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8代 祖 庸窩公(諱 行直)

아름드리 블로그 2007. 7. 14. 10:10

庸窩公(柳行直)(1725~1787)

大丞公 26世. 자 사심(士心). 호 용와(庸窩).

증동몽교관 시명(贈童蒙敎官 始明)의 아들로 영조(英祖) 원년 乙巳(1725) 1월 5일생인데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아 평소에 곁을 떠나지 않고 만약 특이한 음식을 얻으면 품속에 싸가지고 돌아와 어버이께 드리었다.

부친께서 3년을 병석에 계심에 공이 힘을 다하여 간호하고 한편 어육(魚 肉)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며, 그 병세가 악화됨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흘려 하루 저녁의 명을 연장하고 막상 돌아가심에 송종(送終)의 절차를 한결 예제(禮制)에 쫒아 행하였다. 그후 모친께서 병환으로 7년 남짓에 가산(家産)이 핍박하여 가히 말할 수 없었으나, 심력을 다하여 공양(供養)에 조금도 결핍(缺乏)함이 없으므로 지주 임공덕항(地主 林公德恒)이 소문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매양 쌀과 닭 등을 보내 주었다. 마침내 돌아가심에 한결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고 기일이 닥치면 3일 동안 주육(酒肉)을 삼갔다. 젊어서 일찍 외종숙(外從叔) 남당 한원진(南溏 韓元震)의 문하에 출입하여 행검(行檢)이 바르고 규구(規矩)에 엄하여 항상 자제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천하사(天下事)는 오직 의(義)와 이(利)일 따름이다. 의는 천리(天理)에서 나오고 이느 인욕(人慾)에 속하나니 사자(士子)는 이 두가지를 확실히 분별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임종(臨終)에 정신이 맑아 조금도 괴로운 빛을 보이지 않고 부녀(婦女)를 물리치고 자리에 반드시 누워 태연히 돌아가시니 때는 정조(正祖) 11년 丁未(1787) 정월 16일로 향년 63세였다.

일두 조정경(一蠹 趙鼎慶)이 만사(挽詞)를 지어 애도(哀悼)하였고, 도백(道伯)이 공의 효행을 조정에 계달(啓達)하였다.

배위 은진송씨(恩津宋氏)는 내전(來銓)의 따님으로 2남을 두고, 진주강씨(晋州姜氏)는 필윤(弼潤)의 따님읋 3남을 두었으며 묘소는 연기군 남면 시목성 자좌(柿木城 子坐)에 고위(考位)와 “品”자 형으로 3합부로 모시었다.

5남을 두어 제태(齊泰). 제형(齊衡). 제화(齊華). 제항(齊恒). 제숭(齊嵩)이다. 노탄 송규헌(老灘 宋奎憲)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다.

 

* 墓碣銘. 燕岐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