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원부설원기" 문제
문화류씨의 현안 문제 중 하나에 "류차문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안차씨 문중에서 문화류씨의 시조인 류차달(柳車達)을 원래 성이 차(車)씨이고 이름이 해(海)였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자신들의 족보에까지 올린 사건입니다. 이것은 문화류씨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모독입니다. [이 글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존칭을 생략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문화류씨들이 어느 정도는 그런 억지 주장에 일조해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대략 17세기 후반의 족보부터 류씨와 차씨가 근원이 같다는 주장을 싣기 시작했고 문중에 관심을 가진 문화류씨 어른들은 모두들 그렇게 믿고, 게다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곧 류차달의 몇 대 위의 조상까지 차씨였고, 그 중 어떤 차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피신해서 류씨로 성을 갈았고 그 몇 대 아래의 후손이 류차달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에는 또 차씨가 신라의 명문이었고, 또 그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설적인 중국의 제왕인 황제(黃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주장에 따르면 차씨뿐만 아니라 류씨들이 중국의 황족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을 숭상하는 모화사상에 절어 살았던 조선 후기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이 그냥 말로만 나온 것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화류씨 족보에는 몇 가지 문헌들이 언급이 되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전쯤에 세상에 등장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중 다른 것들은 지금 전혀 남아 있지도 않고, 족보 속에 그것들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도 믿기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 대략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내용에 조선의 여러 왕이 등장하며, 사육신의 일부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등장하는 일견 탄탄한 역사적 사료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이 책은 '차원부'라는 사람이 중심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고려말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설원기는 차원부가 이성계와 가까웠고 그에게 음으로 큰 영향을 미쳐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사람 특히 하륜에게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설원이란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뜻인데, 차원부설원기는 차원부가 바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거룩한 인물이면서 조선 건국에도 큰 공을 세운 사람인데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그것을 풀어달라고 여러 신하들이 선대의 여러 왕들에게 청원해 왔음을 밝히며, 어떤 왕에게 그를 설원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차원부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설원기의 도입 부분에 차원부의 시조가 류차달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차원부가 대단한 가문의 후손이라 주장합니다. 그리고 설원기의 부록에서는 류차달의 조상이 차씨였다는 내력이 (본문은 아니고 주석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의 영향은 대단해서 문화류씨와 연안차씨들이, 그 책의 외면적 권위를 큰 배경으로 해서, 그곳에 나온 내용과 임진왜란 전에 나온 다른 요상한 사료들의 내용들을 혼합해서 중국의 황제로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완전하게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가문사의 정사(正史)로 삼아왔으며, 심지어는, 그런 내용에 왕씨들도 등장하는데, 고려 왕족으로 자부하는 왕씨들조차 관련 부분을 자신들의 가문사의 기술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후 "증보문헌비고" 같은 조선의 국가적 자료들에게까지 이런 내용이 사실인양 기록되었으며, 당연히 모든 성씨 관련 자료들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차류종친회'가 생겨났으며, 심지어는 근년에 차씨들이 문화류씨의 조상인 류차달을 차씨라 주장하고 나서게까지 된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기록들에서도 류차달이 차씨로 기록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설원기에서조차 그냥 '류차달'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문과 문헌의 해석을 엉망으로 해서 말도 안 되는 견강부회를 한 것인데, 이것만 해도 류차달이 '차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나아가서, 이하에서 자세히 기록하겠지만, 류씨와 차씨는 애당초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차원부설원기"는 조금만 들여다봐도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 그런 책입니다. 주 저자가 박팽년이라 하고,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 하위지라고 하는데, 본(本)에 따라서는 (옛날 책들은 대개 여러 본이 존재함) 서문을 쓴 사람이 하위지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왕명을 받아서 썼다고 나오는데 그 쓴 날짜가 박팽년, 하위지 등이 사육신 사건으로 죽음을 당하기 불과 며칠 전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왕명을 내린 왕이 바로 세조가 되어야 하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세조일 수가 없는 구절들이 튀어나오고 거기 등장하는 얘기들이 거의 다른 얘기들을 적절히 끌어다가 변형해서 넣은 것들이거나 근거가 없는 것들이며, 부록에는 시(詩)들이 붙어있는데, 연대를 따져보면 도무지 불가능한 경우도 여럿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이예장은 이미 죽었을 때, 그리고 남효온은 2살 때 시를 지은 것으로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류차달의 조상이 차씨였다는 주장은 이 이예장이 썼다는 시에 암시가 되어 있고 또 그가 직접 달았다는 주석에 상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모두 죽은 사람 곧 유령이 쓴 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명백히 사육신 사건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저자들을 사육신으로 조작하려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육신은 나름대로 충절을 지킨 만고의 충신들인데다가, 당시에는 그들이 역적으로 죽었으므로 그들이 쓴 글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다가 나중에 비로소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꾸미면, 그 내용에 큰 권위가 생기면서도 그 진정성이 설득력이 있게 보이고 그 동안 그런 중요한 내용이 세상에 있지 않았던 이유를 꾸밀 수 있으니 일석삼조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자세한 내용으로 들어가서 검토해보니 설원기의 거의 모든 부분이 문제가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설원기의 비평 내지는 비판은 이곳 홈페이지(http://kenji.cnu.ac.kr/ryu/)에 이미 자세히 밝혀놓았으니 관심 있는 분께서는 참고하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한 저명한 역사학자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주장에 더해져서, 설원기가 사료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문헌임이 다시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확정되리라 믿습니다.
2. 이수건 선생의 논문: "차원부설원기"는 위서(僞書)
저에게 영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 류영철(전주류씨) 선생께서 이수건 선생이 쓰신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이라는 논문이 "대구사학" 86집(2007년 2월)에 실렸으며, 그 내용에 차원부설원기가 다루어져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논문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논문의 저작권이 "대구사학"에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따라서 그곳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제가 전문을 공개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공학분야에 있는 사람이라 그동안 글을 읽다가 몇 번 이수건 선생의 이름과는 마주쳤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만, 영남대 명예교수이셨다가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사계에서 상당히 권위 있는 분이라 합니다. 그 분이 계획하셨다가 완성하지 못한 논문을 제자가 정리해서 낸 논문이 바로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이라 합니다.
제목이 말하듯이 이 논문은 조선시대에 활발하게 간행되기 시작한 족보 등에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조작하거나 그 내력이나 신분을 조작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성씨의 관향(貫鄕)을 동일한 성씨를 쓰는 다른 유력한 집안의 관향으로 바꾸는 등의 신분 관련 조작이 극심하게 자행되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柳씨에 대해서는 "그러나 德水李, 潘南朴, 杞溪兪, 海平尹, 豊山洪 ·金 · 柳씨 등은 이미 조선초기에 명문사족으로 기반을 굳혔기 때문에 본관의 폐합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본관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연안차씨에 대해서는 "黃州邊氏, 延安車氏, 盈德鄭氏, 驪陽陳氏, 忠州池氏, 牙山蔣氏 등은 본래 그 본관 군현의 관내 某村姓으로서 『실지』(세종실록지리지)의 각 읍 성씨조에 기재되었던 것이 나중에 주읍을 새 본관으로 한 예"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명문사족으로 성장했거나 훌륭한 조상을 둔 가문은 자신의 관향을 바꾸지 않았는데 그렇지 못한 가문은, 당초에 관향이 작은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었을 때 더 큰 지역의 이름으로 관향을 바꾸어서 관향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꾀했는데, 여기 언급한 성씨들이 그 예라는 말입니다. 차원부설원기는 차원부의 계통의 권위를 확실하게 류씨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논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조선시대에 류씨들은 확실히 명문거족이었으며 연안차씨들은 그렇지 못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수건 선생은 조선시대의 사림(士林)계가 지나친 모화(慕華)사상(중국 숭배 사상)과 우리나라의 역사서들을 부정하는 태도와 역사의식을 지녔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 배경 하에 "차원부설원기" 같은 책이나 사실들이 많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차원부는 또 두문동 72현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두문동 72현은 거의 후세의 창작입니다. 이수건 선생은 "두문동 72현 문제와 같은 조작된 사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원기를 상세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논문은 설원기의 내용과 그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車原부雪寃記』에 의하면 車 · 柳 양 성관은 고려 태조공신 車達의 두 아들에서 갈린 같은 뿌리로서 장자 孝全系가 車氏성을, 차자 孝金系가 柳氏성을 각각 취하였다. 그리고 차원부의 先代世系가 箕子시대까지 소급, 기재되어 있다. 이 『차원부설원기』는 편찬 내지 간행 · 반포된 뒤에 조선후기 각 문중들이 그 기재 내용을 당시의 역사사실로 확신하고 조상유래와 족보편찬에 중요한 사실로 전재, 인용한데서 한국의 성관 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후기 조상들의 전기 · 狀碣文 작성과 족보편찬에 있어 온갖 조작과 협잡이 동원된 것도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설원기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그 3부자(車軾 · 天輅 · 雲輅의 3부자를 지칭함)에 의해 조작된 위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극소수지만 이미 그런 주장을 했던 조선시대의 몇몇 선각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논문은 설원기가 류씨와 차씨에게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고, 그 위작 동기, 위작 시기, 위작자, 위작 경위, 유포과정 등에 관해 논하며 다음과 같이 추정 또는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 위작자: 차씨 3부자
* 위작시기: 16세기 후반
* 위작동기: 차씨들의 한미한 가계(家系)를 돋보이게 하는 보상심리.
차씨 3부자가 문재(文才)는 뛰어났지만 좋지 못한 성품을 지녔고 중용되지는 못했음을 배경으로 함.
* 위작내용:
- 류씨와 같은 뿌리임을 조작함.
이를 위해 서희, 정지상, 김방경의 책들을 조작하여 거짓으로 거론함.
- 차원부 선대가계가 고려 후기 200년 동안 명문이었다고 조작함.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위조해도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 차원부 일가의 가해자로서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을 4얼[네 명의 얼자(첩에 게서 난 아들. 서자)]로 조작함.
- 설원기를 편찬한 인물로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등을 제시하여 단종복위사건을 이 용함.
- 4얼을 등장시킨 것은 오히려 16세기 중엽의 조작임을 보여줌.
(16세기 중엽에는 얼자들이 배척을 받았지만, 여말선초에는 권문세족의 내외조상에는 서얼들이 많았는데,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16세기 중엽의 관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결과라는 의미임.)
- 설원기에는 차원부 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 가해자들(4얼)이 서얼계란 사실이 기재된 족보가 해주 신광사에 있다가 소각되고 말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한국 족보사에서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
- 차씨와 류씨가 同祖(同源: 조상이 같음)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임.
(이에 대한 주석에서, 저자는 차씨의 본관과 역사적인 차씨 인물들을 살피고 있음. 그런 차씨 자체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류씨와 같은 조상일 가능성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음.)
* 위작 및 유포 경위: 류몽인(고흥류씨)이 광해군초에 "車軾의 神道碑銘"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차원부에 대한 얘기와 그 선대세계의 얘기가 적혀 있음. 이것을 보면 天輅 형제가 先考(車軾)의 비문을 柳夢寅에게 청탁할 때 家狀 또는 行狀을 제시하였고, 류몽인은 천로형제가 제시해 준 가장을 바탕으로 신도비명을 지었을 것임. (류몽인에게 보인 가장 또는 행장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미.)
* 결론: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 인물들의 행적이나 序 · 記文, 48인의 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이 책을 위서로 단정하지 못한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문헌 고증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선현 · 선조들의 의리와 충절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양 일변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확실한 주장들을 보면 이 논문은 아주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차원부설원기의 허구성은 의심할 수 없기에, 그것에 입각했던 관념들, 지식들은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3.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관련
논문에 나온 차원부설원기 관련 얘기는 이 정도로 소개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논문에는 문화류씨에 관련되는 주장도 들어 있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4세기 이래 지방의 토성이족에서 성장한 성관이나 한미한 가계에서 권문세족으로 성장한 가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기 선조의 유래와 得姓 사실을 조작하거나 부회하는 예가 많았다. 가령 文化柳氏 · 安東權氏 · 全義李氏 · 善山金氏 등의 시조 성명이 柳車達 · 權幸 · 李棹 · 金宣弓 이라는 字義를 두고 각기 그럴듯한 해석을 가하여 改姓 · 改名사실을 부회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이런 주장은 이수건 선생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몇몇 본관들이 조상들을 고려초기의 삼한공신들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문화류씨는 그런 직접적인 지적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곧 문화류씨의 시조로 류차달을 상정하는 것은 연대적으로 합치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에는 구체적으로 적시되지는 않았지만, 류차달에 관한 기록, 곧 수레(車)와 양곡으로써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서 삼한공신이 되었다는 전승은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논문의 이런 주장에 대해 저는 그 정신, 곧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선조들에 대한 조작의 배척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은 '실제 사실'을 무언가 상정하고 그와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실제 사실'이라는 것이 겨우 남아 있는 "고려사" 같은 제한된 사서에 기록된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지는 못했을 것이고 또 기록된 것들이 전혀 지금까지 모두 남아 있지도 않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사실'을 이루는 것일까요. 저는 큰 규모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한 가문의 전승이 충돌된다면 전자를 취할 수밖에 없지만 충돌하지 않는다면 후자의 가치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류차달은 "고려사"에 등장하긴 하지만 일차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신 류공권(柳公權, 1132-1196)의 설명에 "류공권의 자는 정평(正平)이며 유주(儒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차달(車達)인데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사는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조정의 작품이지만 특히 인물들의 묘사에 엄밀함을 가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차치하고라도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이 없는 류공권의 선조에 대한 기록에 있어 고려사의 기자(記者)들이 일차적 사료들을 보고 기록했을 것이 확실한데 그 기록을 지금 무시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후에 류릉(柳陵)으로 불린 류차달의 무덤, 고려시대 후기지만 지금 전해오는 몇몇 금석문들, 그리고 관련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계룡산 동계사 등의 여러 요소들이 류차달의 역사성을 부인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류차달이 2등 개국공신이라고 문화류씨의 현존하는 족보 중에 최고 권위를 갖는 족보인 가정보에 나와 있으며, 다른 성씨의 족보들에도 여러 군데 실려 있습니다. 가정보는 문화류씨라는 하나의 성씨의 족보의 수준을 넘어서는 객관성이 뛰어난 괄목할만한 족보이기에 거기서 조상을 높여 꾸미기 위해 처음으로 단순한 공신을 2등공신으로 조작해서 넣어놓은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려 태조 때부터 이미 높은 공신이었을 가능성도 물론 있고, 고려 공신들은 고려시대를 내려가며 그 명단이 계속 정비되고 추가로 선정되고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공신이었다가 후에 언젠가 2등 개국공신으로 재평가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조선 초기에 조작이건 아니건 간에 류차달이 개국공신에 들어 있는 공신록(功臣錄)이 존재했었음은 확실하게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 15세기 초의 문헌들에 이미 류차달이 삼한공신임이 적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록은 일반인들이 보기 어려웠을 터이지만 조선의 조정에서 국가의 공식 역사서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고려사"는 볼 수가 있었습니다. 류차달이 공신 중에서도 2등 개국공신이라고 못 박은, 가정보에 보이는 명단은 누군가가 삼한공신이라는 일종의 국가적 공인(公認)에 입각해서 기존의 명단을 재구성한 것을 인용한 결과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후손들이 조상을 꾸며 2등 공신으로 높였다고 가정해도 일종의 공신이었음은 부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류차달이 지방의 호족이었음을 부인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는 데서 출발합니다. 지방의 호족들은 고려 초기의 융화정책에 의해 관작과 공신의 대우를 받았기에 그렇습니다. 류차달은 고려시대에 이미 확실하게 시조로 숭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호족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하며, 이런 사실들이 금석문(비석의 글)으로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가장 넓게 말하자면, 고려의 건국에 어떤 역할을 해서, 특히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려는 왕건의 정책에 따라, 개국공신과 삼한공신으로 선정된 인물들이 고려사에만 해도 수천 명이라 언급되어 있기에 류차달이라는 인물이 태조를 돕는 어떤 역할을 했고 삼한공신이 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거기에 왕건의 통일 전쟁에 어떤 일정한 역할을 했다면 그 대우가 더욱 확실했을 것입니다. (‘차달'이라는 이름에 관한 것 등, 더 자세한 것은 이곳 홈페이지에 다루어 놓았습니다.)
시조에 관해 후대에 덧붙여진 것들이 있습니다. 호나 자나 초명(初名), 생몰년대, 심지어 사주까지 있는데, 이런 것들은 후손들이 붙인 것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갖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시대에는 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호를 하나 또는 심지어 수십 개까지 갖고 있었는데 거룩하신 시조가 호가 없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어떤 분이, 신라말-고려초는 호가 사용되지 않던 시절이기에 호가 있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역사인식은 갖지 못한 채, 시조의 무덤 근처의 산봉우리인 아사봉(鵝沙峰)을 보고 넌지시 호를 '아사'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4. 맺음말
이상 이수권 선생이 논문에서 "차원부설원기"와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에 관해 다룬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한 성씨의 가문사를 가급적 좋게 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인정해도 거짓을 바탕으로 그런 일이 이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성씨들의 족보들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천은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조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히 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류씨는 이번에 발간하는 대동보에 "차원부설원기"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는 입장으로 선계(先系)를 정리하는 큰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문화류씨 시조는 류차달이며 그 아들은 한 분 효금(孝金) 뿐입니다. 그리고 시조 위의 조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실은 이것이 바로 시조가 의미하는 모든 것입니다.
저는 감히 문화류씨 문중이 몇 백년에 걸친 사기극에 놀아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의건 타의건 사회에 끼친 해악이 대단합니다. 물론 그 오랜 세월동안 "차원부설원기"를 지식인과 학계에서조차 감히 위작이라 주장하지 못해왔던 분위기와 완전히 맞물려 있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허다한 문헌과 요즘의 인터넷조차 거짓 가문사(家門史)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을 고쳐 진실의 역사를 밝히고 그 진실에서 참된 발전의 힘을 발견하고 나아가는 대장정이 이제 겨우 시작되었습니다. 그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 대장정에는 많은 분들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부디 함께 하여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2007. 3. 24.
-출처-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Home: http://kenji.cnu.ac.kr/ryu/
E-mail: juwha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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