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류시채 정려(柳始采 旌閭)

아름드리 블로그 2013. 4. 4. 15:04

 

 

 

 

  류시채(柳始采 1681 ~ 1751), 

  대승공 25世로 초휘는 시창(始昌)이며 자는 문보(文甫)이고 호는 봉암처사(鳳巖處士)이시다. 첨추공 휘 중배(僉樞公 重培) 할아버지와 청주경씨 할머니 사이의 장자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었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거처가 풍우(風雨)를 가릴 수 없었으나 감지(甘旨)의 봉양에 지성을 다하여 빠짐이 없었다. 부친께서 병환으로 대소변을 기리지 못하고 8년을 병석에 계셨는데, 아우(始明))로 더불어 서로 교대하여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손수 변기(便器)를 받아 씻되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았으며 막상 돌아가심에 슬퍼한 나머지 죽(粥)을 먹으면서 3년을 하루같이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공과 더불어 三世에 걸쳐 육효 일렬(六孝 一烈)이 계시니 공의 아우 25世, 시명(始明 1687 ~ 1749). 공의 조카 26世, 행직(行直 1725 ~1787). 공의 종손자(從孫子) 27世, 제태(齊泰 1748 ~1809), 제형(齊衡 1750 ~1814), 제화(齊華 1760 ~1789), 종손부(從孫婦) 결성장씨(結城張氏 1769 ~1822). 이에 예조판서 서준보(禮曹判書 徐俊輔)의 계주(啓奏)로 순조(純祖) 32년 壬辰(1832)에 정려(旌閭)의 명이 있었다.

 

  본 정려는 1832년에 연기군 남면 봉암리에 건립하였으며, 그 후 공의 4세손인 원식(源植)이 해미로 이거 하였고, 원식의 아드님 기종(基宗)이 현재 서산시 장동으로 입거하면서 산도에 세거하게 되자 공의 7세손인 형열(亨烈)과 창열(彰烈)등이 주도하여 1924년에 정려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게 되었다.

 

  현재 정려의 위치는 충청남도 서산시 장동, 둘금 마을로 서산 시내 해미 방향으로 약 7km 정도 가면 오산초등학교에 이르는데, 정려는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장동 소여촌 마을 도로를 따라 약 2백m 들어간 곳이 자리 잡고 있다.

 

  공의 후손이 서산과 대전에 세거하고 있다가,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이 번성하여 공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그중에 인천광역시의회 의장을 지낸 류수용(제륭) 씨가 공의 10세손이다.

 

 

2013년 4월

11世 從孫 成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