弼善公宗中 墓域 遷葬記 -
屯德의 숨결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주봉(主峰)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명산 오대산(1,563)에 이르러 남서쪽으로 또 하나의 산맥에 이르니 차령산맥(車嶺山脈)이다.
장엄하게 시작하는 차령산맥은 이어지다가 끊어지고 끊어질 듯 하다 이어져 광덕산(廣德山)에 이르니, 또다시 남동쪽으로 오십여 리 이르다 끝나는 곳이 둔덕산(屯德山)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둔덕산은 문화류씨(文化柳氏)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祗候使公派) 필선공(弼善公) 휘 기문(起門) 이후 그 후손들의 묘소가 350여 년 유지해 왔던 곳이다.
옛 필선공묘소 근경
옛 선조 묘역
동쪽으로 고려 때 높은 장수가 지휘했던 원수봉(元帥峰. 223m)과 서쪽으로 고려 말 삼정승이 국론을 협의했던 국사봉(國士峰. 214m)의 중간에 위치한 선산은, 정 남향으로 가까이에 금강 본류가 흐르고 멀리에는 계룡산 주봉이 아련히 보인다.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고정리 산 1번지로 서면 월하리 윗말에서 남면 고정리 범직이로 넘어가는 능선이며, 옛 지명은 호직동(虎直洞) 또는 시목성(柿木城) 즉, 감나무재로 인근 타성(他性) 사람들이 류장군묘(柳將軍墓)라 불렀으며 지금도 재 넘어 윗말 동네에 꾀 많은 감나무가 보인다.
현대의 지도에는 둔덕산의 지명이 1:25,000의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옛 연기지방 지도에는 산의 묘사와 함께 둔덕산(屯德山)의 지명이 꼭 표기된 것을 보면 옛날에는 꾀나 비중 있는 산이였던 것 같다.
광여도 연기현 부근
350여 년간, 50여 분의 선조를 품고 있는 선산에 국책사업인 행정복합도시 즉, 세종시(世宗市) 개발 지역으로 확정되어 필선공 후손 모두는 크나큰 충격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기를 몇 달 후 평택에 사시는 재관(在寬) 족숙(族叔)의 주선으로 평택, 대전을 오가며 종중회의를 여러 차례 거친 끝에 회장 및 추진단을 선출하여 면례(緬禮)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선영 이전계획에 들어갔다.
우선 임야 매입이 문제였다. 가까운 공주. 청원은 매입 시 등기(登記)가 단체명의 즉, 종중명의(宗中名義)가 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혀 먼 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이전 시기는 다가오고 천 년을 이어져야 할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 충청북도 보은 지역, 그중에서도 보은군 삼승면 둔덕리(報恩郡 三升面 屯德理)358-1을 찾아 흔쾌히 매입하고, 그 외 수많은 제반 사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세천비문(世阡碑文)은 월성 정동휘(月城 鄭東暉)님이, 지관(地官)은 신용식님이, 석물(石物)은 초정석재 박종구님이, 파묘(破墓)는 고정장묘 이부상님을 결정하여 추진하였다.
선조의 행적을 대략 살펴보면,
필선공(弼善公)은 대승공(大丞公) 21世로 중문사공(中門使公) 휘 인수(仁修)의 11世요,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중의(仲宜)의 8世이며, 증호조참판 휘 헌민(贈戶曹參判 獻民)의 차자(次子)로 휘는 기문(起門)이요 자(字)는 광전(光前)이고, 호(號)는 오촌(梧村) 또는 쌍청당(雙靑堂)으로 조선 명종(明宗) 19년 甲子(1564) 2월 26일 진천(鎭川) 벽오촌(碧梧村)에서 태어나시었다. 어려서 스스로 경사(經史)와 문예(文藝)를 탐구하시어 26세(1589)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급제하시고 38세(1601)에 식년시(式年試) 병과 6인(丙科 六人)에 급제하시었다.
그 후 관직으로 정자(正字), 박사(博士), 주부(主簿), 병조, 공조좌랑(兵曹, 工佐曹郞)에 거처 40세(1603)에 예조좌랑(禮曹佐郞). 동년에 결성현감(結城縣監)을 행하셨다, 43세(1606)에 사정(司正)을 거쳐 감찰(監察), 46세(1608)에 증산현령(甑山縣令), 동년 6월에 형조정랑(刑曹正郞),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47세(1609)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이듬해 48세(1610)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동년 4월에 전주판관(全州判官), 51세(1613)에 부안현감(扶安縣監). 58세(1620)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이듬해 59세(1621)에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동년 9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이듬해 1622년 3월에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전임하셨다.
당시 폐모(廢母)의 의논이 일어나자 의리(義理)를 들어 거부하다가 권신(權臣)들의 뜻을 거슬려, 마침내 부안현감(扶安縣監)에 나가셨다가 동년 11월 파직되어 고향 진천 벽오촌(鎭川 碧悟村)으로 돌아오셨다.
집 앞에 잣나무 두 그루를 심고, 쌍청당(雙靑堂)이라 당호를 걸고 여년을 즐기시다 향년 75세로 돌아가시니 己卯(1639)년 12월 22일이었다. 이듬해 고을 북쪽 부곡(釜谷), 연기군 서면 부동촌 동록 유좌(東麓 酉坐)에 모시었다.
그 후 1973년 군사지역(육군 보병 32사단 본부, 현재 육군 6038부대)에 편입되어 인근 남면 고정리 둔덕산(屯德山) 아래 시목성 건좌(枾木城 乾坐)에 이장(移葬)하셨다.
배위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직장 탁(直長 鐸)의 따님으로 乙丑(1565)년 6월 26일 태어 나시어 1남 2녀를 두시고, 壬戌(1622)년 3월 3일 돌아가시었다
진사 교지 문과 교지
유지, 시강원필선 통지서
시강원필선 교지
공의 아드님, 도사공(都事公)은 선교랑 휘 형국(宣敎郞 亨國)인데 자는 경오(慶吾), 호는 봉황정(鳳凰亭)으로 丙申(1596)년 4월 23일에 진천(鎭川)에서 태어나시었다. 부친(필선공)의 유명(遺命)으로 과거 공부를 하지 않으셨다. 병자호란(1636)에 동지 10인과 더불어 창의(倡義)를 하셨으나, 뜻을 이루시지 못하시고 집(연기 봉암)으로 돌아오시었다. 辛卯(1651)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만년에 옛 동진강(금강지류 미호천) 상류에 봉황정(鳳凰亭)을 짓고 친붕(親朋)과 더불어 시주(詩酒)로 즐기시다 향년 75세로 庚戊(1670)년 10월 3일에 돌아가시어 연기군 남면 둔덕산(屯德山) 아래 옛 호직동(虎直洞), 시목성 자좌(枾木城 子座)에 품자(品字)로 모시었다.
도사공, 수창록
배위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창랑 준(滄浪 濬)의 따님으로 庚子(1600)년 4월 9일 태어나셨다. 효우(孝友)의 행실은 물론 유순한 덕이 있어 시부모를 잘 섬기고 뜻을 순종하며, 시누이를 대함에 골육(骨肉)과 같이 하고 비복(婢僕)을 부리되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집안이 엄숙하고 정연하셨다.
한양에 있는 친정집에 가셨다가 때마침 병자호란(1636)을 만나자, 오라버니인 승지(承旨) 최유연(崔有淵)이 왕자와 비빈(妃嬪)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갈 때 함께 그 행렬에 따르셨다. 그러나 강화성이 함락되어 위급하게 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입고 있던 적삼에 혈서를 써서 이르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어 형세가 어쩔 수 없으니 이 옷으로 나를 장사하기 바란다" 하시고 강물에 몸을 던져 돌아가시니 丁丑(1637)년 1월 25일, 겨우 38세였다. 이 혈서가 씌워진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모시었다.
후배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당(戇)의 따님으로 丙辰(1616)년 12월 4일 태어 나시어 자녀를 두지 못하시고 乙酉(1705)년 1월 22일 돌아가시니, 향년 90세였다.
이렇듯 도사공께서는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시고, 종형(從兄) 집의공(執義公) 휘 창국(昌國)의 2자 휘 세장(世檣)을 맞아 계자(繼子)하였다.
공의 계자(繼子) 첨정공 휘 세장(僉正公 世檣)은 생부(生父) 휘 창국(昌國)의 둘째 아드님으로, 배위 순흥안씨(順興安氏)와의 사이에서 庚申(1620)년 9월 26일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시고 충효의 천성을 타고 나셨다.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께서 전란(戰亂)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기시고, 복수할 뜻으로 무술(武術)을 익혀 辛卯(1651)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셨다. 정익공 이완(貞翼公 李浣)의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셨다가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에 이르시다, 己亥(1659)년에 효종(孝宗)이 승하(昇遐)하신 후 벼슬을 그만두시고 자정(自靖)하시다, 甲寅(1674)년 7월 12일 돌아가시어 시목성(枾木城) 선고(先考) 묘 뒤에 계좌(癸坐)로 모시었다. 공으로 인하여 인근 타성 사람들이 류장군묘라고 부른 이유인 듯 싶다
첨정공 선전관 교지
배위 진천송씨(鎭川宋氏)는 지헌(之憲)의 따님으로 庚申(1620)년 1월 9일 태어 나시어 己卯(1639 추정)년 12월 15일 급사(急死)하시니 20세였다. 일설(一說)에는 "진천송씨의 친 시아버님(휘 昌國) 환갑 잔치에 가셨다가 음식을 잘 못 드셔서 급사하셨다"한다. 그러기에 진천 산직동(山直洞) 집의공(執義公) 후록 유좌(後麓 酉坐)에 모시었나 보다.
후배(後配)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도사 윤철(都事 允哲)의 따님으로 壬戌(1622)년 9월 6일 태어나시어 아드님 휘 후배(厚培), 중배(重培). 인배(仁培)와 따님 한 분을 낳으시고 己巳(1689)년 11월 15일 돌아가시어 건위(乾位)에 쌍분 하였다.
공의 큰 아드님, 통덕랑공(通德郞公) 휘 후배(厚培)는 戊子(1648)년 12월 28일 태어나시어 癸酉(1693)년 8월 6일 돌아가셨다. 배위 보성오씨(寶城吳氏)는 헌국(憲國)의 따님으로 丁亥(1647)년에 태어나시어 아드님 3분(휘 始曾, 始振, 始華)과 따님 4분을 낳으시고 丙寅(1686)년 4월 17일 돌아가시어 도사공(都事公) 묘소 아래에 자좌(子坐)에 합부하셨다.
둘째 아드님, 첨추공(僉樞公) 휘 중배(重培)는 호(號) 양호당(養浩堂)으로 壬辰(1652)년 10월 8일 진천에서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학문과 효제(孝悌)에 힘쓰니 단암 민진원(丹巖 閔鎭遠)이 조정에 천거(薦擧)하였다.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 되시고, 戊午(1738)년 9월 14일 향년 87세에 돌아가시었다. 연기 부동촌(燕岐 釜洞村) 필선공(弼善公) 묘소 후곡 임좌(後谷 壬坐)에 모시었다. 그 후 공의 묘소는 필선공(弼善公) 묘소 이전할 때(1973년), 공의 묘소도 진천의 청주경씨(淸州慶氏) 묘소에 합부한 것으로 보인다. 배위 청주경씨(淸州慶氏) 는 진사 용(進士 瑢)의 따님으로 壬辰(1652)년 12월 23일 태어나시어 아드님 2분(휘 始采, 始明)과 따님 3분을 나으시고 乙巳(1725)년 12월 23일 향년 73세에 돌아가시니, 진천 유점리 남성 곤좌(南城 坤坐)에 모시었다.
셋째 아드님, 통덕랑공(通德郞公) 휘 인배(仁培)는 乙未(1655)년 1월 16일 태어나시어 乙亥(1695)년에 돌아가셨다. 배위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세구(世龜)의 따님으로 乙未(1655)년 4월 9일 태어나시어 아드님 3분(휘 始大, 始茂, 始元)과 따님 2분을 낳으시고 戊戌(1718)년 7월 7일 돌아가시어 진천 유점촌 유좌(鍮店村 酉坐)에 합부하셨다.
이장(移葬) 내역을 대략 기록하면,
戊子(2008) 음력(陰歷) 2월 9일, 양력(陽歷) 3월 16일 좋은 날을 받아 연기(燕岐) 둔덕산(屯德山)의 숨결이 보은(報恩) 둔덕리(屯德理)의 숨결로 이어지는 날, 종인(宗人) 모두는 이른 새벽부터 연기와 진천으로 나뉘어 선조의 묘소를 찾아 숨결을 느꼈다.
개장전 필선공 산소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필선공 산소를 찾았다.
30여 평 남짓한 산소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봉분과 그 앞에 4자*3자 크기의 상석, 오른쪽에 5자 크기에 갓돌을 얹은 비석, 산소 앞 양쪽에 3자 크기의 문관석(文官石) 그리고 조금 옆으로 망주석(望柱石) 등. 조선 중기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묘소이다. 하지만 일찍이 웃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40여 년 전 서면 부동촌에서 이곳 시목성으로 면례할 때 크고 무거운 석물(石物)은 다 옮기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40여 년 전에 면례를 해서 그런지 개장은 간단했다. 봉분을 절개(切開)하자 바로 천판(天板)이 나왔다. 넓이 약 60cm, 길이 210cm, 두께 5cm 정도의 천판 2개 가 나란히 덮여 있었고, 그 밑에 유골은 거의 흔적이 없었지만, 흙 한 줌도 소중히 모셨다.
필선공 산소 개장 천판
필선공 산소 우측으로 10여 보(步) 옆으로는 언제 지어졌는지 모르지만, 세종시 개발 전까지 선산을 관리하던 집이 있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임씨 성을 가진 분이 사용하여 시향이 끝나면 집안에서 식사했던 기억이 있다. 그 집을 옆으로 50여 보 뒤쪽에는 시목성에 처음 모셔진 산소가 자리한다.
200여 평에 정 남향으로 조성된 산소는 22世 도사공이 앞쪽에, 23世 첨정공이 위쪽에 모셔져 조금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설도 있었지만, 가끔 보이는 위치라는 선친들께서 말씀하셨던 도사공의 산소부터 중장비로 조심스럽게 절개하기 시작했다.
도사공 品字 회곽묘
오랜 세월에 봉분이 깎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깊지 않은 위치에 회곽묘(灰槨墓)가 나타났다. 회곽묘는 비문에 있듯이 품자(品字)로 중앙에 도사공(都事公)의 회곽과 양쪽에 앞, 뒤의 차이를 두고 배위 해주최씨(海州崔氏)와 여흥민씨(驪興閔氏)의 회곽이 동시에 모신 것처럼 똑 같은 크기와 깊이로 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쓰기 시작한 회곽묘로 삼물(석회3 : 황토1 : 모래1)이 목관을 완전히 감싸서 하나의 커다란 바위 덩어리로 보였다.
회곽을 개장하기까지는 약간은 흥분도 되고 힘이 들었다. 회곽벽과 천회가 붙어서 하나의 회곽묘로 되어 있어서, 유골이 훼손되지 않게 하느라 개장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회곽을 깨기는 더더욱 어려워 회곽을 통째로 들어 올리자 식별하기 어려운 유골이 나왔고, 목관에 칠했던 옻이 검은 비닐처럼 보였으며, 칠성판이 썩은 것인지 모를 약간의 재도 보였다. 그리고 목관은 소나무로 되어있으며 천판, 사방판 장벽과 지판, 사방판 장벽의 결구는 나비장으로 만들었으며, 사방판의 장벽과 단벽은 띠열장으로 만들고, 보통 머리 쪽이 넓고 다리 쪽이 좁은 두광족협(頭廣足狹)이나 머리는 높고 다리는 낮은 두고족저(頭高足低) 형이 아니었다.
가끔 회곽묘에서 미라가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품자 회곽묘에는 형체를 알아볼 만한 유골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해주최씨의 혈의(血衣)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부장품(副葬品) 이나 지석(誌石)도 없었다. 하지만 한 줌의 흙까지 조심스럽게 수습하여 모셨다.
다시 정리하면, 17세기 중, 후반기에 모셔진 선조의 묘는 목관의 격이 약간씩 다를 뿐 비슷했다. 단, 22世 도사공 3위는 한 봉분에 品자로 각기 다른 회곽에 모셔졌으며, 위쪽으로 23世 첨추공 2위는 쌍분에 각각의 회곽으로 모셔졌다. 20여 보 아래쪽 도사공 묘 앞에 24世 통덕랑공 2위는 한 봉분에 한 회곽묘에 목관도 하나 에 모셔졌다.
도사공 유골 수습과정
목관 결구(나비장, 띠열자)내용
목관(소나무) 재질
도사공, 해주최씨, 여흥민씨 개장후 회곽
첨정공, 반남박씨 회곽 및 목관
통덕랑공, 보성오씨 회곽 및 유골
정성껏 수습한 유골을 보은 땅으로 모셨다.
금적산(652)의 정기가 북으로 10여 리 이어진, 충북 보은군 삼승면 둔덕리 산 26-1로 보은 톨게이트(TG)를 나오면서 오른쪽에 보이는 산 5부 능선에 위치해 정 동향으로 영봉(靈峰) 속리산의 구병산(876)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옛 부터 효행심이 많은 둔덕리(屯德里) 찬샘골이다.
조성중인 선산(후 방향)
조성중인 선산(전 방향)
명정(銘旌) 제작과정
토광(土壙) 작업과정
제일 위쪽 30여 평 넓이에 21世 필선공(弼善公)과 그 배위 남양홍씨(南陽洪氏)를 합장 으로 모시고 둘레석를 설치한 다음 봉분을 쌓았다. 둘레석 앞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놓고 오른쪽의 비석에는 “통훈대부 행시강원필선 문화류공기문지묘(通訓大夫 行侍講院弼善 文化柳公起門之墓) 배숙인 남양홍씨부유좌(配淑人 南陽洪氏祔酉坐)”라 묘비에 새겼다. 그 양쪽으로 문관석(文官石)과 왼쪽에 장명등(長明燈)을 새로 세우고, 연기 시목성에서 모셔온 문관석과 망주석를 양쪽에 세웠다.
그 아래쪽 좌측에 22世 도사공(都事公)과 배위 해주최씨(海州崔氏), 여흥민씨(驪興閔氏)를 삼 합부 품자(品字)로 모시고 비석을 세운 비문에는 “선교랑 수의빈부도사 문화류공형국지묘(宣敎郞 守儀賓府都事 文化柳公亨國之墓) 배의인 해주최씨 배의인 여흥민씨 품자합부(配宜人 海州崔氏, 配宜人 驪興閔氏 品字合祔)”라 묘비에 새겼다.
오른쪽으로 23世 첨정공(僉正公)과 배위 진천송씨(鎭川宋氏), 반남박씨(潘南朴氏)를 같은 좌향 삼 합부로 정성껏 모시고 그 앞에 비석에는 “어모장군 행훈련원첨정 문화류공세장지묘(禦侮將軍 行訓鍊院僉正 文化柳公世檣之墓) 배숙인 진천송씨, 배숙인 반남박씨 품자합부(配淑人 鎭川宋氏, 配淑人 潘南朴氏 品字合祔)”라 묘비에 새겨 넣었다. 묘 앞 오른쪽에 장명등을 세우고 양 쪽에는 무관석(武官石)을 같이 세웠다.
그리고 아래쪽 제일 좌측에 24世 통덕랑공(通德郞公)과 배위 보성오씨(寶城吳氏)를 합부로 모시고 상석(床石)에 “통덕랑 문화류공후배 배공인 보성오씨지묘(通德郞 文化柳公厚培 配恭人 寶城吳氏之墓)라 새겼다. 가운데에 첨추공(僉樞公)과 배위 청주경씨(淸州慶氏)를 모시고 상석에 “통정대부 문화류공중배 배숙부인 청주경씨지묘(通政大夫 文化柳公重培 配淑夫人 淸州慶氏之墓)”라 새겼고, 우측에 통덕랑공(通德郞公)과 배위 청주한씨(淸州韓氏)를 합부하여 모시고 상석에 “통덕랑 문화류공인배 배공인 청주한씨지묘(通德郞 文化柳公仁培 配恭人 淸州韓氏之墓)”라 새겨 넣고 묘소 양 끝에 망주석을 세웠다.
또 한 20여 보 아래쪽에는 25世 이하 선조를 모셨는데, 연기에서 모신 25世 敎官公 始明과 配淸州韓氏. 26世 行直과 配恩津宋氏, 配晉州姜氏. 27世 齊泰와 配潭陽田氏, 配驪興閔氏, 齊衡과 配昌寧成氏. 齊恒 28世 興鎭과 配慶州李氏. 配豊川任氏. 斗鎭과 配固城李氏, 配晉州姜氏. 29世 源孝와 配慶州李氏. 源悌와 配結城張氏. 30世 基膺과 配星州玄氏. 基禹와 配慶州金氏. 31世 寅鎬와 配南陽洪氏. 寅象과 配密陽朴氏. 32世 舜杰과 配交河盧氏, 配珍原朴氏. 洛烈과 配豊川任氏 진천에서 모신 25世 始大와 配光山金氏. 26世 必直과 配淸州韓氏. 27世 齊元과 配淸州楊氏. 28世 溟鎭과 配順川朴氏. 29世 興玖와 配蔚山李氏. 30世 基洙와 配蔚珍林氏. 31世 寅鳳과 配潭陽田氏. 寅龜와 配全州李氏. 32世 河烈과 配淸州李氏. 大烈과 配全州李氏. 錦烈과 配羅州吳氏. 正烈 33世 在榮 공주에서 모신 33世 志洪 도합 60여 위를 소 종중별로 모셨다.
그리고 연기에서 대전 가족묘원으로 27世 齊華 연기에서 서울 가족묘로 32世 丙烈과 配金海金氏를 모셨다.
세천비
세천비(世阡碑)를 선산 입구에 세우고 각 비석과 상석 등 석물을 격에 맞게 세웠다.
연기(燕岐) 둔덕산의 선산처럼 매년 양력 9월 첫째주 일요일에 자손들이 모여서 벌초를 하고, 음력 10월 7일에는 시향을 올린다. 현재 필선공의 후손 중 남자가 대략 4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종중행사에 수시로 참여하는 후손은 20여 분 남짓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옛 선영(연기)
370여 년 동안 선조님을 품어 안았던 연기의 둔덕산은 세종시(행정복합도시)의 장묘단지로, 은하수공원의 산책로를 조성하여 옛 애한(哀恨)을 모른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200여 년 된 노송은 지금도 푸르름을 과시하며 옛 문화류씨 필선공 종중의 선산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의 옛 선영(연기)
옛 선영 앞 소나무
2012년 3월 20일
필선공 14세 손,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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