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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사는 계룡산의 동쪽에 있는 동학사와 울담을 이웃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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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윤수 |
| 계룡산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학사에는 부처님을 모셔놓은 법당이 있고, 법당으로 들어가기 직전 오른쪽으로 동학사와 울담을 이웃해 삼은각(三隱閣)과 숙모전(肅慕殿), 동계사(東雞祠)가 있다.
삼은각은 고려조의 충신이며 유학자인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숙모전엔 세조에게 원통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계유정난에 원통하게 죽어간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위패를 모신 종실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참형당한 사육신 등 충의절사를 모신 사우(祠宇)가 있다.
동계사는 삼은각 동편(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순절한 관설당 박제상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936년(고려 태조 19년)에 고려의 개국공신 류차달이 박제상의 충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명으로 건립한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동계사가 박제상의 후손인 영해박씨(寧海朴氏) 문중과 류차달의 후손인 문화류씨(文化柳氏) 문중 간 민원 대상으로 제기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분쟁의 단초는 1956년 동계사가 중건되면서 박제상의 위패와 류차달의 위패가 합사된 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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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알려진 동계사에 고려의 개국공신 류차달의 위패가 봉안된 것이 민원으로 제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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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윤수 |
| 박씨 '류씨, 별사 짓고 따로 모시겠다더니...'
영해박씨 문중을 대표해 박대희(83)씨 등 28인의 연명으로 지난 9월 문화부장관에게 탄원한 내용에 따르면, 1960년 문화류씨 문중에서 동계사를 지도∙관리하는 숙모회 임원 측에 '임시로 행랑에 모셨다가 장차 별사를 짓고 따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영해박씨 문중은 그 약속을 믿고 동계사에 그들의 선조인 류대승공(류차달)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고 주장한다. 또한 합사가 박씨 측과 상관없이, 숙모회와 문화류씨 측이 논의해서 결정한 사안이었으며 자신들은 '나중에 류씨 위패를 따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해박씨 문중에서는 그 약속에 따라 문화류씨 측에서 처음에는 곡배 형태(류차달의 위패를 박제상의 위패와 나란히 모시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직각으로 모시는 형태)로 위패를 합사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위패를 나란하게 모시는 열배를 하는 등 약속을 위반했다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또한 탄원서에는 '문화류씨 문중은 류대승공을 동계사에 모셔 제사지내는 것이 도리어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조소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유림에서는 명분을 바로잡아줄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담겨 있다.
영해박씨 문중의 고문인 박대희씨는 전화통화에서 이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박씨는 '숙모회 이사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타부타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에 따를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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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은각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동계사는 제비집처럼 가파른 언덕에 매달리듯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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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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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씨 '사당 지어주면 함께 모시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러나 문화류씨측 설명은 다르다. 문중회의를 거친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영해박씨측 주장이나 동계사의 내력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류영열(70)씨는 전화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류차달이 동계사 터에서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초헌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있었으나, 동계사가 중건되기 이전까지는 사우는 물론 어떤 형태의 건물이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숙모회에서 문화류씨 후손인 류충열(95, 당시 충남도경 국장)씨에게 문화류씨 문중에서 사우를 지어 박제상의 위패와 류차달의 위패를 함께 모시자고 제의했다는 것.
'박제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에 류차달의 위패를 합사할 수 있느냐'고 묻자, 류씨는 숙모회에서 삼은각에 6분의 위패를 모신 사실 등을 예로 들며 가능하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문중의 일인지라 선뜻 혼자 결정할 수 없어 문중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문중회의에서 선조인 류차달이 박제상의 초헌제사를 지냈듯 후손들이 박제상의 위패를 모실 수 있는 사우를 건립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더구나 류차달의 위패까지 함께 봉안할 수 있다고 하자 문중에서는 기꺼이 건립비를 충당해 동계사를 중건했다는 것.
이와 관련, 문화류씨 문중의 재화(財貨)로 동계사가 중건됐다는 사실은 민원당사자인 박대희씨도 인정했다.
류씨는 박씨 문중 주장대로 동계사가 건립된 직후 곡배 형태로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합사에 따른 문중 간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국의 유림에 서면질의(설문)한 결과 대다수 유림에서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는 합사할 수 없으나 충신과 공신은 합사할 수 있다고 답신했다고 한다. 이로써 합사에 대한 명분을 구축했다는 것.
또한 위패를 어떻게 배열하느냐를 놓고 성균관에 질의한 결과, 열배(나란하게 봉안)해도 무난할 거라는 회신을 얻어 곡배 형태에서 열배 형태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씨는 50년 전 이야기긴 하지만 숙모회나 박씨문중이 재정적 여건이 여의치 않자 류씨 문중에 동계사 중건과 합사를 제의해 놓고, 동계사가 완공되자 말을 바꿔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류씨에게 박씨문중에서 주장하는 '임시부무장건별사(臨時附廡將建別祠, 임시로 행랑에 모셨다가 장차 별사를 짓고 따로 모시겠다는 내용)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임시부무장건별사'는 춘향(春享, 봄 제사, 음력 3월 15일)과 동향(冬享, 음력 10월 24일) 때 숙모회에서 짓는 축문에 담긴 내용이다.
동계사(東계祠): 숙모전.삼은각 동편에 있으며 신라 제19대 눌지왕때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고 왜지에서 순절한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의 항일 충혼을 모신 곳으로 936년(고려 태조 19년)에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이 공의 만고충절을 이곳에 초혼제사하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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