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평리(官坪里)
관평리는 북쪽 보덕봉을 중심으로 뭉게구름 같은 산악지대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좁아지고 낮아져 들의 영역이 많다. 또 지형은 희한하여 꼭 여인의 고운 버선과 같고, 그 버선 위에 푸른 색실을 놓은 듯이 관평천이 흐른다. 그래서 연안김씨(延安金氏) 14世 후(垕)가 1627년 무렵 낙향하여 세거하니, 여기를 동쪽의 꽃밭이라고 자칭했나 보다.
조선시대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 1760)에 의하면 동화울 가호 수는 70호에 220명이 살았고, 개발되기 전 1981년에는 173가구에 949명이 살았었다.
[마을]
* 관평(官坪) - 관평리 동쪽에 관들 또는 관평이라 부르는 들에 마을이 있어서 관평이라고 부른다.
원래 여기에 관평은 관평(官坪)이라 하지 않고 관평(管坪)이라고 불렀다. 즉 관에서 관리하는 전답이 있는 들에 마을이 있다 해서 관평이라 부르고, 윗마을을 윗관평 아랫마을을 아랫관평이라 부른다.
* 배울 - 관평리 안터마을 동북쪽 골짜기에 마을이 행주형(行舟形)의 형국이라 배울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 안터 - 관평리 동아울마을 서북쪽에 마을로 안씨(安氏)가 150년 전부터 터를 잡아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안기(安基) 또는 안기리(安基里)라고도 부른다.
* 동화울 - 안터마을 동남쪽으로 관평천 가에 있는 마을로 동화울 또는 동화동(東華洞)이라 부른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오는 관평천이 동쪽으로 물굽이를 돌리고, 다시 동북쪽으로 물구비를 돌리는 지형이 동아(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덩굴식물)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400여 년간 연안김씨의 한 집안이 터를 잡고 살면서 들이 좋고 기름져서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동화리(東花里), 즉 동쪽에 꽃이 피는 동네라고 부르다가 뒤에 동화동(東華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1760년의 기록에는 동화리(東花里)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가 깃들은 마을이다.
[고개]
* 안터고개 - 안터마을 동남쪽으로 오룡이로 넘어 다니는 고개라 하여 안터 고개라고 불렀고, 오룡이 마을에서는 오룡재라 부르는 고개이다.
[골짜기]
* 연양골 - 동아울마을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부터 연안김씨들이 많이 살았던 골짜기라 연안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연양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이다.
* 통면 - 안터마을 북쪽에 골짜기가 여러 면으로 트였다 하여 통면이라 불렀다.
[들]
* 관평들 - 관평마을 아래에 넓은 들을 관평들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관평들 동쪽에 경작지가 아닌 모래들이었는데 제방둑을 쌓아서 아랫관평들 이다. 또 관평들, 아랫관평들, 시알들, 갈마루를 합하여 시알들이라고도 부른다.
* 하들 - 관평리 동북쪽 갑천변 냇물 아래쪽의 들이라 하여 하평(下坪)이라고 부른다.
* 관들 - 관평마을 앞에 관아(官衙)에서 직접 관리하고 양곡을 경작하는 전답(田畓)이 있었던 들이라 해서 관들이라고 부른다.
* 갈마루 - 아래관들 동북쪽 하들 북쪽에 있는 들인데, 옛날에는 갈대가 많이 자라던 들이라 갈마루, 갈들이라고 불렀다.
[하천]
* 관평천 - 금병산 덕진마을 중골고개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덕진 북쪽 소류지를 조성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며 덕진과 내동의 넓은 들을 적시고, 관평 동화울에 이르러 물굽이를 동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가면서 관평과 용산에 들을 조성하면서 2.9km를 흘러 갑천과 합류하는 냇물이다.
[민속]
관들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사흗날 만동샘에서 용왕재를 지냈고, 신목에서는 거리재를 지냈다.
또 관들마을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남, 여 두레가 성행하였다.
[고적]
* 동아울 유적지 - 동아울마을 뒷산 구릉에 해발 70~80m의 지점에서 회청색 경질토기가 수습되었다. 백제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때의 고분군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 배울 유적지 - 배울마을 남북쪽 두 구릉 사이에 낮은 골이 동서로 길게 나 있는데 그 끝자락 지점에 삼국시대 초기의 회백색 연질 토기편과 반달칼 파편이 수습되었다.
[주(註)]
관평리는 이름처럼 평야지대가 많다. 갑천을 끼고있는 관평리는 지형에서 보듯이 갑천변 북동 방향은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고, 남서 방향은 낮은 산악지대로 길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기름지고 살기좋은 곳으로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람들이 정착했고, 조선시대 한 문중(門中)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듯 하다.
또 근래에는 학교와 마을의 원근(遠近)으로 인해서 초등학교 학군이 갈려서 윗관평, 아랫관평마을은 구즉초등학교에 배울. 안터. 동화울마을은 탄동초등학교에 진학 하였고, 또 그로인해서 중학교도 학군이 갈리는 지역이다.
지금은 드넓었던 관평들은 정부 시책사업과 사업으로 변모하여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안터. 동화울마을은 옛 지형이 조금이나마 간직한 체 변화하고 있다.
2018. 12. 28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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