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柳氏일반

아름드리 블로그 2010. 12. 30. 17:40

 

강남류씨(江南柳氏)

강남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852가구 5,72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진류씨(康津柳氏)

강진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7가구 1,58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거창류씨(居昌柳氏)

거창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817가구 5,4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류씨(慶州柳氏)

경주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197가구 6,87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령류씨(高靈柳氏)

고령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6가구 1,4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흥류씨(高興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흥 류씨 (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류 영 (柳 英)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 : 지추밀원사 승무의 아들)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삼한삼중대광 도첨의 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政丞)에 올라 고흥부 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고흥(高興)으로 하게 되었다.

  고흥 (高興)은 전라남도 남동단(南東端)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초에 고이부곡(高伊部曲)이라 하였으며, 1285년(충렬왕 11)에 고흥현(高興縣)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보성군(寶城郡) 조양현(兆陽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441년(세종 23)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바꾸고, 보성군 남양현(南陽縣)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興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고쳤으며, 1914년 고흥군(高興郡)으로 개칭하였다.

  가통(家統)을 이은 인맥(人脈)으로는 청신의 손자 장(莊)과 탁(濯)․준(濬)이 유명했다. 예빈윤(禮賓尹) 천(  )의 아들인 장(莊)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일찌기 할아버지 청신이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두는 천안의 명물(名物)이 되었으며, 판밀직사(判密直司) 유기(有奇)의 아들로 고려 말에 기 재(奇才)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탁은 < 장생포곡 (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濬)은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高興柏)에 봉해졌으며 정종(正宗)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한편 맏아들 습(濕)은 태종(太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禮) ․형(刑)․병(兵)․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했고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우군원수(友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 어,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구월산(九月山) 적(賊)을 토벌하여 형조판서(刑曹 判書)에 오른 세웅(世雄 : 효백의 아들)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고, 「 어우야담 (於于野談) 」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 도 뛰어났으며,

조선(朝鮮) 중기의 설화 문학(設話文學)의 대가(大家)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 상부사 (孀婦詞)>라는 시(詩)로 인하여 아들 약(瀹 : 형조, 공조 좌랑을 역임)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의신(義臣)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전사한 춘필(春苾)이 유명했고 < 일문삼의사 (一門三義士)>로 일컫어졌던 경인(景仁), 성인(成仁), 극인(克仁)은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고종(高宗) 때 명정(命旌)되어, 칠산양(七山洋)에서 일가족 이 순절한 익겸(益謙)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외 형제 호당(湖堂)으로 이름났던 숙(潚)과 활(活)은 부정(不正) 몽표(夢彪)의 아들로서, 형인 숙은 대사간(大司諫)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의 심복이었다는 죄목으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되었으며, 아두 활은 경기 도사(京畿 都事)를 지냈다.

  숙은 증손 종흥(宗興)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거론되자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바당함을 주장하여 회심소(回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구국절의 (救國節義)의 인맥을 전통으로 삼은 고흥 류씨는 고종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강렬하게 주장했던 중교(重敎)와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 구성에 항거했던 인석(麟錫)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고, 병우(秉 禹)는 하동(河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의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단식으로 옥사했다.

  철종(哲宗) 때 가재(家財)를 털어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던 중권(重權)은 3.1운동 때 관순(寬順)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순절하였으며, 중화(重和)는 의병대장(義兵大長)으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 병을 크게 섬멸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선(永善)과 함께 명문 고흥 류씨를 더욱 빛냈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총 16,872가구, 53,9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주류씨(公州柳氏)

공주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4가구 1,9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광주(광산)류씨(光州(光山)柳氏)

광산은 광주의 별칭이다. 광주(광산)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25가구 3,26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해류씨(金海柳氏)

김해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3가구 1,00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주류씨(羅州柳氏)

나주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3가구 1,1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이 성본의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문안류씨

문안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31가구 5,30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문화류씨(文化柳氏)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高麗 開國功臣 柳車達)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다. 시조 류차달은 신라(新羅) 말기에 유주(儒州), 지금 황해도 신천국 문화면(黃海道 信川郡 文化面) 묵방동(墨坊洞)에서 태어났는데 가세(家勢)가 심히 부호(富豪)였다.
후삼국(後三國)시대에  왕건(王建)이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코자 후백제(後百濟)의 견휜을 정벌하려 할 즈음 군량이 부족하여 나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이 때 공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하므르써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高麗)를 건국, 태조(太租)가 되었다.

이에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호(封號)와 아울러 대승(大丞)의 관작(官爵)을 내리고  차달(車達)이라 사명하고, 관향(貫鄕)을 유주(儒州)로 하였다. 그러나 지명이 수차 변천하여 유주(儒州)가 문화(文化)로 개명(改名) 됨에 따라  문화(文化)로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연안차씨(延安車氏)와 의 동조이성(同祖異姓)이 위서(僞書) 및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의하여 사실 무근임이 판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문화 (文化)는 황해도(黃海道) 신천(信川)에 속한 지명으로 본래 단군 시대(檀君時代)의 당장경(唐藏京 : 단군의 네 아들이 황해도 구월산밑에 도읍을 정했던 곳)이었다. 그후 고구려(高句麗) 때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유주 (儒州)로 개칭하였고 성종(成宗 : 제6대왕, 재위기간 : 981~997)이 시령(始寧)이라는 별호(別號)를 내렸다.

  1018년(현종 9) 풍주(豊州)에 예속시켰다가 고종(高宗) 때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하여 조선 때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나 후에 신천군(信川郡)에 편입, 문화면이 되었다.


            氏族史 槪要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진 문화 류씨의 인맥(人脈)으로 소감(少監) 총(寵 : 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當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沉)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문화 류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언침(彦沉)의 후손에는 판관(判官) 안택(安澤 : 상호군 식의 아들)의 아들 관(寬)이 유명했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한 그는 고려조에서 20년간 벼슬하였고,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1393년(태조 2) 병조의랑(兵曹議郞)으로 출사하여 1429년(세종 9) 81세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4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35년간을 입사하여, 도합 55년동안 주요관직을 지낸 현신(賢臣)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그는 우의정(右議政)에 오를 때까지도 동대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는 초가(草家)에 살며 청백(淸白)함으로 역사를 수(繡)놓았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태종(太宗)이 낮에 가서 울타리를 하면 못하게 할 것 이므로 선공감(繕工監)을 시켜 밤에 몰래 가서 울타리를 둘러놓게 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집이 너무 허술하여 장마철이 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우산을 펴들고 부인과 더불어 비를 가리고 있으면서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하니, 이에 부인은 “우산 없는 집에는 다른 마련이 다 돼 있답니다”하여, 그가 웃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의 집에는 꽃나무 두어 포기가 있을 뿐이고, 집에 있을 때는 맨 발에 짚신을 끌고 손님을 맞이했으며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김을 매기도 하였다. 손님이 와서 술을 대접할 때는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는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 금 사발 하나로서 술을 치게 했고 술안주는 기껏 소금에 저린 콩자반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전곡이 하나도 없이 친지들이 추렴해서 장사를 지냈을 정도였으며, 집이 너무 초라하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우산에 비하면 이것도 과람하다”고 했다고 한다.

  관(寬)의 아들 중 계문(季聞)은 세종(世宗)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개성 부 유수(開城部留守)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태종이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명으로 안 지(安 止)․최흥효(崔興孝) 등과 함께「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을 썼다. 그의 아들 권(睠)은 참판(參判)을 지내고,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부자정승(父子政丞)으로 유명한 상운(尙運)은 좌랑(佐郞) 성오의 아들로 숙종 때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좌․우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英祖) 때 < 소론사대신 (小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이르렀다.

  한편 판예부사(判禮部事) 공권(公權)의 둘째 아들 택(澤)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경(璥)이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와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고종(高宗) 등 4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문하(門下)에서 안 향(安 珦)․이 혼(李 混) 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경의 손자 돈(墩)은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만수(曼洙)는 위화도 회군 때 공을 세우고 일등공신으로 찬성사에 올랐으나 제1차 왕자(王子)의 난 때 방원(芳遠)에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화를 당했다.

  1416년(태종 16)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정현(廷顯)은 문화공(文化公) 진(鎭)의 아들로 세종이 즉위하자 삼군 도통사(三軍都統使)로 일본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참전했으며 1426년(세종 8) 다시 좌의정에 이르러 차사한 후 4일만에 죽었다.

  태종과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그는 세종이 상왕(上王 : 태종)께 잔을 올릴 때 영돈령(領敦寧)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태종이 가죽 한 장을 하사하면서 “내가 변변치 못한 물건을 경들에게 주는 뜻은 가죽과 같이 장수(長壽)하라는 뜻이다”했으며, 술을 마시면서 옥잔(玉잔)에다 술을 부어주며 일체동심(一體同 心)의 뜻을 전했다. 정현이 죽었을 때 세종은 흰 도포에 검은 모자와 검은 띠를 매고 백관을 거느리고 금천교(禁川橋)장 막에 나오 곡을 했다고 한다.

  현감(縣監) 함(浛 : 찬성사 만수의 중손)의 아들 자미(自湄)는 세조 때 감찰(監察)을 지내다가 사육신(死六臣)이 화를 입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산수(山水)를 방랑하였고, 성삼문(成三問)의 딸을 몰래 데려다 숨겨서 길러 자부(子婦)로 삼았으며, 황해도 수양산 신광사(黃海道首陽山神光寺)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음에 이르러 유 언하기를 “내가 신하로서 임금에게 그리고 조상에게 아무런 보람있는 일도 못하고 죽지 못해 살았으니 선영곁에 뭍지도 말고, 또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사육신(死六臣)으로 유명한 성원(誠原)은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 하고 이듬해 저작랑(著作郞)이 되어「의방유취(醫方類聚)」편찬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단종(端宗)에게 거짓으로 보고한 후 이 거사 를 성공시킨 공신들을 표창토록 하는데, 수양의 협박에 못이겨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녹훈(錄勳)하는 교서(敎書)를 쓰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통곡했다고 하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마(洗馬) 사공(思恭 : 만수의 증손)의 아들 순(洵)은 연산군(燕山君) 때 영의정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에 올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시부 (詩賦)에 뛰어나 왕명으로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인종(仁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관(灌)은 태조 때의 우의정 양(亮)의 6세손이며 장령(掌令) 정수(廷秀)의 아들로서 인종(仁宗)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으나 소윤(小尹)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정순붕(鄭順朋)의 탄핵을 받아 서천(舒川)으로 유배도중 과천(果川)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세도에 아부하여 윤 임(尹 任) 일파를 제거시키는데 성공한 정순붕은 관(灌)의 가족들을 적몰해 자신의 종으로 삼았는데, 갑이(甲伊)라는 관(灌)의 여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를 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사도시정(司導寺正) 엄(渰)의 아들 광찬(光纘)은 관(灌)에게 양자로 들어갔는데, 관(灌)이 처음 귀향가게 되었을 때 장차 화(禍)가 혹심 하리라는 거을 알고 양자를 취소하는 문서를 만들어 주어서 노비가 되거나 살육당하는 화를 면하기도 했다. 마침 그가 양자로 들어온 후에 관(灌)의 소실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이것을 핑계삼으면 법으로는 인정되었다.

  그러나 관(灌)이 죽음을 당하고 그에 광찬이 연루되어 죽게 되자 집안 사람이 이 문서를 가지고 관가에 가서 죽음을 면해 줄 것을 빌려 했으나 그는 “한번 부자간으로 이름을 붙였으니 좋으나 나쁘나 달리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서 죽음에 임하여 조용히 편지를 써서 그를 낳은 어머니와 집안 사람에게 주어 작별하고 스스로 만사(輓祠)를 두 편 지었는데 내용이 어찌나 비절(悲切)하였던지 듣는 사람이 모두 슬프게 여겼다고 한다.

  광찬의 아내 신씨(申氏)는 모든 재산과 노비를 몰수당하고 홀로 형장에 들어가 부자(父子)의 유골을 주워 모아다가 함께 선산 밑에 장사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묘(墓)에 올라갔다.

   그외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진봉된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양(亮 : 밀직사 계조의 아들)과 선조 때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올라 문양군(文陽君) 에 봉해졌던 희림(希霖)이 유명했고, 현감 예선(禮善)의 아들 전(琠)의 영의정에 올라 가문(家門)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중종 때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낸 옥(沃)은 문무(文武) 겸비로 이름을 떨쳤으며, 현종(顯宗) 때의 실학자(實學者)인 형원(馨遠)은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고한 기품의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정조 때 북학파(北學派)에 속한 실학자로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등과 더불어 < 한문신파사가 (漢文新派四家)> 로 불리워진 득공(得恭 : 진사 관의 아들)>이 회고시(懷古詩)와 기행문에 능하여 이주원(李주元)으로부터 < 동국 (東國) 의 문봉 (文鳳)>이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기상(基常)은 헌종(憲宗) 때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올라 무명 (武名)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서다가 서흥(瑞興)에서 사형(死刑)당한 상렬(相洌)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결성에 참여했던 동열(東說)이 1935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김규식(金奎植)․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문화 류씨를 더욱 빛냈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문화 류씨(文化柳氏)는  총 87,186가구, 284,0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류씨(密陽柳氏)

밀양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6가구 1,23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배천류씨(白川柳氏)

배천류씨 시조는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 류인경(柳仁景)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21가구 2,2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부평류씨(富平柳氏)

부평류씨 시조(始祖) 류흥정(柳興廷)은 고려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고 알려져 있을 뿐 관련 문헌(文獻)이 없어 본관의 유래 및 세계(世系) 등은 알 수 없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부평류씨는 73가구 총 22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산류씨(瑞山柳氏) . 서령(瑞零)

서산류씨 또는 서령류씨로 불리는 시조 류성윤(柳成澗)은 문화류씨의 시조인 류차달의 9세손이다. 따라서 서산류씨는 문화류씨에서 분적된 성씨다. 시조 류성간은 고려 명종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저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서령(瑞寧)은 서산(瑞山)의 옛 이름으로 지금도 일부 후손들은 서령을 관향(貫鄕)으로 쓰고있다.

 

고려때 인물로는 류숙(柳淑), 류실(柳實) 부자가 유명하다. 류숙은 왕제(王弟)인 강릉대군(공민ㅇ항)을 원나라에서 4년간 시종했다. 그 뒤 판도판서, 추밀원직학사를 지냈다. 공민왕 5년 기철등 부원세력을 주살, 공신이 되었으나 후에 신돈에 의해 파직되었다. 류실은 공민왕 때 예의총랑에 이르고, 홍건적 침입 때 왕을 호종하고 흥왕사의 변을 진압하였다. 판도판서를 역입했으며, 전라도병마사로 왜구를 방어했다.

 조선 초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류방선(柳方善)은 류숙의 증손이다. 태종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그의 문하에서 서거정, 이보흠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류방선의 아들인 류윤경은 성종때 젊은 문신들에게 두시(杜詩)를 가르쳤다.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25권을 완성, 강희안의 필체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 국문학 사상에 큰 업적을 남겼다.

 류사(柳泗)는 삼사의 벼슬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류대춘은 경서와 문장이 능해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576가구 14,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산류씨(善山柳氏)

선산류씨 시조는 유원비(柳元庇)이다. 본래 문화류씨 류순(柳淳)의 아들인데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져 관향을 선산으로 옮겼다. 인물로 류영서(柳榮緖)는 낭장(郎將)으로 한 파를 이룬다. 류(柳)희(希)춘(春)은 문과출신으로 찬성(贊成)이었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며 한 파를 이룬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852가구 5,72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동류씨(安東柳氏)

안동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87가구 1,5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약목류씨(若木柳氏)

 

약목류씨(若木柳氏) 시조 류하(柳夏)는 사직단직(社稷壇直)을 지냈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문헌(文獻)이 없어 본관(本官)의 유래 및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약목류씨는 74가구 총 25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연안류씨(延安柳氏)

 

시조(始祖) 류종발(柳宗撥)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고 전하지만, 관련 문헌(文獻)이 없어 본관(本官)의 유래 및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다.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연안류씨는 195가구 총 62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영광류씨(靈光柳氏)

영광류씨 시조는 류언(柳漹)이다. 인물로 증손(曾孫) 류자환(柳子煥)은 문과충신으로 이조 참판 이었고 공신으로 오성군(茣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양공(文襄公)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8가구 1,4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육창류씨(陸昌柳氏)

 

시조(始祖) 류세영(柳世英)은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전해지지만, 관련 문헌(文獻)이 없어 본관(本官)의 유래(由來) 및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육창류씨는 20가구 총 6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동류씨(仁同柳氏)

인동류씨 시조는 류한(柳澣)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7가구 1,26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주류씨(全州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전주 류씨 (全州柳氏)는 문화 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의 9세손 상장군(上將軍) 순(淳)의 여섯째 아들 양자(良자)의 증손(曾孫) 습 (濕)이 고려(高麗) 말에 전주(全州)로 이거(移居)하여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고 완산백 (完山伯)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 (一世祖)로 하고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전주 (全州)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여,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경덕왕 : 제35대왕, 재위기간 : 742~765)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白濟)를 세워 40여 년 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 남도호 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全州府)가 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氏族史 槪要


  일세조 습의 아들 5형제중 둘째 극서(克恕)가 고려조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중현대부(中顯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 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빈(濱)과 손자 의손(義孫)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랐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서 문장(文章)이 뛰어나 남수문(南秀文) ․권채(權埰)와 더불어 < 집현전 삼선생 (集賢殿三先生)> 으로 일컬어졌던 의손(義孫)은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 황방산(黃方山)으로 내려가 시문(詩文)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우 신손(信孫)은 참판(參判)을, 말손(末孫)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한편 판관(判官)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成均館)에 재직하는 동안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공부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도학정치 (道學政

治)를 실현하려는 최초의 학자로서 문하(門下)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대학자(大學者)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연산군(燕山君) 때 삼사

(三司)의 벼슬에 있으면서 난정을 극간하는 만언소(萬言疎)와 임사홍(任士洪)․류자광(柳子光)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소(疎)를 올렸다가 제주도(濟州道)로 귀양보내지고, 화가 난 연산군은 사간원(司諫院)을 귀찮고 말이 많은 기관이라 하여 폐지해 버림으로써 헌은 연산조의 마지막 대사간(大司諫)이었다.

  그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 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말손(末孫)의 세째 아들로 중부(仲父)의 의손(義孫)에게 출계(出系)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忠 武衛副詞直)을 역임했고, 그의 손자 윤덕(潤德)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활약했던 영길(永吉 : 대사간 헌의 증손)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러 치사(致仕)했고, 그의 아우 영경(營慶)은 선조(宣祖) 때 소북파 (小北派)의 영수로 정유재란에 공(功)을 세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을로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 (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선조(宣祖) 말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세자로 옹립하려 했으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외숙(外叔)인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던 복립(復立)이 진주성(晋州城)을 방어하다가 함락되자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溢)과 함께 투신자결하여 충신정문 (忠臣旌門)이 세워졌고, 인조(仁祖) 때 전창위(全昌慰)에 습봉된 심(淰)은 송설체 (松雪體)로 유명했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질(秩)은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철원 부사(鐵原府使) 청병(淸兵)에게 살해 되었으며, 즙(楫)의 맏아들 경창(慶昌)은 인조(仁祖) 때 등과(登科)하여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현종(顯宗)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간(大司諫)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천문(天文)․지지(地支)에 정통했던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도 능통하여「 삼산문집 (三山文集)」과「 하락지요 (河洛指要)」를 저술했고, 의양(義養)은 정조조(正祖朝)에서「 춘관지 (春官志)」와「 영희전지 (永禧殿誌)」를 편찬하고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의 수찬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정조조에서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홍산(鴻山)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고 3․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준근(濬根)과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한 인식(寅植)이 가통(家統)을 이어 전주 류씨(全州柳氏)를 더욱 빛냈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 류씨는  총 19,008가구, 61,650명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주류씨(貞州柳氏)

시조(始祖) 류소(柳韶)는 고려 덕종(德宗) 때 태위문하시랑평장사(太尉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덕종(德宗)의 명으로 압록강 어구로부터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였다 하며, 후에 덕종실(德宗室)에 배향(配享)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련 문헌(文獻)이 없어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정주류씨는 217가구 총 67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진양류씨(晉陽柳氏)

진양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61가구 3,65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동향인 진주류씨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진주류씨(晋州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주 류씨 (晋州柳氏)의 시조(始祖) 류 정 (柳 挺)은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령(中書令)을 지내고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에 올라 진강부원군 (晋康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진주(晋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오고 있다.

  2세 숙(淑)이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으로 진녕부원군 (晋寧府院君)에, 3세 돈식(敦植)은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진원부원군 (晋原府院君)에, 4세 홍림(洪林)은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진양부원군 (晋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홍림의 아들 부(榑)는 진흥부원군 (振興府院君), 손자 간(玕)은 진성군 (晋城君)에 봉군되었으므로 6대(代)가 크게 현달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 표적인 인물로는 11세손으로 조선 세조(世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문통(文通)이 사간(司諫)을 거쳐 상주 목사 (尙州牧使)를 지냈으며「 청천유고 (靑川遺稿)」를 저술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인귀(仁貴)와 막내 인숙(仁淑)이 뛰어 났다.

  1495년(연산군 1) 문과에 인귀(仁貴)는 정언(正言)에 올라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회덕(懷德)으로 장류(杖流)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희령(希齡)은 중종(中宗) 때 등과(登科)하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라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일파로 몰려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 시부 (詩賦)에 뛰어났고,「 대동시림 (大東詩林)」과「 대동연주시격 (大東聯珠詩格)」을 찬술했다.

  한편 사인(舍人) 자빈(自濱)의 아들 우(藕)는 김굉필(金宏弼)으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성명(性命)․육경(六

經)․천문(天文)을 비롯하여 복서(卜筮)․율려(律呂)서화(書畵)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스승인 김굉필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죽음을 당하자 벼슬 을 단념 하고 학문에 전심했다.

  특히 그는 혼자 연구한 의술에도 능하여 어머니의 숙환을 치료했고 난세(亂世)에서도 화(禍) 한 번 당하지 않고 현명한 일생을 살았다고 하며, 그의 아들 조인(祖訒)은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平壤)으로 호종(扈從)하여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조의(祖誼)의 아들 진(縝)이 명종(明宗)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刑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태천(泰川)․단천(端川)․평창(平昌) 등지의 군수를 지냈으며, 선조 때의 명신(命臣) 근(根)은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진원부원군 (晋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대제학(大提學)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였다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 구(구)는 근(根)의 손자로서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진주군(晋州君)에 봉해졌으며, 사인(舍人) 영(潁)의 아들 명견(命堅)은 숙종 때 김석주(金錫冑)․김익훈(金益勳)에 등용되어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그의 아우 명천(命天)은 숙종(肅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나 장희재(張希載)와 공모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하려 했다는 무고로 아우 명현(命賢 : 이조 판서)과 함께 지도(智島)에 귀양갔다 돌아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찰방(察訪) 천근(天根)의 아들 도삼(道三)은 인조(仁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으며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진혁(進赫), 이조 참판 광주(光周),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원문(遠聞)․원록(遠祿) 등과 함께 진주 류씨를 빛냈다.

  2000년 인구조사 결 과에 의하면 진주 류씨(晋州柳氏)는 총 18,685가구, 60,1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원류씨(昌原柳氏)

창원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14가구 1,6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파평류씨(坡平柳氏)

파평은 파주의 별칭이다. 파평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37가구 172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풍산 (豊山)은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923년(고려 태조 6)에 이곳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한 공으로 순주(順州)로 승격하였다.

  후에 후백제 견훤(甄萱)에게 함락되어 다시 하지현이 되었으며, 풍산(豊山)으로 고쳐 현종(顯宗) 때 안동(安東)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다시 안동에 속하여 지금의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에 이르고 있다.

  풍산 류씨 (豊山柳氏)는 고려(高麗) 때 수주(樹州 : 경기도 부평의 옛 지명) 호장(戶長)을 지낸 류 절 (柳 節)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문화 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전한다.

  일찍이 영남(嶺南)의 젖줄기인 낙동강변(洛東江邊)에 자리잡아 명문의 위치를 지켜온 풍산 류씨는 일세조 절(節)의 7세손 종혜(從惠)가 조선 태조(太祖)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조부(祖父) 난옥(蘭玉 : 창평 현령을 지냄)과 부친 보(葆 : 고려 말 검교예빈경을 지냄)가 지어놓고 적선(積善)을 베풀었던 관가정(觀稼停)이 있는 하회(河回) 마을에서 풍산 류씨의 가맥(家脈)을 계승했다.

  가통(家統)을 지켜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진보 훈도(眞寶訓導) 공지(公智)의 손자 종개(宗介)가 임진왜 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태백산(太白山)을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봉화(烽火)의 소천(小川) 전피현(箭皮峴)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간성 군수(杆城郡守) 공작(公爵)의 아들 중영(仲郢)은 명종조(明宗朝)의 명신(命臣)으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가 되어 토호(土豪)들의 횡포를 엄중히 다스렸으며 육영(育英) 기금을 마련하여 교학 진흥에 아바지한 공이 컸다.

  중영의 맏아들 운룡(雲龍)은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은 초기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와 제자 백가(諸子百家)에 정통했으며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나가 토적(討賊)을 소탕했고, 특히 풍화정치(風化政治)에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어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우 성룡(成龍)은 선조조(宣祖朝)의 명상(名 相)으로 문장(文章)과 학행이 뛰어났으며, 역사의 최대 난국인 임진왜란을 맞아 고비에 처해있는 위국(爲國)을 수습하는데 중임을 맡아 불멸의 훈공을 남겼다.

  1542년(중종 37)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慶北義城

郡點谷面沙村里) 외가(外家)에서 태어난 성룡(成龍)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어려서부터 벼슬하는 아버지 중영(仲郢)의 임지(任地)를 따라 여러 지방 을 옮겨 다니면서도 글공부에 열중했으며 21세 때 형 운룡과 함께 도산(倒産)의 퇴계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近思錄)을 전수 받았고, 성현(聖賢)의 도를 배워 학문(學問)에 뛰어났다.

  일찍이 스승인 퇴계가 그를 평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셨다” 라고 하였고, 선조(宣祖)는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이항복(李恒福)은 “이 분은 어떤 한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 이름 지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 회은집 (晦隱集)」에는 <이원익(李元翼)은 가히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가희 속일 수 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2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성룡은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 字)를 시작으로 하여 풍파 많은 벼슬길에 첫 걸음을 딛게 되어 영상(領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항상 가난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성룡의 아들 중 진(袗)은 광해군(光海君) 때 유일(유逸)로 천거받아 세마(洗馬)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거쳐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초(初)는 광국호성원종공신(光國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한편 성룡의 장송 원지(元之 : 여의 아들)는 성리학(性理學)과 역학(易學)에 밝은 학자로「 상수소설 (象數小說)」을 지어 12패도(卦 圖)의 근원을 밝혀 명성을 떨쳤으며, 운룡의 증손 세명(世鳴 : 원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조 좌랑(吏曹佐郞)․지평(持平) 등을 거치고, 일찍이 공충도 도사(公忠道都事)로 서천 군수(舒川郡守)의 부정을 탄핵하여 파면케 하였다.

  그외 정조(正祖) 때 경산 현령(慶山縣令)으로 치적(治績)을 울렸던 규(氵奎)와 순조조(純祖朝)에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태좌(台佐)가 유명했고, 도정(都正) 심춘(尋春)의 아들 후조(厚祚)는 대원군(大院君)의 인재등용에 발탁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공조(工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고종(高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1867년(고종 4)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판중추부사 (判中樞府事)에 이르러 치사한 후 봉조하 (奉朝賀)에 올랐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시(詩) 한 수를 짓고 자결했던 도발(道發)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받았고, 신영(臣榮)은 고종(高宗)이 독살(毒殺)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고 음독자결하므로써 문벌과 충절(忠節)의 가문인 풍산 류씨의 가통(家統)을 살렸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81가구 13.3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

하회류씨(河回柳氏)

하회류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114가구 3,8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