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옛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에 12개리가 있었으니
가정. 도룡. 반석. 수남. 신봉. 신성. 안산. 외삼. 자운. 장동. 추목. 하기리이다.
그 중 금성초등학교(옛, 금성국민학교)를 다녔던
일명, 금성 8리는 가정. 도룡. 신봉. 신성. 자운. 장동. 추목. 하기리이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가도 갈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는 산하를
마음으로 그리기에는 세월이 지나 투명한 수채화가 될 것 같아
유성구문화원의 자료를 기초로 하여
연혁, 지명, 고적, 인물, 현제와
옛 기억을 이여줄 1970년 항공사진과 함께
순차적으로 정리한다.
1970년, 금성 8리 항공사진
2010년, 금성 8리 위성사진
일명, 금성 8리(가정. 도룡. 신봉. 신성. 자운. 장동. 추목. 하기)는 북쪽으로부터 영산으로 불리는 해발 364m의 금병산(金屛山)이 마치 옛 금성 8리를 지킴이처럼 내려다보고 있고, 그 앞으로 잔잔한 야산 지대 사이로 금병산 옹달샘에서 발원한 탄동천(숯골내)이 파도 무늬처럼 펼쳐진 들을 기름진 옥토를 만든 뒤 갑천과 합류한다.
그러기에 1714년에 간행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地) 기록에 이르기를 " 계촌(溪村)으로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첫째가 공주 갑천(公州 甲川), 즉 현재 도룡동 앞이라" 하였다.
백제 때는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적오현(赤烏縣)이었고, 고려 때는 공주부 덕진현(德津縣)에 속하다가 조선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으로 처음 탄동 지명이 불렸고, 1895년에는 회덕군 탄동면으로 속했었다. 그 후 1914년 대전군 탄동면으로 바뀌고, 대전시가 신설되는 1935년에 대덕군 탄동면으로 이어졌고, 또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탄동의 지명은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없어지고,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성동으로 바꾸었다.
경제개발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1973년 호남고속도로로 개통으로 금성 8리가 둘로 가라 지는 것을 시작으로, 호남고속도로 아래 지역은 1973년 5월 연구학원 도시 발표와 함께 개발한 대덕연구단지는 수려한 경관과 수많은 지명. 풍습. 전설. 고적 등을 집요하게 잠식하고, 우리나라 첨단과학기술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또 호남고속도로 위 지역은 일찍이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之地)라고 일컬어져 도참설에 따른 피난지로 유명하던 곳으로, 1984년 "620사업" 명으로 시작한 군사개발은 옛 지명이나 지형을 찾을 수 없게 변하여 지금은 자운대(自雲臺)라는 군사 요람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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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어디에도 옛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에 1970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그려가며 점점 잊혀가는 옛 지형. 지명. 풍습. 전설을 찾고 찾아 싣는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고향 이야기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다소 다를까 염려되고, 지면이 넉넉하지 않아 더 자세한 내용을 싣지 못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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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다행인 것은 첫 배움터인 모교가 개발 물결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제 자리에서 훌륭한 후배들을 키우며 지키고 있고, 고향 잃은 수 많은 동문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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