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잉씨잉~
쥐불놀이 깡통에 풀무질하듯이 불이 피어나는 소리가 어우러져, 큰 원을 그리며 정월 대보름 달빛 아래 혜성처럼 돌아간다.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 자운리,
내 고향 느러리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마을 뒷산에 산지장이라고 부르는 산제당(山祭堂)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 산신 하강일(山神 下降日)에 마을에 부정(不淨)이 없는 남녀 내외를 제관(祭官)으로 선정하여 마을의 무사태평을 바라는 산신제를 지냈다.
또 마을 앞 논 가운데 12자 크기의 갓을 쓴 선돌이 있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날 큰 차일(遮日)을 치고 마을에서 선출한 제관과 축관이 마을의 풍년을 바라는 돌성제를 지냈다.
그런가 하면 마을 앞에 300여 년 된 마을 당산나무인 팽나무에 금줄을 드리우고 할머니들이 치성(致誠)을 드리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 돌성제를 마친 마을 사람들은 제단을 돌며 풍물놀이인 사물(四物), 꽹과리. 징. 북. 장구를 두드리며 한바탕 흥을 돋우고, 마을 공동우물을 찾아다니며 “뚫으세~ 뚫으세~ 물구녕을 뚫으세” 외치며 가뭄 없이 샘물이 펑펑 나오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는 며칠 전부터 깡통에 못 구멍을 내고 철사로 끈을 매달아 쥐불 깡통을 만들어 쥐불놀이를 해왔다.
쥐불놀이는 아직 한기(寒氣)가 남아있는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날 절정에 이른다.
이른 저녁을 먹고 쥐불깡통 하나씩 들고 마을 앞을 지날 때, 마을 어귀에서 지성(至誠)으로 거리제를 지내시는 무열이 할머님(여흥민씨, 선친의 외조모)을 뒤로하고 논두렁으로 향한다.
낮에 모아 두었던 마른 소똥과 나뭇가지에 마른 풀잎으로 불을 붙여서, 쥐불 깡통에 담아 줄을 잡고 돌리면 소똥에도 나뭇가지에도 금방 불이 붙는다.
하지만 소똥이나 나뭇가지는 오래가지 않고 바로 타 버린다.
쥐불놀이에 제일 좋은 재료는 일명, 고주배기인데 밭둑, 논둑이 무너지지 말라고 박아 놓았던 굵은 말뚝이 썩어갈 때쯤에 발로 차서 부러지면 쥐불놀이의 화목으로는 최고였다.
쥐불놀이의 절정은 둥근달이 중천에 뜰쯤, 고주배기가 타서 쥐불 깡통에 숯불이 꽉 차, 빨리 돌리면서 쥐불 깡통을 원심력으로 동시에 하늘로 던지면, 솟구치던 쥐불 깡통이 거꾸로 잠깐 멈추면서 그 안에 있던 숯불이 아래로 불빛을 머금고 쏟아진다. 밑에서 보면 은하수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 같아 “와~”하는 환호성과 함께 그해의 쥐불놀이는 끝이 난다.
우리는 한바탕 쥐불놀이에 허기가 밀려올 때쯤 보름 밥을 훔쳐 먹었다.
밥을 훔칠 때에는 철칙이 있었다. 자기 집에는 다른 친구가 훔쳐오고, 들키지 않아야 하며, 밥이나 반찬(나물) 이외에는 절대 손대지 않는 것이었다.
집집이 어머니들은 저녁 오곡밥을 해 먹고, 한 그릇씩 식지 말라고 가마솥에 넣어 두셨다. 그 밥을 아무리 조심을 해도 캄캄한 남의 부엌에서 가마솥 뚜껑을 열고 밥을 훔치려면 소리가 났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시는 미덕이 있었다.
각자 훔쳐온 보름 밥과 나물을 큰 함지에 넣고, 싹싹 비벼 먹으며 어둠 속에서 보이는 친구의 숯 검댕이 얼굴을 보며 서로 놀리곤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곤한 잠에서 깨어나 학교 가는 길, 전날 저녁에 무열이 할머님이 거리제 지내시던 장소에는 타고 남은 재가 있고, 그 재를 헤집으면 어김없이 십 원짜리 누런 동전 대여섯 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날 집에 올 때는 친구들 입안 가득히 즐거움을 주었다.
정월 대보름이 돌아오는 이맘때가 되면,
오십여 년 전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2016년 2월 18일
아름드리 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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