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章景公墓誌石 小考

아름드리 블로그 2009. 10. 9. 09:53

 

 --------------------------------------------------------                            대종회 전임총무 柳在浩-

 

  고려 말엽 충선왕(忠宣王)때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치사(致仕)하신 우리 류씨 4세5공(四世五公) 칭호의 한 분인 장경공(章景公)의 묘지석(墓誌石) 탁본(拓本)이 병인년(丙寅年)에 발간된 대동보 책 갈피속에서 발견 되었는데 지석의 규격을 헤아려 보니 길이 98cm. 넓이 50cm이며 둘레에 구름무늬가 새겨 있었다.

 

  필자가 "장경공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로 항상 궁금하던 사건이 봄눈 녹듯 풀림은 물론 가벼운 흥분마져 감추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1924년 여름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두곡에서 폭우로 산사태가 난 자리에 장경공의 묘지석을 발견하여 공의 묘를 심봉(尋封)하고 묘역을 정화한 기록이 종도실기(鍾道實記)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석의 행방은 묘연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묘지석을 발견하였으면 응당 탁본을 남겼을 것이고 행방도 기록에 남아야 할 것이다. 지금 문헌에 남아있는 것으로 본다면 1340년대의 것이 확실하고 보면 고려 말엽의 지석 현물이 희귀할 뿐더러 지석의 글씨도 공의 막내 사위인 박린(朴린)의 글씨 이기에 여말 서체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 문헌과 고려사 등에는 장경공의 경(景)자가 모두 경(敬)으로 되어 있으나 공의 묘지석에는 명확하게 경(景)으로 되어 있으므로 지금껏 혼용되고 있는 경을 경(景)으로 통일해야 할 것이다. 수 백년 실전(失傳)된 선대의 묘소 7위를 우연한 계기로 득전(得傳)하여 후손의 한을 풀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선조님들의 묵우(默佑)라고 하기엔 너무도 큰 사건이기에 당시 묘소를 심봉하고 정화하는 등 대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유종의 미를 거두어 우리 후손에게 물려준 어른들의 위선유후(爲先裕後)하는 정신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 후손은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지금도 비무장지대내에 위치하므로 다시 실전아닌 실전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득전할 당시의 어른들의 천행인 심정으로 비쳐볼때 더욱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문간공을 위시하여 여러 위의 묘소를 세번에 걸쳐 득전한 사실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864년 고종(高宗) 갑자(甲子)에 지군공(知郡公 諱 善 : 혹 한림(翰林) 공이라고도 함)의 자제 효순(孝順:判官) .효진(孝眞:參議)공께서 제작한 유주류씨세장도(儒州柳氏世葬圖)가 개성(開城)에 거주하는 조윤검(趙允儉)이란 분이 종개천 산사에서 발견함으로 그를 근거하여 장단군 진서면 종개천에서 복야공(僕射公 諱 澤) 묘와 그 자제 문정공(文正公 諱 璥) 묘. 문정공의 배위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단양장씨(丹陽張氏) 묘. 지군공(知郡公 諱 善)의 묘를 심봉하고 종개천지(鍾開川誌)를 편간하였다.

 

  1915년 을묘(乙卯)에 문간공(文簡公 諱 公權) 묘지석을 박물관(博物館)에서 발견하여 종개천 문정공의 묘 후등성이 우견(右肩) 갑좌에서 문간공의 묘을 심봉하고 다음해 1916년 병진(丙辰)에 또 개성군 종서면 덕달리 경좌(庚坐)에서 상서(尙書)공 묘를 득전하였다.

 

  1924년 여름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 장경공의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두곡 유좌(酉坐)에서 발견하여 장경공의 묘를 득전하고 묘역을 정화하고 석의를 구비하여 제향을 받들고 세번에 걸쳐 심봉한 사실들을 한데 묶어 한 책으로 출간하면서 두 곳의 지명을 따라서 종도실기(鍾道實記)라고 명명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