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리(內洞里)- 방현동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으로 북동쪽 적오산 아래에 낮은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은 마을로 남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 살기 좋은 명당지로 소문이 나면서 고려시대에 이미 마을이 들어섰고, 인조 때(1630년) 문화류씨 류명욱(柳明旭)이 입향하여 13대손까지 계승 번성하였다.
1979년 가호 수는 70호에 인구는 440명이었다. 그 후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내동에서 방현동(芳峴洞)으로 바뀌었다.
[마을]
* 재밑 -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는 치곡(峙谷)이라고 부르다가 안말에서 솔고 개 너머로 마을이 있다 해서 재밑이라 부르고, 덕진산성 아래 본 마 을이라 하여 성본(城本)이라고도 불렀다.
* 솔고개 - 재밑 동남쪽의 마을로 소나무가 우거진 솔고개 아래에 있으므로 솔고개 또는 송현(松峴)이라고도 불렀다.
* 가양동 - 새말 아래쪽에 햇빛이 밝은 곳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가양동, 가양 골이라고 불렀다.
* 내동 - 재밑 서북쪽의 마을로 덕진산성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안골 내동 (內洞)이라 부르고 방고개 아래에 있으므로 방고개, 방아고개, 방현 (芳峴)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새말 - 안말 바깥쪽에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말 또는 신촌(新村)이라 불렀다.
* 뒴밭골 - 안말 뒤쪽에 마을로 뒷밭골이라고 부르다가 뒴박골이라고 부르던 마을이 모두 안말로 옮겨져 없어진 마을이다.
* 돌매 - 뒴박골 뒤 동쪽 산자락에 있다 해서 동미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돌매 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산]
* 매봉 - 안말 뒤쪽에 있는 산의 모양이 매를 닮았다 해서 응봉 또는 매봉이 라고 부르던 산이다.
* 양사곡산(兩巳谷山) - 덕진산성 동남쪽에 사자가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 러러보는 형국이라 하여 앙자산(仰子山)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양사 곡산이라고 불렀다.
[고개]
* 방고개 - 안말 남쪽에서 장동 장재울로 넘어 다니는 긴 고개이다.
* 솔고개 - 새말에서 재밑으로 넘어 다니는 고개에 소나무가 많다 해서 붙여 진 고개이다.
[골짜기]
* 돈의골 - 새말 서쪽에 골짜기가 두텁고 날카롭지 않다고 해서 돈이골 또는 돈의곡(敦義谷)이라 불렀다.
* 양사직골 - 양사곡산 밑 골짜기에 사자앙천형(獅子仰天形)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오는 산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앙사자곡이라고 부르다가 뒤에 양사곡(兩獅谷) 또는 양사직골이라고 불렀다.
* 가맛골 - 안말 동남쪽 적오산(덕진산성) 가는 골짜기에 솥가마처럼 생긴 바 위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참설 정감록에 따르면 난리가 났 을 때 가마골에 몸을 피하면 난리를 피할 수 있다는 피난처이다.
* 분톳골 - 새말 돈의골 옆 골짜기에서 분토가 나온 골짜기라 분톳골이고, 문 화류씨들이 안말에 자리를 잡기전 처음 자리잡았던 골짜기라 본톳골 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분톳골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 밤나뭇골 - 안말 북쪽 골짜기에 밤나무가 많아서 부르던 이름이다.
* 삼밭골 -새말 동북쪽 덕진 가까이에 옛날에 삼밭이 있었으므로 불렀다.
* 서낭당골 - 안말 서북쪽 골짜기에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당골로 불렀다.
* 마밧골 - 재밑 북쪽 골짜기의 토양이 마를 심으면 잘되는 골짜기라 마밭골 또는 마밧골이라고 부른다.
[들]
* 가양치 - 가양동마을 앞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들이라 가양치라 부른다.
* 가는골 -새말, 돈의골 서쪽에 들이 가늘게 펼쳐진 들이라고 해서 부르는 들 이다.
* 구렛들 - 양사적골 앞에 펼쳐진 들이 옛날부터 물이 많아 물 걱정 하지 않 아도 농사가 잘된다 하여 구랫들이라 부르고, 수량이 풍부한 들을 구 레라고 부른다.
* 음지평 - 재밑 앞에 태양의 빛을 다른 들보다 적게 받는 지형이라 음지평 또는 음지들이라 불렀다.
[바위]
* 평풍바위 - 덕진산성 말바위 서쪽에 바위가 평풍처럼 두른 바위라 하여 평 풍바위라고 부른다.
* 말바위 - 덕진산성 꼭대기에 말바위가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 바위로 인 하여 마을에 액운이 자주 일어나 액운을 없애기 위해서 방퍄맥이로 철마 다섯필을 다위에 세워 액운이 없어졌으나 다른 마을에서 액운이 끼기 시작해 마을끼리 상의를 하고 금병산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놓았 더니 그 후부터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금병산의 지기가 말바 위 쪽의 지기를 누른 탓이라고 1년에 한 번씩 금병산에 올라가서 산신 제를 지냈었다. 그러나 그 철마는 1942년 대동아전쟁때 일제들이 철물 공출을 장려할 때 약탈해 가서 없어지고 지금은 바위만 남아있다.
* 안장바위 - 말바위 뒤쪽에 말안장같이 생겼다고 해서 안장바위라고 부른다.
* 돌채바위 - 방아고개 위쪽에 돌채바위가 있는데 처음에는 디딜방아의 방아 채를 닮은 바위라고 해서 방아바위라고 부르다가 돌로 돌리는 방아를 더욱 닮았다 해서 돌채바위라고 부렀다고 한다.
* 삼현대(三賢臺) - 덕진산성 아래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송시열, 송준길, 이 유태 세 현인이 틈을 내어 시를 읊고 놀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故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 추억이 묻어나는 선짓국 (0) | 2017.12.21 |
---|---|
충남금성중학교 총동문회 창립 (0) | 2017.10.30 |
금성 8리 물길을 따라서 (0) | 2017.09.26 |
쑥스러운 고백 (0) | 2017.09.11 |
충남금성중학교 학구(學區) (0) | 2017.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