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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은각은 고려조의 충신이며 유학자인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숙모전엔 세조에게 원통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계유정난에 원통하게 죽어간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위패를 모신 종실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참형당한 사육신 등 충의절사를 모신 사우(祠宇)가 있다. 동계사는 삼은각 동편(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순절한 관설당 박제상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936년(고려 태조 19년)에 고려의 개국공신 류차달이 박제상의 충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명으로 건립한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동계사가 박제상의 후손인 영해박씨(寧海朴氏) 문중과 류차달의 후손인 문화류씨(文化柳氏) 문중 간 민원 대상으로 제기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분쟁의 단초는 1956년 동계사가 중건되면서 박제상의 위패와 류차달의 위패가 합사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영해박씨 문중을 대표해 박대희(83)씨 등 28인의 연명으로 지난 9월 문화부장관에게 탄원한 내용에 따르면, 1960년 문화류씨 문중에서 동계사를 지도∙관리하는 숙모회 임원 측에 '임시로 행랑에 모셨다가 장차 별사를 짓고 따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영해박씨 문중은 그 약속을 믿고 동계사에 그들의 선조인 류대승공(류차달)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고 주장한다. 또한 합사가 박씨 측과 상관없이, 숙모회와 문화류씨 측이 논의해서 결정한 사안이었으며 자신들은 '나중에 류씨 위패를 따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해박씨 문중에서는 그 약속에 따라 문화류씨 측에서 처음에는 곡배 형태(류차달의 위패를 박제상의 위패와 나란히 모시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직각으로 모시는 형태)로 위패를 합사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위패를 나란하게 모시는 열배를 하는 등 약속을 위반했다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또한 탄원서에는 '문화류씨 문중은 류대승공을 동계사에 모셔 제사지내는 것이 도리어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조소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유림에서는 명분을 바로잡아줄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담겨 있다. 영해박씨 문중의 고문인 박대희씨는 전화통화에서 이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박씨는 '숙모회 이사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타부타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에 따를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류씨 '사당 지어주면 함께 모시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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