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원록(淵源錄)은 봉양 휘 인호(鳳陽 諱 寅鎬 1862~1933) 할아버지께서 1892년 31세에 쓰신,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부터 27世 까지 묘제 및 행적을 정리한 글 중 7대조, 27世 휘 제화(劑華 1760~1789), 결성장씨(結城張氏 1769~1822)의 유사(遺事)를 스캔한 내용이다. [
원본은 족숙 지원님이 보관하고 계신다.]
해석[채하 류주환(충남대교수)] ---------------------------------------------------------------------------------------------
효자류공유사.열녀장씨 사실도 함께 실음
공의 이름은 제화(齊華)이고, 자(字)는 숙유(叔維)이다. 어릴 때부터 독실하게 어버이를 섬기고, 웃어른의 뜻을 받들었다. 나가서는 육적이 어머니를 드리려고 귤을 품었던 일과 자로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백 리까지 쌀을 운반하여 운임을 벌었다는 일을 본받지 않음이 없었고, 들어와서는 (겨울에 자기 몸으로) 이불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베게를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는 정성을 행하였다.
정미년에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 하나를 갈라서 피를 바쳐 구원하였으나 생명을 마치고 말았다. 상을 당하여 두 형과 함께 예식을 집행하는 데 힘을 다 하였고, 물을 마시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슬픔이 예절을 넘어섰고 날마다 묘에서 우는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흔들었다. 겨우 상(祥, 대상과 소상)을 지나 담제 날이 오지 않았는데 급기야 상(喪)을 당하지 못해 죽었다. 오호, 슬프도다.
공은 경진년(1760)에 태어나서 기유년(1789) 2월 15일에 나이 겨우 28세로 죽었다. 임종할 때에 어머니의 자기를 낳을 때 수고하신 은혜을 생각하고 세 번 외치고 절명하니 차마 말로 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이 어찌 도타운 효도가 아니겠는가. 묘는 가양동 0좌원에 있다.
부인 기계유씨는 사인(士人) 대기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 결성장씨는 석주(錫疇)의 딸인데 나이 16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상냥하고 친절하며 사랑으로 살피고 몸소 예의(禮儀)를 실천하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모심에 한 마음으로 온순하게 모두 그 도리와 행동을 여인이 지켜야 할 법칙에 합당하게 다 하였다.
평소에 빠른 말소리나 급히 서두르는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부리는 여종과 남종에 대해서도 역시 화를 내며 꾸짖지 않았다. 나이 21세에 남편의 상을 당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바쳤으나 마침내 구해내지 못하자 남편을 따라 자결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의 경계가 엄중하여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고, 또 위로 홀어버이가 계시고 아래로는 남겨진 아들이 있어 구차하게 세월을 지탱하여 보내면서 3년 동안 상복의 머리와 허리띠를 풀지 않고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은 적이 없으며 정성과 힘을 다해 형식을 갖춘 의식(儀式)뿐만 아니라 슬픔도 모두 지극하여 몸이 뼈만 남을 정도로 수척해졌다.
남은 아이를 가르침에 있어 사대부와 유림(儒林)과 교유하게 하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게 하니, 이것은 군자가 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개 장씨의 조상 좌랑 득헌과 그 부인 김씨가 모두 효열(孝烈)로써 세상에 알려져서 붉은 정려의 쌍을 이룬 가로 기둥(crossbeam)이 연읍(연기읍 추정)에 빛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예를 표하니, 부인 행실이 받은 곳이 있도다.[조상을 닮아 그런 극진한 행실을 보였다는 뜻]
아, 옛날에 남편(의 죽음)에 곡(哭)을 잘 하고 경서의 풀이에 대해 칭송을 받는 이가 있었으나 부인처럼 남편의 병에 정성을 다해서 그 손가락을 자르고, 상(喪)에 울음이 슬품을 다하고, 제사에 그 공경함을 다햐여, 집안을 다스림에는 바로하고, 일족을 대접함에는 은혜롭게 하였으며, 또 남은 자식을 가르쳐 집안을 잇게 하니, 그 뜻과 행실은 옛사람에 뒤지지 않는다.
사관(史官)은 반드시 열녀의 편(編)에(기록하여) 넗리 알리고 드높여 세상이 의심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부인(결성장씨)은 기축년(1769) 11월 18일에 태어나고 임오년(1822) 6월 22일 사망했다. 열행(烈行)으로 "연기읍지"에 실렸고, 관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전(前) 부인 기계유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병권(李秉權)에게 시집갔고, 후(後) 부인 결성장씨는 남자 아이 규진(奎鎭)을 낳았는데 [규진] 문예를 일찍이 성취하고 많은 이름난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일문칠행(一門七行)*으로 마침내 (임금에게)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규진] 이행진(李行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원학(源學)이고 사위는 김필대(金必大)와 조긍호(趙肯鎬)이다. 이병권은 아들 이환?춘(李煥?春), [무자보 외 족보에는 熙春]
임진년(1892) 늦봄의 기망(旣望, 음력 16일)에 종현손 인호가 삼가 씀.
*주. 공의 처가 즉, 결성장씨 문중은 26世에 연기로 이거 하여 결성장씨 할머님의 부친(석주)이 35世이고, 부친의 5대조께서 좌랑 득헌(得軒)이 아니고 응헌(應軒)이며 배위가 열녀 언양김씨(彦陽金氏)이다.<설송 장흥순님 제공>
이렇듯 효자공 께서는 1760년 연기에서 태어나시어 1789년에 돌아가시니, 연기현 북쪽 선산 "부곡촌 동가양동 해좌(釜谷村 東柯養洞 亥坐)"에 모시었다. 배위 결성장씨는 1769년에 태어나시어 1822년에 돌아가시니, 금산 북면 사기점 후록 신좌(沙器店 後麓 辛坐)에 모시었다. 1970년대 부곡촌 선산이 군사시설(옛 32보병 사단본부)로 인하여 연기군 남면 고정리 둔덕산 시목성(屯德山 枾木城)으로 천장(遷葬) 할 때 공의 묘소도 이장(移葬)하였다. 하지만 공과 결성장씨의 산소를 실전(失傳)하여 자손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그 후 2004년 4월, 5대 12위(五代 十二位)[6대 조 휘 규진(奎鎭), 배위 완산이씨(完山李氏). 5대 조 휘 원학(源學), 배위 죽산안씨(竹山安氏). 고조 휘 기은(基殷), 배위 은진송씨(恩津宋氏). 증조 인석(寅奭), 배위 경주이씨(慶州李氏). 조부 휘 창열(昌烈), 배위 흥양이씨(興陽李氏). 휘 홍열(洪烈), 배위 우계이씨(羽溪李氏)]를 대전 가족 묘원에 모실 때 위패(位牌)를 모셨다. 2008년 3월 세종시(행정복합도시)의 개발로 필선공 선영(弼善公 先塋) 천장(遷葬) 때 공의 묘소를 득전(得傳)하여 가족 묘원에 봉안(奉安)하였다.
공과 결성장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자손 모두는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효열제(孝烈祭)를 정성껏 받들고 있다.
2013년 3월 8세손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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