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12代 祖 都事公(諱 亨國)

아름드리 블로그 2007. 6. 21. 17:58

 

 

都事公(柳亨國)(1596~1670)

大丞公 22世. 자 경오(慶吾). 호 봉황정(鳳凰亭). 오촌 기문(梧村 起門)의 장남으로 선조(宣祖)29년 丙申(1596)에 연기(燕岐)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유명(遺命)으로 과거공부를 폐하고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 호란(胡亂)에 동지 10인으로 더불어 창의(倡義), 북상도중에 화전(和戰)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파병(罷兵)한 후 군량을 관청에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년에 동진강(東津江)위에 정자를 지어 봉황정(鳳凰亭)이라 이름하고 친붕(親朋)으로 더불어 시주(時酒)로써 스스로 즐기니 이름난 관리들이 제영(題詠)하여 당세에 명망을 떨치었고 수창록(酬唱錄)이 전하고 있다.

효종(孝宗) 2년 辛卯(1651)에 나라에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초야(草野)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5세로 연기군 남면 둔덕산 아래 시목성 자좌(柿木城 子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창랑 준(滄浪 濬)의 따님인데, 효우(孝友)의 행실은 물론 유순한 덕이있어 시부모를 잘 섬기고 뜻을 순종하며, 시누이를 대함이 골육(骨肉)과 같이 하고 비복(婢僕)을 부리되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집안이 엄숙하고 정연하였다.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경성의 사촌 오라버니 감사 최공(監司 崔公)의 집에 있다가 난리를 만나 최공을 따라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는데 드디어 성(城)이 함락되어 위급하게 되자, 입고있던 홑저고리에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血書)를 써서 부군(夫君)의 집에 보냈다. 그 혈서에 이르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어 형세가 어쩔수 없으니 이 옷으로 나를 장사하기 바란다”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때는 丁丑(1637) 정월 25일로 나이 겨우 38세였다. 이에 혈서가 씌워진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부군 묘소곁에 합부하였다. 후인(後人)이 그 절의(節義)를 감모하여 시를 지어 이르기를

^ 난리에 임하여 몸을 던졌으니

열열한 절의가 어기지 않았도다.

만고에 강화성 위의 저 달은

지금도 오히려 혈의(血衣)를 비추누나, ^

후배 여흥민씨(後配 驪興閔氏)는 당(戇)의 따님인데 역시 부군 묘소에 합부하였다.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종형 창국(從兄 昌國)의 2자 세장(世檣)을 맞아 계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