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종보 - 추가 논의
- 류주환, 2011. 3. 3.
1. 설원기를 배제한다면 가문사(家門史)가 상당부분 바뀌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진실이라면 그것이 당연한 순리이지만, 세상에는 진실을 밝히는 것을 싫어할 사람들도 없을 수 없는 법이라서 성심으로 잘 살피고 있다. 또한 결국 문헌이란 것이 사실과 완전 동일한 것이 아닌 한에는 믿음이나 타당성의 차원의 문제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논의를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항으로 제한하려 노력하고 있다.
2. 원파록 삭제: 류문은 공식적으로 원파록을 모두 배제하였다. 이것은 가장 비중이 큰 설원기의 내용뿐만 아니라 류용수와 왕배조의 계보도 배제함을 의미한다.
원파록의 삭제는 문화류씨 족보(2008 무자보)에 "원파록삭제변"이라 하여 상세히 그 내력이 실려 있고, 그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다. (http://moonhwaryu.kr/ > 뿌리탐구 > 6. "2008 문화류씨세보(世譜):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
그리고 필자가 상세하게 류용수와 왕배조의 계보가 배제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해 놓은 글은 http://kenji.cnu.ac.kr/ryu/roots2/20101121-jongsa.htm ("몇 가지 종사(宗事) 관련 사항", 2. "원파록의 남은 문제")이다. 위의 내용들은 여기에 반복하지 않았다.
3. 원파록을 처음 실은 문화류씨 족보 기사보(1689년)에도 후손들의 주의를 상기시킨 대목이 있어 당시에도 원파록을 검토 대상으로 여겼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기사보의 앞부분에 들어가는 범례에 들어 있다. 범례에는 여러 항목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군데에 실려 있다.
1. 源派之圖雖似茫昧難知而姑存之以備後考 "원파(源派)의 계도(系圖)는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아 알기 어려우나, 잠시 그대로 두어 뒤에 살필 수 있도록 갖추어 놓는다."
1. 柳龍壽則子孫失其世系而亦不載大譜無乃與柳智源論源派者乎 "류용수는 자손들이 그 세계(世系)를 잃어버렸고 또한 대보(大譜)에도 실려 있지 않는데, 어찌 류지원과 원파(源派)를 논할 수 있던 자이리오."
실제 족보에서 범례는 중요하다. 족보의 편집 방향과 입장을 밝히고, 족보의 체재를 설명해 주기도 하고, 기록의 각 부분의 표현에 따라 그 각각을 어떤 정도의 비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정의해 주기도 한다. 위의 범례 항목들 중 첫 번째 것은 족보 편찬자가 원파록을 실으면서 그대로 믿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뒤에 살피라"는 말은 흔히 족보의 서문이나 논하는 글 등의 말미에 상투적으로 들어가지만 범례에 나와 있을 때는 그런 상투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후에 사람들이 더 살펴보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은 더 심하다. 류용수라는 인물이 신빙성이 없음을 심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이런 표현에도 불구하고 원파의 내용에 경도(傾倒)되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된 연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앞에 언급한 필자의 글 "원파록의 남은 문제"에 들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권문해, 곧 "대동운부군옥", 곧 "차원부설원기"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권위가 땅으로 추락했으니 결론은 자명하다.
잠시 더 논의해 보자면, 설원기는 왕수긍이나 그 위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왕씨에서 분파한 후손의 세계"(分派王氏之後系, G99)라는 말이 쓰인 것을 보면 이미 왕수긍에서 내려오는 계보를 지칭하고 있다. 왕수긍은 황제(黃帝)의 후손이라 설명되어 있으므로 황제까지의 계보가 완성되는 것이며, 계보의 빈 구멍들을 이미 알려져 있던 황제 등에 대한 사실들과 한참 후에 조작되어 나온 왕배조의 강남보가 메워 준 것이다.
여기서 왕수긍은 대체 실존 인물인지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논의가 약간 넓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왕수긍도 원파록의 근거가 되는 어떤 문서, 곧 설원기의 본문과 응제시(이예장이 지은 것으로 조작된 것)에서 그 일부를 인용하면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 채 '왕씨에서 분파되었다'고만 말하고 있는 그 문서에서 처음 조작된 인물이라 보고 있다. 왕수긍에 대한 묘사는 "증보문헌비고", "청장관전서"(이덕무, 1741~1793),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조선 후기의 학자 오주 이규경(李圭景, 1788~?)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 "연려실기술"(이긍익(李肯翊) 1736-180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정약용, 1762-1836), "대동운부군옥"(1589년, 권문해) 등에 나오는데, 이들을 모두 살펴보면 오직 "대동운부군옥"과 "원파록"이 출처이다. (상세한 것은 생략하였음.)
설원기에 류씨와 차씨는 왕씨에서 분파된 것이라 묘사되어 있고, "군옥"의 문화류씨 항목이나 연안차씨 항목에 대승공 류차달의 조상이라고 하는 차몽일(차무일의 오기(誤記). "군옥"에서는 차몽일이 후에 류몽일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음: 車蒙一後變車爲柳蒙一)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는 "군옥"이 원파록을 잘못 옮겼음이 보인다.)
"군옥"에 나온 왕수긍의 묘사 자체에는 차씨와 류씨와의 연관성이 나와 있지 않다. 대신 "군옥"에서는 두 집안의 조상으로 차몽일(차무일의 오기(誤記))을 들고 있고, "그의 연대나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 권문해로서는 왕수긍, 왕몽, 황제 등과의 연관성까지는 제시하기 무리였다고 생각하였거나, 모든 것을 다 실을 수는 없으니 취사선택을 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한편 "군옥"은 "왕건이 왕수긍의 후손인 왕몽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라 묘사하고 있는데, 왕몽이 왕수긍의 13세손이라는 것은 지금의 원파록에서 왕수긍을 25세로 하여 왕몽이 58세로 되어 있어 다르지만(후자는 아마 강남보에서 보완했을 듯), 그것은 원파록에서 왕몽은 곧 차무일이라 하는 것과, 그 셋째 아들이 왕건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 등의 묘사와 완전 합치한다. 이것은 또한 원파록 자체에서 류지원의 말에 그대로 나오고 있는 사항이다. 참고로 원파록에 류지원은 임진왜란 때 류용수라는 사람에게서 그런 계보를 얻었다고 되어 있다.
결국 원파록과 차원부설원기는 서로 부합되며, 현재 제기된 문제들의 주범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설원기에서는 예를 들어 왕수긍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왕씨가 조상임만을 언급하고 있고, 나아가서 황제와의 연관성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여러 사항들을 종합하면 원파록과 설원기는 동시대에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나아가서 논리적으로 자연스레, 원파록도 설원기의 위작자가 설원기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는 다음과 같은 단정적인 말을 하고 있다.
"기자가 동쪽으로 온 초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왕수긍을 천거하여 사사로 삼았다고 하는데, 살펴보니 이것은 위서(僞書)에서 나온 것이다. 왕씨가 성으로 된 것이 주나라 영왕(靈王) 태자 진(晉)에서 나온 것이다. 기자의 때에 어찌 그 성이 있었겠는가." (與猶堂全書, 第一集雜纂集第二十三卷 文獻備考刊誤, 職官考)
여기서 정약용이 인용하는 구절이 "箕子東封之初. 國人擧王受兢爲士師."인데 확인해 보니 이것은 원파록의 구절 그대로에서 글자만 몇 개 줄인 것이다. 곧 정약용은 원파록이 위서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문헌인 "청장관전서"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왕수긍과 왕몽이 들어간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4. 설원기 위작자: 오산선생 관련은 저속한 학자들이 내린 결론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주: 위서 설원기의 위작자를 추정할 때 오산공(차천로)이 먼저 거론되는데, 이것을 매도한 일이 있어 답변하는 것이다.]
우선 간곡히 바라건대 매도하는 표현들은 자제해 주기를 바란다. 매도하는 사람의 양식만 의심받을 일이다. 박은정의 "한국사론" 논문에서도 "위작자로 판단되며, 동시에 이 문건을 처음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차식, 차천로..."라고 못을 박고 있다. 학위논문은 지도교수의 지도와 연구를 통해 작성되는 것이고 (통상 학위논문은 지도교수가 주역인 경우가 많다) 심사위원들의 검토와 승인 없이는 수여될 수 없다. 박은정의 논문은 원래 서울대 학위논문으로 나온 것이어서 그 배경에 서울대 교수들이 있는데, 위작자를 어떤 사람으로 추정한다 해서 매도하기 시작하면 서울대도 매도해야 하고, 역사학자들도 매도해야 하고, 조선시대 문인들도 매도해야 한다. 역사적 진실을 논하는 데 어린아이이면 어떻고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이면 또 어떤가. 근거와 논증만이 중요한 것 아닌가.
차문(車門), 특히 오산공의 후손들은 필자를 포함해서 이수건 교수와 김난옥 박사의 논문에서 위작자에 대한 추정을 하면서 든 근거들을 조목조목 따져 상세히 반박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예를 들어 그 근거들 중 하나인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부정적인 묘사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직접적인 반박이 없었다. 필자가 누차 말씀했듯이 지금에 와서 그 누구라고 해도 오산공이 설원기의 위작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그런 확신은 얼마든지 표시할 수 있는 당위성은 있다. 앞으로 오산공 위작자설에 대해 종합적인 반박이 나오면 다시 논의해 보겠다.
한편 오산공이 웅대한 뜻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문재(文才)를 나라를 위해 바쳤고 출세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그가 위작자로 논의되는 것조차 거부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사람은 다원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시기마다, 상황마다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허균만 해도 "홍길동전" 같은 혁명적인 글이나 선(仙)에 관계되는 글이나 "한정록" 등을 지어 인간평등의 세상을 꿈꾸고 벼슬에서 물러난 한가한 세상을 추구한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가장 혼탁한 정치판에서 생을 마감했다. 허균을 언급한 것은 그가 오산공과 동시대의 인물이고 그도 폐비문제에 깊이 관여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허균은 정치의 중심에 있었으며 오산공은 비껴 있던 것이다. 실록은 광해1년(1609년)에 사헌부의 탄핵을 기록한다. "신들이 삼가 평안도 암행어사의 장계를 보니, 제술관(製述官) 차천로(車天輅)·양경우(梁慶遇) 등이 삼가지 않고 사치스럽게 한 정상이 비단 풍문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접사 류근(柳根)이 이를 듣고서 책하기까지 하였는바, 그간의 일과 상황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광해2년(1610년)에는 오산공이 임금에게 휘호를 받아들이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기록한다. 이 기사에 대한 실록 기자(記者)의 평이 주어져 있는데 이렇다. "천로가 왕이 세자로 있을 때 무군(撫軍)한 행적이 있었다 하여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했는데, 이것이 아첨하며 호를 올린 시초이다. 대체로 천로는 재주는 있어도 행실이 형편없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륙문(四六文)을 가지고 이이첨(李爾瞻)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런 논을 앞장서서 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산공이 글을 잘했다고 해서 설원기의 위작자로 거론되는 것이 심히 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실은 그가 글을 잘했고 그것도 천재적이었기에 설원기의 위작자로 가장 먼저 추정되는 것이다. 설원기의 현란함과 정교한 역사성의 위장을 보면 겨우 글을 깨우친 사람을 위작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의 솜씨나 일관성을 보면 설원기의 서문, 본문, 그리고 응제시들은 모두 한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천편일률적인 응제시와 본문의 주석들은 서문-본문-응제시를 지은 사람과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일 수도, 같은 사람이 지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설원기가 처음으로 언급된 구봉령의 "백담집"의 글(1583년)에서도, 그리고 설원기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대동운부군옥"에서도 설원기의 주석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 주석은 본문의 주석뿐만 아니라 응제시의 주석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차승색'의 항목에 이예장이 지었다고 조작된 응제시의 주석의 구절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군옥"에는 필자가 확인한 것만 해도 30여건의 설원기 관련 인용이 되어 있다. 이것은 설원기가 세상에 나올 때는 이미 현재의 체재(서문-본문-응제시-주석들)를 그대로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주석을 단 사람과 서-본-시를 지은 사람은 동일인이라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류몽인이 차식 공의 신도비명을 지을 때 오산공은 이미 사망하고 차운로(창주공)가 살아 있는 상태였고, 신도비명은 설원기의 내용이나 원파록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황제연원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 몇몇 차이점이 보이며, 특히 원파록에는 왕조명의 후손이라 되어 있는데, 신도비명에는 유루의 후손이라 되어 있음.) 비석의 세움에 있어 그 내용은 해당 집안의 기록을 참조하여 짓는 것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창주공이 적극적으로 그 황제연원설의 내용들을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 때문에 필자는 창주공을 위작자로 가정해 보기도 했다. 류몽인이 묘비명에서 찬송한 바와 같이 창주공 역시 뛰어난 문장가였고, 오산공보다 3세 아래지만 설원기가 세상에 나올 즈음에 이미 문재가 드러났고, 오산공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묘사들이 실록에 있어 오산공이 위작자로 가정되는 조건에 창주공도 모두 맞으며, 자신이 류씨와 동원(同源)이라는 표현도 그 문집에 하고 있고, 선조(先祖) 차원부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시도 썼고, 선고(先考) 차식의 신도비명 작성에도 직접 관여했음을 보면(차문에서 출판한 "차문문헌 제2집, 이재공차원부신도비명"의 설명을 보면, "이재공 신도비명은 ... 유몽인공이 찬하였으나, 실지는 이재공의 아들인 창주공 휘 운로께서 만드신 비문인 것이다"라고 평해놓고 있다) 더 조건이 좋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설원기의 문장의 현란함에는 오산공 이외에는 위작자가 있기 어려워 보인다.
사람들이 위작설을 제기한 경우 그 위작자의 범위로 차씨3부자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 '차씨3부자' 역시 여러 정황들을 고려한 추정이다. 그리고 설원기가 세상에 나온 시기와 맞추어 보면 오산공이나 창주공으로 좁혀진다. 그리고 당연히 더 추정한다면 자연스레 오산공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위작자를 말할 때 현재로서는 100% 단정할 근거가 없으므로, 최대로 해보았자 '단정적 추정'일 따름이다. 수 백 년 동안을 허다한 유학자들이 그 진면목을 깨닫지 못하게 할 만큼 정교하고 현란한 문장과 작품을 만들어내고도 자신의 문재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어떤 은사(隱士)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고 또 다른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가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추정이 그런 추정들보다는 훨씬 그럴 듯하다는 것일 따름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설원기가 위작이라 논의될 때마다 그럼 위작동기는? 위작시기는? 위작내용은? 등의 질문과 함께 위작자는? 의 질문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앞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고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추정 내지는 단정적 추정들을 제시할 것이다. 차천로의 위작설을 배척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추정이기에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추정의 근거들을 조목조목 반박해서 제시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며, 추정하는 사람에게 추정을 철회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5. 박은정의 "한국사론"(2010년) 논문에 차식 공과 차천로 오산공과 교류한 문인들의 기록에는 설원기의 내용이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거기 언급된 인물들 중 전우치는 논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인물이고 양사언(1517-1584)도 설원기가 세상에 나올 때쯤 죽었으니 대략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한석봉(1543-1605), 김성일(1593-1658), 이수광(1563-1628), 윤두수(1533-1601)는 설원기가 명확하게 다루어진 "대동운부군옥" 출간(1589년) 이후에도 생존했기 때문에 설원기나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이 한 번쯤 있을 법도 하다. 물론 언급이 있었어도 기록이 전해오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김성일은 "군옥"을 공간(公刊)하려고 했었다는 말을 보면 그 안에 산재한 설원기 내용을 보았을 확률이 크다. 박은정의 논문에서는 저들이 설원기에 대해 언급한 흔적은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 발언은 추가 확인하긴 해야겠지만 사실일 것이다.)
오산공과 수많은 시를 주고받은 이수광의 대표작인 "지봉류설(芝峯類說)"을 보니 차씨의 내력에 대해 기록한 것은 "성족(姓族)" 항목에서 "소문에는 차씨에 정승을 지낸 이가 없다는데 역옹패설을 살펴보니 차약송이 평장사였다. 따라서 그런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부분만 있었다. 참고로, 류씨에 대해서도 "고려 태조 때 류달(柳達)이 수레를 이용해 군량을 날라서 차달이라고 사명(賜名)했다."라고만 되어 있다. ['류달'이라는 이름은 다른 아무 데도 나오지 않는 잘못이다.] "지봉류설"의 인물부(人物部) 절의(節義) 항목쯤에 차원부가 언급되었을 법도 한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박은정은 따라서 설원기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추정을 내리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탐구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혹여 당시의 정치역학 상 중앙이나 다른 지역의 학자들은 절개의 명분에 매달릴 필요나 요구가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산공 자신도 류차관계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알려주길 부탁함.) 차식 공의 신도비명이 오산공의 사후에 나왔지만, "군옥" 등에서 보면 공의 생전에 이미 설원기가 세상에 널리 퍼진 상태였다. 오산공이 설원기를 몰랐을 리 없는데, 미스터리이다. 다소 이상한 이 사실 역시 오산공의 설원기 위작설의 배경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추가 고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2011. 3. 3. 翰軠 류주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