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문화류씨-연안차씨 동원설에 대하여

아름드리 블로그 2012. 9. 25. 14:34

< 풍산류씨 류덕님이 쓰신 류차 동원설에 관한 내용을 정리>

 

문화(文化) 류(柳)씨는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여 내려오는 가문으로 고려말-조선초에 걸쳐 명문거족으로 위상이 높았던 집안이다. 문화란 현재 황해도 신천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삼국시기에는 유주(儒州)라고 불렸으며 류차달은 여기서 호장을 지냈다가 고려시조 왕건의 개국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그의 6세손인 류공권이 중앙의 관료가 되면서 사실상의 시조가 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져 있는 '가정보'에는 그가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자손 중 류경이 무신정권 당시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수복에 앞장선 공로로 이후 문화 류씨는 조선시대까지도 창창대로를 걷게 되는데,,

 

그런데, 17세기 후반의 족보부터 문화 류씨와 연안 차씨(延安 車氏)가 그 근원이 같다는 주장이 실리기 시작했고 문화류씨도 그것에 동조하기에 이른다. 고대 중국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후손인 사신갑(似辛甲)이 고조선으로 동래하여 평양 일토산(一土山) 밑에 자리잡고 일(一)자와 토(土)자를 합쳐서 왕(王)으로 성을 삼고 왕조명(王祖明)으로 개명한 뒤 정착하였고,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일토초가위왕(一土草家爲王)이란 설이 있어 고조선 준왕이 불안감에 그를 잡아 죽이려 하자 지리산에 은거하여 성을 전(田)->신(申)->차(車) 세 번 변성하였고 이름을 차무일(車無一)로 개명하였다. 그가 차씨의 시조로 여겨지며, 그의 33세손인 차승색(車承穡)이 '신라 애장왕(哀莊王)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황해도 구월산에 숨어지내며 조모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류(柳)씨로 변성하였고 이름을 류색(柳穡)으로 개명한 뒤 그의 6세손인 차달(車達)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그의 장남인 효전(孝全)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다하여 차씨를 부여하여 연안차씨의 시조가 되고, 차남인 효금(孝金)은 류씨 성을 그대로 유지하여 문화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보셨듯이 굉장히 복잡하고 스케일(?)이 방대합니다.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에 조상이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죠. 가정보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지요. 이 주장에 따르자면 차씨는 물론이고 류씨들도 중국 황제의 후손이 되는 셈이니 이른바 소중화(小中華)사상에 쩔어 있던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입맛당기는 내용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입으로 전해지는 전승이었다면 믿기 어려웠겠지만,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후반에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이하 설원기]"라는 문헌이 등장하여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설원기는 '차원부'라는 사람이 중심 인물로서 고려말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하륜에게 모함을 당해 집안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으로 나옵니다. 설원이란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뜻인데, 그의 억울함을 조선의 여러 왕에게 청원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차원부의 시조 이야기가 나오면서 류차달이 나오게 되고(결국 대단한 집안이라는 거지요,,) 그의 조상들의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류동원설" or "류차동원설"에 입각하여 문화류씨 가문과 연안차씨 가문은 서로간의 통혼도 하지 않고 대승장학회(大丞奬學會)를 조성하는 등 친목이 자자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연안차씨 가문에서 '차씨가 진성이고 류씨는 가성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문화류씨에서는 분노했고 결국 여러 문헌 조사와 '설원기(16세기 후반 차식 3부자가 조작하였다고 문중에서는 밝힌 바 있습니다)'가 조작되었음을 밝혀내고 2008년 '류차동원설' or '차류동원설'을 폐기하기에 이릅니다. 연안차씨 가문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하고 있지요.

 

어쨋든 쉽지 않은 문제이고 양 가문의 위신과 정체성이 달려 있는 문제라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 성씨가 등장한 것은 신라말-고려초이고 (물론 대다수의 백성들은 성씨가 갑오경장 때까지도 없었죠) 족보, 즉 문중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고려말-조선초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한 좋은 집안이 있을 때 그 집안과 뭔가 연결을 해 보려는 심산이 모든 문중에 깔려 있지 않나 생각하고 또한 중국에 오래된 조상이 있다고 함으로써 그 집안의 위신을 드높이려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문중의 후손이 확실하다고 추정되는 사람들 몇 명 뽑아서 하플로 검사를 해보면 "동원설" 뿐만 아니라 집안의 이동 경로도 추측이 가능할 텐데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검사를 받으련지는 미지수입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 사상이 기저에 깔려있는데다 집안의 정체가 들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지 않나 합니다. 저도 현재 검사를 의뢰해 놓은 상태이지만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검사에 참여하여 족보논쟁, 집안논쟁에서 자유로와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