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13代 祖 弼善公(諱 起門)

아름드리 블로그 2007. 6. 21. 09:57

 

 

弼善公(柳起門)(1564~1639)

大丞公 21世. 자 광전(光前). 호 오촌(梧村), 쌍청당(雙靑堂). 증호조참판 헌민(贈戶曹參判 獻民)의 2자로 명종(明宗) 19년 甲子(1564)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탐구하여 문장은 물론 서예도 능하였다.

선조(宣祖) 22년 己丑(1589)에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하고 34년 辛丑(1601)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박사(博士), 주부(主簿)를 거처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재직 중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38년 乙巳(1605) 정월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갔다가 동년 4월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고 이듬해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결성(結城), 증산현감(甑山縣監). 전주판관(全州判官).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을 두루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내직으로 들어와 교리(校理). 전적(典籍)을 거쳐 13년 辛酉(1621) 9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하고 이듬해 3월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전임하였다.

당시 폐모(廢母)의 의논이 일어나자 그를 거부하다가 권신(權臣)들의 뜻을 거스려 마침내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갔다가 동년 11월 파직되어 고향 진천 벽오촌(鎭川 碧梧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 잦나무 두 구루를 심고, 쌍청당(雙靑堂)이라는 당호를 걸고 여년을 즐기다가 향년 65세로 돌아가시니 인조(仁祖) 17년 己卯(1639) 12월 22일이었다. 이듬해 2월에 고을 북쪽 부곡(釜谷), 지금 연기군 서면 부동촌 동록 유좌(燕岐君 西面 釜洞村 東麓 酉坐)에 안장되었다.

공은 평생에 마음을 조심하여 매양 만족함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경계하였고, 어버이께서 늙으심에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였으니 관직 30년에 내직에는 10년도 있지 않았고 반정(反正)전 2년 동안은 한양(漢陽)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애척(哀戚)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기에 이르고 형제간에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자질(子姪)들을 잘 가르쳐 모두 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중국(中國)에 갔다 오면서 공부자(孔夫子)의 초상를 모시고 돌아와 집에 전하고 있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그리고 공이 스스로 지은 묘지(墓誌) 및 행장(行狀)이 있으며, 공의 內室(내실)께서 돌아가시자 시암 조상우(時庵 趙相禹)가 만사(輓辭)를 지어 애도하였다.

<<< 自製墓誌 原文 - 墓表

姓是文化柳起門字光前自少業書史蓮株兩丑年

平生性守拙每戒知止足獨官苦旅邸親老每外乞

仕路三十載在朝不滿十三入淸選地卽辭歸鄕曲

反正前二歲京城路絶跡所居名雙靑庭前樹二栢

永托歲寒盟長願後凋節晩愛邊山勝四年石潭月

配得南陽洪性勤治家業不幸先我浙乙丑終壬戌

一子名亨國海州崔氏匹一女許尹稷非命以夭折

二女夭而子生員愼姓益父母祖父母俱葬胎山麓

地下應不孤但慮香火絶山下數畝地永爲護火伐 >>>

 

<<< 원문번역(原文翻譯) - 유주춘추(儒州春秋) 류지원(柳志遠)

나의 姓(성)은 文化柳氏(문화류씨)로 이름은 起門(기문)이요 字(자)는 光前(광전)이다.

젊어서부터 書史(서사)를 연구하여 小科(소과)와 大科(대과)를 두 丑年(축년)에 합격하였다. 평생에 성질이 拙挘(졸렬)함을 지키어 매양 止足(지족)할줄 알 것을 警戒

(경계)하였다.

혼자서 관직으로 旅邸(여저)의 고생을 맞보고 어버이 늙으시므로 매번 外職(외직)을 청하였다. 벼슬길 三十年(삼십년)에 朝廷(조정)에 있기는 十年(십년)이 못 되었다. 세 번 淸選(청선)에 들어 곧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반정 전 두 해를, 한양길을 끊었다.

내 집을 雙淸(쌍청)이라 이름하고 뜰앞에 두 잦나무를 심었다. 길이 歲寒(세한)의 盟誓(맹서)를 부탁하니, 後凋(후조)한 절개를 길이 願(원)함이다. 늦게 邊山(변산)의 絶勝(절승)함을 사랑하여, 石潭(석담)의 밝은 달을 사년이나 즐겼다.

아내는 남양홍씨로, 성질이 근검하고 가업에 충실하였다. 불행히 나 먼저 떠났으니 乙丑(을축)에 낳고 壬戌(임술)에 죽었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亨國(형국)으로 해주최씨와 짝을 지었다.

큰 딸은 府尹(부윤) 許 稷(허 직)의 아내로 非命(비명)에 夭折(요절)하였고, 둘째 딸은 생원 愼 益(신 익)의 처로 요절했으나 아들을 두었다.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胎山(태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지하에서 응당 외롭지 않을 것이나 다만 香火(향화)가 끊어질까 염려되어, 산하에 몇 두락 토지를 마련하여 길이 守護(수호)하고 香火(향화)와 伐草(벌초)를 하도록 하였다. >>>

 

배위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직장 탁(直長 鐸)의 따님으로 1남2녀를 두어 아들은 선교랑 형국(宣敎郞 亨國)이요. 사위는 부윤 양천허 직(府尹 陽川許 稷)과 생원 거창신 익(生員 居昌愼 益)이다.

공의 사행(事行)이 진천(鎭川). 연기(燕岐)의 군지(郡誌)에 실려있다.

공의 묘소가 군사지역에 편입되어 연기군 남면 고정리 시목성 건좌(柿木城 乾坐)에 이폄, 합부하였다. 근래에 행정복합도시(行政復合都市) 세종시(世宗市)건설로 2008년 3월에 보은군 삼승면 둔덕리(報恩郡 三升面 屯德里) 358-1번지에 모시었다.

 

 

* 朝鮮王朝實錄. 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