(禍)는 당하지 않고 후일 기약하기 위해서는 충청도가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구한말 지식인 황현(黃玹, 1855~1910)이 "평양은 기생 피해가 크고, 충청도는 양반 피해가 크고, 전주는 아전(衙前) 피해가 크다"고 지적했듯이 충청도는 양반이 하도 많아서 양반의 피해를 운운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충청도 특유의 느릿느릿하면서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말투는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 그것도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살얼음판 같던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벼슬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잠재적 인력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뱉었다가는 어떻게 얽혀서 유배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느릿느릿 말하는 동안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하더라도 뜬구름 잡는 듯한 선문답으로 좀처럼 자기 생각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한 설화(舌禍)를 피해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반들의 언어 형태가 쌓이고 쌓여 충청도 특유의 느린 사투리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와 달리 충청도의 느린 사투리와 유유부단한 성격이 정치적 소인 보다는 지형적인 요인과 기후적인 요인에 더 가깝다고 본다. 대체로 충청도의 산세가 야트막한 둔덕 같아 "개떡을 엎어놓은 것 같다"라거나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다"고들 한다. 그만큼 산들을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충청도에는 기후, 기상으로 인 한 고통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덜 하다.
일찍이 정도전이 충청도 사람을 이성계에게 평하기를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 속의 밝은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이라 했듯이 구한말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느린 사투리와 환경이 주는 여유로움을 대물림 하였던 것 같다.
어릴 적 고향 집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기 속에는 고요한 충만감이 가슴에 담겨 있었던 것 같다.
-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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