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7代 祖 孝子公(諱 劑泰. 劑衡, 劑華). 烈女(結城張氏)

아름드리 블로그 2007. 7. 15. 09:58

 

류제태(柳齊泰) (1748 ~ 1809)

大丞公 27世, 용와공 휘 행직(庸窩公 行直)의 장자로 자 백유(伯維) 어려서부터 행실이 지극히 착하더니 9세에 모친을 여의었으나 범절(凡節)이 성인과 같았으며 아우로 더불어 여묘(廬墓)하면서 기물(器物)을 씻고 제전(祭奠)을 올림에 정성껏 받들어 행하였다. 한편 홀로 계신 부친의 공양에 성력을 다하고, 혹 환후(患候)가 계시면 밤에 산에 올라가 자신을 대신해줄 것을 기도하고 낮에는 탕약(湯藥)을 다려 올렸으며 병세가 더욱 위독함에 마침내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하루의 명을 연장하였다. 드디어 돌아가심에 여막(廬幕)에서 하루에 세차례씩 묘소에 나아가 곡(哭)하며 3년을 마치었다. 일찍 깊이 감추어 두웠던 끊어진 손가락을 매양 볕에 쬐어 두었더니 임종에 가인(家人)을 시켜 그 손가락을 잇고 말하기를 “부모의 육체(肉體)이니 가히 온전히 돌아가야 한다.”하고 심기(心氣)가 편안하더니 몸을 구부려 계모 강씨(繼母 姜氏)에게 절하여 영결(永訣)을 고하고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끝내 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죽게되니 불효가 막대하옵니다.”하고, 또 아우 제형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어머님을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돌봄을 오직 너만 믿는다”하고 돌아가시니 도백(道伯)이 공의 효행을 나라에 계달(啓達)하였다.

 

류제형(柳齊衡) (1750 ~ 1814)

大丞公 27世, 용와공 휘 행직(庸窩公 行直)의 차자로 자 중유(仲維) 어려서부터 무릇 행동이 어버이를 즐겁게 하더니 7세에 모친을 여의고 형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제전(祭奠)을 올리며 호곡(號哭)하는 절차가 문득 성인과 같으므로 보는 이마다 기특히 여기었다. 10세에 이르러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닭이 울면 일어나 부친의 침실(寢室)에 들어가 따습게 덮어드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심을 기다려 한결 지성으로 뜻을 받들었다. 연기(燕岐) 고을 수령으로 왔던 황공운조(黃公運祚)가 그 효성을 듣고 아름다히 여겨 매월 미육(米肉)을 급여(給與)하여 반찬을 잇게 하였다. 만약 친환(親患)이 계시면 밤 낮으로 곁에서 모시어 조금도 떠나지 않고 탕약(湯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맛을 본 후에 드리었다. 병환이 위독하심에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注血)하고 드디어 돌아가심에 슬퍼함이 이를데 없었으며 수장(水醬)을 3일 동안 입에 넣지 않고 여막(廬幕)에서 하루에 세차례 묘소에 나가 곡함에 울음소리가 산곡(山谷)을 진동하였고 비록 매서운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도 페하지 않고 3년을 마치었다. 매양 기일(忌日)이 닥치면 슬퍼 뛰고 울부짖음이 초상(初喪)때와 같았으며 형제에 우애하고 자질들을 가르침에 다 성법(成法)이 있을 뿐아니라 덕망(德望)이 일향에 들리었다.

 

류제화(柳齊華) (1760 ~ 1789)

大丞公 27世, 용와공 휘 행직(庸窩公 行直)의 3자로 자 숙유(叔維) 어려서부터 행실이 독실하여 어버이의 뜻을 순종함에 지극하더니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심에 손가락을 깨어 진혈(進血), 연명(延命)을 시도하였으나 마침내 돌아가심에 양형(兩兄)으로 더불어 여막(廬幕)에서 집례(執禮)에 성의를 다하고 슬픔이 절도(節度)에 넘어 담제(禫祭)전에 돌아가시니 때에 나이 30이었다.

결성장씨(結城張氏) (1769~1822)

류제화(柳齊華)의후배(後配), 석주(錫疇)의 따님으로 천성이 온숙(溫淑)하고 자량(慈諒)하여 예절이 매우 밝더니 출가 후 구고(舅姑)를 섬기고 부군(夫君)을 대함에 한결 뜻을 순종하고 행동이 여칙(女則)에 합당하여 질언(疾言)과 거색(遽色)이 없었다. 부인의 나이 21세에 부군이 돌아가셨는데 이에 앞서 손가락을 깨어 진혈(進血)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고 즉시 따라 죽으려 하니 가인(家人)이 심히 경계하고 한편 위로 시어머님이 계시고 아래로 갓난 어린애가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여 3년 동안을 질대(絰帶)를 벗지 않고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성의와 공경을 다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옛적 여사(女士)의 풍도(風度)가 있다” 하였다.

 

이렇듯 일문 삼세(一門 三世)에 효자가 6인, 열부가 1인이 났으므로 관찰사(觀察使)가 이를 계달(啓達)하였다. 그리고 심암 조상공두순(心庵 趙相公斗淳)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일렬도 아름다운데 육효를 겸했으니 단정과 화고가 시골에 빛나도다.” (“一烈猶光六孝兼. 丹旌華誥耀窮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