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계(甲契)"
현시대에 사는 우리는 각종 모임(契)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전국의 지방 자치단체명의 끝 글자가 ~주(州)인 자치단체장의 모임이 결성되었다는 짤막한 뉴스를 보았다. 하지만 요즘 세대만 모임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옛 우리 선조들도 각종 모임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갑계(甲契)이다.
흑백으로 복사된 갑계록(甲契錄)을 꽤 오래 전 보았다. 계원(契員) 명단에는 13대 조(휘 起門 1564~1639 21世)의 함자가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본 갑계를 연구한 논문이 있어 흐릿한 본 갑계록을 복사하여 이야기한다.
본 갑계록은 언제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른다.
표지에는 "갑계록 갑오년 9월 9일 중양절에 성암이 쓴 것을 뽑아서 기록한 것"이라 쓰여 있다.
다른 갑계록, 또는 갑계첩(帖)에는 13대 조(휘 起門)의 호(號)가 보이지 않고 출생일이 없거나 틀린 곳도 있다. 본 갑계록에는 오촌(梧村)이 라는 호가 적혀져 있고, 출생일 또한 정확히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 중 한 분이 갑오년에 등사(謄寫)한 것으로 추측된다.
논문(2008)의 제목은 "월사 이정구의 갑계 조직과 갑계첩"이고, 지은이는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이신 신영주이다. 본 논문 초록에는 '월사 이정구(1564~1635)가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던 동갑계에 관한 연구'라 적고 있다. 그리고 계회 활동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까지의 한 세기 동안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계회를 통한 문예 소통 공간의 창출로 시사나 기로회 등 여타의 문예 활동과 교차하여 문예의 편 폭을 넓히는 토대로서 역할 을 했다'고 기술한다.
갑계를 처음 맺은 초결계(初結契)는 1575(乙亥)년 9월이고, 당시 12세이던 12명의 갑자생(甲子 1564) 들이 백곡(柏谷)의 송정(松亭)에 모여 동갑계를 맺었고, 그 계원이 서로 거지(居地), 생세(生歲), 기미(氣味), 학사(學舍)가 같고, 또 사람의 수와 나이의 수가 일치하는 다섯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고 하여 오동계(五同契)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그러면 처음 맺은 초결계원(初結契員) 즉, 오동계원은 누구일까? 여기서 신영주님은 많은 고민을 한다. 왜냐하면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모든 기록물 들은 후세에 후손들이 필요에 따라서 필사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본 복사본에도 초결계원 12명의 호(號)가 적혀 있지만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재결계(再結契)는 1581(申巳)년에 구성 인원이 18명으로 늘어난다. 이 해에 계원들의 나이가 18세가 되었으므로 6명을 보태어 그 수를 맞추었단다. 이때 화악 중흥사(華岳 重興寺)에서 모여 계회를 가졌으며 18명이라는 이유로 영주선(瀛洲仙)이란 별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흥사는 삼각산의 문수봉 북쪽, 노적봉 남쪽에 있던 절이다. 그 절 아래쪽으로 중흥동 골짜기가 이어져 있었는데 천석(泉石)이 깊고 그윽했으며 인적이 드물고 번잡하지 않아 도성 사람들이 찾아가 유람하는 장소로 18명의 계원은 18세가 되던 해 봄에 이곳을 찾아 수계(修契)의 장소로 삼았고, 영주선(瀛洲仙)은 당태종 시대 영관(瀛館)에서 18명의 인재와 정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을 취해서 계원 18명이 문인으로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란다.
삼결계(三結契)는 다시 1599(己亥)에 상계 15명과 하계 3명이 증원되어 구성 인원이 36명으로 늘어났다. 이 해에는 계원들의 나이가 36세가 되었으므로 18명을 보태어 다시 그 수를 맞춘 것이다. 이때는 삼청동에서 계회를 가졌고. 이 해에 상계 33명 가운데 15명이 이미 문과에 급제한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문과에 13명이 더 합격했고, 나머지 모두 음직으로 출사했기에 그만큼 이 갑계가 당시로써는 사회적으로 매우 비중 있는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단다. 참고로 선조(휘 起門)께서는 이 해에 가입 하시고 두 해 뒤(1601) 문과에 급제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6인의 계원 명단에 선조(휘 起門)의 호(號)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음에 연구할 내용 이지만 선조의 호는 오촌(梧村), 쌍청당(雙靑堂)이다. 쌍청당은 만년에 지으신 것이고 오촌은 고향(진천 벽오촌)의 이름으로 지으신 것이기에 이때 까지 호가 없으셨던 것 같다.
모든 모임(契), 그 모임의 목적과 회칙(契則)이 있기 마련이다.
계회는 본래 경조사에 관련이 깊고 그 대부분의 계회는 친목 도모와 함께 원천적으로 계원 간의 위급한 일을 서로 돕는 일이 모임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동갑계도 예외는 아니기에 계회가 있던 1600(庚子)년의 어느 날에 계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계헌6조(契憲六條)"를 확정했단다.
그 내용인 즉,
[첫째] 봄과 가을로 강신(講信)하는 기일 전에 유사가 회문(回文)을 내면 저마다 호과(壺果)를 들고 공처(空處)에 모인다. 기구(器具)를 준비하는 일은 유사가 맡는다.
[둘째] 유사 3원(三員)은 한 해마다 강신(講信)하는 날에 서로 교대한다. 교대할 때에 따로 술과 안주를 준비하되 너무 풍성하게 하지 않는다. 연고가 있으면 계장(契長)이 의논하여 다른 인원을 뽑는다. 직임을 잘 살피지 않으면 일제히 모여 벌을 준다.
[셋째] 4상(四喪)에 서로 돕되 父, 母, 己, 妻로 한다. 바꾸기를 원하는 경우 들어주되 동생자녀(同生子女)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넷째] 부음을 듣는 즉시로 유사가 회문(回文)을 내면 쌀 한 말을 성복하기 전에 상가로 보낸다. 계원은 성복할 때까지 호상하고 발인할 때에 문밖까지 호송한다. 각각 장노(壯奴) 1명을 내어 연번(延燔)하고 반혼할 때에 일제히 교외로 가서 맞이하고 장사할 때에 각기 치존(致尊)한다.
[다섯째] 계원이 지방에 나가게 되면 유사가 기일 전에 회문(回文)을 내고 각기 호과(壺果)를 들고 공처(空處)에 모여 전별한다.
[여섯째] 계원 중에 외임을 맡는 자가 있거든 부임한 뒤 3개월 이내에 각기 정목(正木)을 보내기를 차등 있게 한다. 3품 이상은 3필, 2품 이상은 4필, 3품 이하는 2필로 하되 3개월을 넘기면 한 달에 1필씩을 추가한다. 서울에 있는 아문(衙門)에 부임해도 1필을 낸다. 모두 유시가 맡는다.
전체가 여섯 조목이지만 요즘의 회칙과 큰 골격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여섯 조목 중 첫째, 둘째는 정기 모임에 친목 도모의 중요성을 나타냈고, 셋째와 넷째는 상사(喪事)에 서로 부조(扶助)하는 문제에 관한 조목이다. 그리고 다섯째, 여섯째는 대부분 계원이 출사하여 관료 생활을 하는 처지이기에 서로 영송(迎送)하는 일이 많았고, 거처를 옮길 때 일시적 재정적 부담을 분담하는 장치로 한 것 같다.
친목을 위한 모임을 할 때에 마다 호과(壺果)를 들고 공처(空處)에 모인 것은, 문예의 장으로 시, 서, 화, 금이 어우러지는 문예 활동이 이루어지고 놀이 활동도 뒤따랐을 것으로, 선인들의 주옥같은 많은 문학 작품들이 실제로 이런 자리에서 창작되고 공유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계원들이 회갑을 맞던 1624(甲子)년에 함께 모여 계회를 갖고 서로 차운한 시 가운데 월사가 지은 시로,
重逢甲子屬殘春 회갑이 오니 젊음은 다해가고
靑眼相憐白髮新 백발이 늘어나 가련하지만
一世尙難伋一國 한 세대도 어렵거늘 같은 나라요
同庚何幸況同親 한 나이도 행운인데 같이 친하여
後先月日分兄弟 일월의 차이로 형 아우 나누고
來往東南迭主賓 이리저리 오가며 손님 주인 되었구려
自是神交元不易 이러한 마음으로 사귀기는 원래 쉽지 않으니
我曹奇遇繼無人 우리 같은 기이한 인연이 더는 없으리라
이렇듯 갑계의 계원들은 비록 서로 신분적 환경이나 그 정치적 노선이 다소 같지 않았어도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우정이 지속하였다.
이 외에도 주고받은 시가 수십 편 있지만 생략한다.
삼결계 이후에 계원의 수는 변화를 계속한다. 이호신(李好信 1564~1634) 갑계발(甲契跋 1599)에는 계원이 모두 36인으로 나와 있었다. 그 뒤 1630(庚午)년에 새로 작성된 갑계좌목에는 33인으로 그 수가 3인이 줄었는데, 이는 1621년 4월에 김질간(金質幹)이 처형되고, 류희분(柳希奮)과 정영국(鄭榮國)이 인조반정 직후 1623년 4월과 5월에 처형되어 삭제 되었다. 이 세 사람 외에도 이미 세상을 떠난 계원의 수가 적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겹쳐 점차 계회를 지속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그런데도 여러 기록을 근거하여 보면 12세 때에 처음으로 갑계를 맺은 이후로, 적어도 67세에 이르는 56년 동안은 계회가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갑계에 관한 기록으로 제일 앞선 것은 1616년에 월사가 작성한 갑계첩으로, 36명의 계원의 성명을 하나의 첩에 쓰고 우정을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회도가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좌목이 작성되었음을 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단다. 그 후 1694년에 박돈(朴돈)의 손자 박염(朴廉)이 남긴 기록이 갑계 좌목 원본으로 마지막 모습이란다. 그 실물은 아니지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갑계첩'들은 이를 바탕으로 전사되 그 과정에서 이본이 만들어졌단다. 본 갑계록 또한 그 과정에서 오늘에 이르는 것 같다. 그 중 '국립중앙도서관'에 또 하나는 '왕실도서관 장서각'에 안경(安璥)의 9세손인 안좌묵(安左默)이 정리한 갑계첩(甲契帖)이 더 자세한 이미지를 언제나 누구에게나 볼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 밖의 내용이지만 후손들의 노력으로 찾아내고, 쓰이고, 이어져서, 학자들의 연구에 제 조명된 갑계는 옛 시대, 선조들의 생활상을 돌아볼 수 있는 자료로 충분하다. 하지만 본 논문은 개인의 저작권이 있기에 원본 그대로 쓰지 못하고 요약해서 정리한다.
2012. 2. 8
14세손 成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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