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9代 祖 孝子公(諱 始采), 敎官公(諱 始明)

아름드리 블로그 2007. 7. 13. 09:51

 

류시채(柳始采) (1681~1751)

대승공 25世, 초휘 시창(始昌), 자 문보(文甫), 호 봉암처사(鳳巖處士) 첨추공 중배(僉樞公 重培)의 장자로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터럭 만큼도 어김이 없었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거처가 풍우(風雨)를 가릴 수 없었으나 감지(甘旨)의 봉양에 지성을 다하여 빠짐이 없었다. 부친께서 병환으로 대소변을 기리지 못하고 8년을 병석에 계셨는데, 아우로 더불어 서로 교대하여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손수 변기(便器)를 받아 씻되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았으며 막상 돌아가심에 슬퍼한 나머지 죽(粥)을 먹으면서 3년을 하루같이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예조판서 서준보(禮曹判書 徐俊輔)의 계주(啓奏)로 순조(純祖) 32년 壬辰(1832)에 정려(旌閭)의 명이 있었다.

 

교관공 류시명(敎官公 柳始明) (1687~1749)

대승공 25世, 자 회보(晦甫) 첨추공 중배(僉樞公 重培)의 차자로 효성이 지극하여 형으로 더불어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혹 밖에 나가 맛 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 드리고 비록 가세가 빈궁하였으나 반찬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고을 수령(守令)이 듣고 아름답게 여기어 매월 쌀과 고기를 보내어 도와 주었다. 영조(英祖) 4년 戊申(1728)에 부친께서 진천 선영(鎭川 先塋) 성묘길에 반란(叛亂)을 만났는데, 공이 듣고 황급히 달려가 아버지를 모시고 난리를 피함이 엄연하므로 원근의 선비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두 칭찬하여 “참으로 효자라”하였다. 일찍 유학(儒學)에 종사하여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니 고을에서 추중하고 천장(薦壯)을 올렸다. 순조(純祖) 32년 壬辰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단자 행직(行直)을 두었다.

 

 

* 甲子譜. 追先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