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지후사공파, 첨추공종중(충북 진천)의 입향조 헌민(獻民-20세)의 장자는 희문(熙문)이고 공의 5세 손 의직(義直)은 유복자로서 출생한지 몇달이 못되어 모친마저 별세하여 거두어 기를 사람이 없었는데 여비(女婢) 개덕(介德)이 고민끝에 그 남편 끝쇠(末金)에게 이르기를 "아기님를 살이지 못하면 류씨가문은 절손될 것입니다." 하고 "아기님보다 이틀 전에 나은 내 자식이 있으니 정이 그리로 기울어질 것이니 나와 자식사이의 정을 떼기 위해서 당신은 자식을 데리고 구멍골로 가서 기르되, 10년간은 만날 생각을 마시요" 하고 헤어진 다음 그날부터 개덕은 후원(後園)에 단(壇)을 모아 밤이 되면 참기름불을 켜놓고 천지신명께 지성으로 축원하여 아기님 보양(保養)에 전력하였다.
아기님이 차츰 성장함에 유학자 채봉암(蔡鳳巖)선생에게 수학을 간청하니 선생은 개덕의 지행을 흠탄(欽嘆)하고 쾌히 승락하였다.
공은 재화영오(才華穎悟)하여 학문이 숙성하였다. 개덕은 공이 성장함에 따라 재산과 재물 일체를 인계해주고 안동권씨 가문에서 취혼(娶婚)케 하여 5남 3녀를 두게 되었으며 사복시정(司僕시正)에 증직을 받게 되었다. 향인(鄕人)들은 개덕의 충절을 찬양하여 여러번 충비(忠婢)) 포창(褒彰)이 있었다.
개덕의 묘는 이곳 옥성리 무사골 류씨 선산에 안장하고 류씨 후손들이 조상처럼 모시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 종중에서는 개덕의 후손을 찾고 있지만 알 수 없어서 심히 아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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