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연원록(淵源錄), 해주최씨에 대하여

아름드리 블로그 2011. 12. 27. 16:24

  문화류씨 대승공 22世, 도사공 휘 형국(都事公 亨國 1596~1670) 할아버님의 아내 해주최씨(海州崔氏 1600~1637)는, 오라버니가 승지 최유연(承旨 崔有淵)이고, 아버지는 창랑 최준(滄浪 崔濬)이며, 할아버지는 절도사 최여림(節度使 崔汝霖)으로 1600년 4월 9일 한양에서 태어나셨다. 평소 높은 절의(節義)에 감모(感慕)하여 애틋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달, 며칠을 지나 간략하게 행적을 정리한다.

 

연원록(淵源錄) 해주최씨 부분 [원본 12世 孫 志遠님 보관]

 

 

[조선왕조실록] - 순종 26권 20년(1694. 3. 4)일 1번 기사임금(숙종)이 주강(晝講)에 나갔다가 이조판서 이현일(李玄逸)이 아뢰기를생략 " ~ 병자년의 난리에 강도(江都)에서 병란을 피하고 있었는데, 적병(賊兵)이 갑자기 이르니, 최유연은 그 어미를 업고 황급(惶急)히 배에 올라탔는데, 그의 두 아들과 한 손자는 언덕 위에 있다가 슬피 울면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미가 최유연을 돌아보면서 '어찌 이들을 버리고 홀로 살겠느냐?'고 하니, 최유연이 울면서 말하기를, '형세가 양쪽이 다 보전될 수가 없는데, 자식 때문에 늙은 어미에게 화(禍)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하면서 마침내 배를 저어 갔으므로, 마침내 어미는 난리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마는, 두 아들과 한 손자는 적병에게 몰려서 모두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두 최유연이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는 것이니, 또한 마땅히 선행(善行)을 표창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겠습니다. ~ " 생략- 최유연(崔有淵)은 해주최씨의 오라버니 임-

 

[문화류씨보감]- 선세편 1990년배위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창랑 준(滄浪 濬)의 따님인데, 효우(孝友)의 행실은 물론 유순한 덕이 있어 시부모를 잘 섬기고 뜻을 순종하며, 시누이를 대함에 골육(骨肉)과 같이 하고 비복(婢僕)을 부리되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집안이 엄숙하고 정연하였다.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경성(京城)의 사촌 오라버니 감사 최공(監司 崔公)의 집에 있다가 난리를 만나 최공을 따라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는데 드디어 성(城)이 함락되어 위급하게 되자, 입고 있던 홑저고리에 손가락을 깨물에 혈서(血書)를 써서 부군(夫君)에게 보냈다. 그 혈서에 이르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어 형세가 어쩔수 없으니 이 옷으로 나를 장사하기 바란다."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때는 丁丑(1637)년 정월 25일로 나이 겨우 38세였다. 이에 혈서가 씌어진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부군 묘소곁에 합부하였다. 후인(後人)이 그 절의(節義)를 감모하여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난리에 임하여 몸을 던졌으니  열열한 절의가 어기지 않았도다  만고에 강화성 위의 저 달은  지금도 오히려 혈의(血衣)를 비추누나."

 

[충북 진천 인물지] - 1987년류형국의 처 해주최씨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살면서 1636년(인조14) 한양에 있는 친정으로 근친을 갔다가 병자호란을 만나자, 승지를 지내던 오빠 최유연이 왕자와 비빈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갈 때 함께 행렬을 따랐다. 그러나 강화도의 성이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혹은 청나라 심양까지 끌려가기도 하였다.이에 해주최씨는 손가락을 잘라 하얀 적삼에 글씨를 써 남편에게 이르기를 "강화도에서 굳게 지키던 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느니보다 차라리 조국을 위해 깨끗하게 이 몸을 바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은 뒤에 장사를 지낼때 이 옷을 써 주시기 바라나이다."하는 글을 남기고 1637년(인조15) 정월 25일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해주최씨에 관한 시를 적었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을 만나 몸을 물에 던졌지만  지금이라도 돌아올 듯하구나.  맵고도 깨끗한 절개는 만인의 모범이로다.  예부터 비치는 강도성 위의 저 달은  변함없는 혈서의 적삼을 비치는구나."

 

[충남 연기읍지] - 1825년"해주최씨는 문화인 류형국의 처이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오빠인 승지(承旨) 유연(有淵)과 함께 화를 피하여 시집으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화가 미치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혈서를 써서 남편에게 영결(永訣)을 고하고, 계자(繼子)인 선전관(宣傳官) 세장(世檣)으로 하여금 순장(殉葬)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강에 몸을 던졌다. 정렬(貞烈)을 기리기 위해 여러 차레 상언(上言)했으나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했다. 만력(萬曆) 경자(1600)년 4월 9일생이고 정축(1637)년 1월 25일 순절하였다. 묘는 현(연기)의 남면 둔덕동(屯德洞) 산의 시목현(枾木峴) : 감나무재) 자좌(子坐)이다."

 

[해주최씨대동보] - 甲子譜 1744년" 해주최씨는 19世 최준(崔濬)의 따님으로, 문화류문 필선 류기문(弼善 柳起門)의 아드님인 형국(亨國)에게 시집가서 계자(繼子) 세장(世檣)을 두었다. 한성의 친정집에 있을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친오빠가강화도의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에 임명되어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타러 나룻터에 갔으나 배가 없어 어머니를 업고 헤엄쳐 건넜다. "

 

 

  위의 여러 내용을 상고(祥考) 하건데, 약간씩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비슷비슷하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여러 명의 배경 인물 중 해주최씨(휘 류형국 처)의 호칭은 실록의 주제 상 거론되지 않아 보인다. 문화류씨 보감에는 사촌 오라버니(崔有海)라고 실려있다. 이는 사촌이 아니고 친 오라버니(崔有淵)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진천 인물지에는 당시 해주최씨께서 진천에 사셨다고 나온다.하지만 도사공(휘 형국)의 행적을 볼 때, 근친(近親)들께서 진천에 사셨지만, 해주최씨께서는 그즈음 연기에 사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11. 12. 3013世 孫 成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