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문화류씨 영락보에 대한 고찰

아름드리 블로그 2009. 10. 15. 15:39

 

한국 최초의 族譜

文化柳氏 永樂譜에 對한 考察

 

 

서  론

  文化柳氏 永樂譜는 世宗 5년인 1423년 良度公 柳潁이 편찬한 族譜로서 文化柳氏의 최초 族譜이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의 최초의 족보라는 것이 譜學界의 定設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譜冊은 후손이나 타문 등 전국 어느곳에서도 이제껏 발견되지 않아 접해 볼 수 없다.

  다만 永樂譜 序文만이 142년 뒤에 僉正 柳希潛이 편찬한 문화류씨 嘉靖譜에 실려 전해올 뿐이다. 혹자는 황해도 구월산 大丞公 諱 車達의 墓下 齊室에 所藏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고 또한 성묘시 이를 직접 奉審했다는 후손이 생존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분단 이후 大丞公 墓所에 省墓도 못한지 半世紀가 넘도록 그곳의 近況을 전해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북한은 조상에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통제하는 공산주의 치하에 이 소중한 보책이 이제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지 알길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이 영락보의 실체를 영락보 이후 54년 뒤인 1477년(成宗7년)에 간행된 安東權氏 成化譜와 성화보 이후 85년 뒤인 1565년(明宗 17년)에 간행된 文化柳氏 두번째 족보인 嘉靖譜를 통해 그 實體를 考察해 보기로 한다.

 

族譜에 대한 沿革과 意義

  사람들이 족보를 만드는 목적은 血緣관계와 得姓의 淵源과 由來를 밝힘으로서 系代를 확실히 하고 崇祖孝親之心과 敦宗愛族精神을 전하며 慕先育英精神을 길러 先烈의 功德을 후세에 끼쳐주자는데 있다. 그리하여 倫理道德의 根本을 다져 社會秩序에 順應토록 하여 美風良俗을 지키며 사람다웁게 살아가는 도리를 밝히는데 있다 하겠다.

  族譜는 일찍기 中國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王家의 系統을 적은 帝王年表로 부터 시작되었고 漢나라때 개인 家門에 대한 族譜가 편찬되기 시작하여 그 후 齊나라 시대에 賈希鏡의 中國全土士族의 族譜를 총 망라하여 百帙 7百卷에 달하는 巨書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일반 士族의 族譜 嚆矢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高麗때 부터 王室의 系統을 적은 金寬毅의 [王代實錄]과 壬景肅의 璿源錄이 그 嚆矢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士家의 族譜로는 朝鮮 世宗 5년인 1423년 良度公 潁이 文化柳氏 永樂譜를 편찬하여 그 始初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락보는 전해지지 않고 安東權氏 成化譜(1477)와 文化柳氏 嘉靖譜(1565)가 전하는데 嘉靖譜가 그 편집 체계나 내용면에서 가장 우수한 譜冊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면 主要 族譜의 年代와 성화 가정 두 보를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主要 族譜의 沿革(생략)

成化譜와 嘉靖에 對한 比較(생략)

 

성화보와 가정보의 出現

  최초의 족보 영락보는 현존하지 않고 안동권씨 성화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족보요, 그 다음에는 문화류씨의 가정보라 할 수 있다. 영락보는 황해도 구월산 대승공 재실에 소장된 것으로 전할 뿐이며 얻어 볼 수 없고 성화보는 국립도서관에 1질이 소장되어 안동권씨 문중에서 1929년(소화 4년)필사하여 영인본을 제작 배포하였고 또한 가정보는 柳門 후손집에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다행히 文化柳氏 外裔인 李退溪 裔孫 守拙堂 嗣孫 李在寧氏宅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1979년에 발견되어 文化柳氏 大宗會에서 영인복사본을 제작 분질함으로써 후손은 물론 세인이 넓게 접하여 보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성화보와 가정보의 비교적 고찰

  지금으로부터 520년전인 1477년에 만들어진 성화보와 그 후 85년뒤인 1562년에 제작된 가정보를 살펴보면 두 보는 몇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시조로 부터 世代별로 기록했고 1면을 6世로 나누어 子女를 生年順으로 內.外孫 및 外外孫을 차별없이 기록하여 각 姓氏와 얽힌 인척간의 人脈을 뚜렸이 하였다는 점이요. 둘째는 사위를 女 또는 女夫라 적고 姓名만 썼을뿐 本貫이나 先祖의 기록을 일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위의 손 즉 외손 및 외외손은 6대~7대까지 소상히 적었을뿐 上系와 先祖 諱는 일체 기록하지 않았으며 후손중 或者 대표적 관작만 기록했고 일체 개인 기록을 등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화보는 始祖만 姓을 썼고 子는 子字아래 諱字만 기록 했으며 面이 바뀌면 上단의 첫자손은 반듯이 姓名을 함께 적어 本孫과 外孫 및 外外孫의 系代를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안동권씨나 문화류씨 두 문중의 보책이라기 보다는 萬姓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만 하다.

  성화보는 3권 364면에 9천명이 기록된 반면 가정보는 10권 2,204면에 4만2천명이 등재 되었다. 성화보는 양자 제도가 없는 반면 가정보는 126건의 양자기록을 볼 수 있다. 또한 神主養子 제도가 가정보에서 발견 되었으며 兩譜 공히 庶子라는 기록은 전무하고 가정보에서는 改嫁한 여자의 남편을 前夫 ㅇㅇㅇ 後夫 ㅇㅇㅇ으로 함께 기록 本宗爲主思想을 중시하여  편찬 했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成化, 嘉靖 兩譜는 朝鮮 初期 二世期間의 정치적 영역의 여러 측면을 究明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家系와 婚姻 관계를 통해 조선 초기의 支配階層의 구성과 성격 연구에도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民俗資料라 하겠다.

  여기서 성종 ~ 중종의 75년간 89회의 文科 시험을 실시하여 1,595명을 배출 했는데 그 중 80%인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중 1,071명은 文化柳氏와 혼인관계를 통해 직 간접적으로 연결 되었다는 사실도 중요시 된다.

  또한 朝鮮初에 明宗末까지 문과급제자 2천여명중 60%의 인물이 兩譜에 등재 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임진왜란전 간행된 두 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양반가문의 흐름과 왕실관계, 역사적 주요 명사의 혼인관계 등도 살필 수 있어 이 두 족보는 조선 초기의 人脈 硏究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국보적 가치자 충분함으로 반듯이 文化財로 指定되어야 한다는 譜學界의 意見이 높다.

 

族譜 體系의 變化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안동권씨의 성화보와 문화류씨위 가정보는 본손, 외손, 외외손 등을 차별 없이 同格으로 기록하여 萬姓譜的 문헌으로 평가를 얻으나 1565년에 간행된 江陵金氏 乙丑譜와 1689년에 편찬된 문화류씨 己巳譜는 先男後女로 자손록을 적고 있어 父系中心의 本孫爲主로 편집하여 족보편집 형태의 큰 변화를 쉽게 알수 있다. 또한 강릉김씨의 乙丑譜는 本孫만 기록했는가 하면 문화류씨의 己巳譜는 외손을 一代 또는 二代까지만 적었으며 가정보 1권 및 2권에 등재된 文簡公 柳公權의 외손과 외외손의 기록을 비롯 文化君 柳成庇, 文正公 柳璥 등의 외손 및 외외손의 많은 外裔孫錄이 의도적으로 삭제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適庶의 구별을 엄격하게 보책에 기록, 改嫁한 여자의 자손은 반드시 庶子. 庶女라 적어 양반사회의 의식구조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乙丑譜와 己巳譜 이후 모든 가문의 족보가 부계위주의 先男後女를 축으로 하는 족보형태가 크게 발전 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成化譜에 柳總, 柳惠芳, 柳惠孫의 子孫錄 登載事實

  安東權氏의 成化譜는 3권으로 天~恃까지 364면에 약 9천명이 등재 되었다. 그중 문화류씨의 柳總, 柳惠芳, 柳惠孫, 柳滋 등의 孫錄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안동권씨의 사위로 內外孫 및 外外孫이 28면에 무려 591명이나 기록 되었다. 이는 264면중 7.7%에 해당하는데 두 족보의 기록은 대체적으로 일치함을 발견하게 된다.

 

成化譜와 嘉靖譜의 子孫錄 比較的 考察

  成化譜 중 柳惠孫(10면), 柳惠芳(12면), 柳總(14면)의 子孫錄 [족보복사 생략]

  嘉靖譜 중 柳惠孫(18면), 柳惠芳(19면), 柳總(17면)의 子孫錄 [족보복사 생략]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성화보와 가정보는 편집 자체가 같고 자손 기록도 거의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성화보는 영락보 보다 54년뒤에 만들어졌고 가정보 보다 85년 전에 만들어졌음을 앞서 살핀 바와 같다.

  그런데 어떻게 안동권씨 문중이 권씨가문의 족보를 만드는데 사위인 (즉 외손인)柳總, 柳惠芳, 柳惠孫 등의 외손 기록을 28면을 할애 5,939명의 자손록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갖어 보게 된다.
  14세기 성종조 당시의 문물 사정을 생각할때 자료 수집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동권씨 족보 편찬자자 有司를 전국에 보내 방대한 자료를 수집 하기에는 교통, 통신사정과 비용 등의 여건등을 생각할때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는 외손인 당사자들에게 자료 제공을 요청하여 협조를 얻어 이루어 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외손 문중의 특정 책임자가 자손록을 작성하여 필사해서 권씨 譜所側에 제출했을 수 있다. 그러면 柳門의 작성자는 전국 각지의 자손들 生居地를 순방하여 일부는 수집했을 수 있고 상계는 기존의 家乘譜를 참고하여 작성했을 것으로 추상할 수 있다.

  성화보에는 대승공 12세손에서 부터 18세 손까지 6대 또는 7대 까지의 내외손 기록을 볼수 있는데 이 기록은 성화보의 기록과 가정보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함을 알수 있다.(물론 생년순이 바뀐것 또는 諱字의 오기, 누락, 증보 등도 간혹 있음) 이 는 柳門 상계기록의 일치는 이미 작성된 자료가 있어서 이를 토대로 편집했기 때문에 가능 했으리라 생각 된다.

  6세조의 외손 및 외외손의 기록을 180년 뒤의 자손이 상세하게 작성하기란 쉽지 않고 작성한다 하더라도 일치된 문서를 작성하기란 쉽지않다. 성화보의 1항(總. 惠芳. 惠孫)은 고려말 인물들이고 5항~6항의 인물들은 성종조 전후 생존자들 임을 참고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화보 보다 54년전에 양도공 潁이 제작한 영락보가 이미 기존의 선계 기록을 등재 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해 볼수 있다.

 

永樂譜는 成化譜 嘉靖譜의 母體

  가정보는 1562년 僉正 柳希潛에 의해 편집되었다. 희잠은 대승공 20世 손으로 조선 明宗때의 사람이다. 가정보는 귀양살이를 하는 적지에서 24년간의 긴 세월을 父子 양대에 걸쳐 이루어낸 大力作이다. 그러면 희잠은 무었을 기초로 가정보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距今 600년간의 선조 사적을 집필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료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는 1423년 세종 5년에 良度公 柳潁이 제작한 영락보가 있었기에 선대자료로 삼았을 수 있다. 潁은 대승공 14세 손으로 조선 초의 인물이다. 그가 제작한 영락보는 문화류씨 최초의 족보이다. 족보를 편집할 때는 상계의 기록은 기존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편집체계도 성화보와 가정보는 크게 닮았다. 이는 우연일까 가정보는 영락보 체제를 本體로 편집할수도 있지만 성화보는 무었을 본체로 하였을까?  성화보와 가정보는 첫째로 자손록을 생년 순으로 기록했다는 것. 둘째 본손, 외손, 외외손을 동격으로 다룬 것. 셋째 사위 이상의 선대 기록을 다루지 않고 자손록은 제한없이 기록한 것. 넷째 100여개의 성씨가 등재되었으나 관향을 일체 쓰지 않았고. 다섯째 등재인물의 개인기사를 생략한 것. 여섯째 직함은 대표적인것 하나만 적은점. 일곱째 1면 6행으로 나누어 5세를 기록한 것 등이 일치한다. 또한 안동권씨 사위 류총 류혜방 류혜손의 두 족보의 자손록이 일치하다는 것은 크게 시선을 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때 영락보의 체계가 성화보 가정보의 편찬에 모체가 되었다는 推論이 가능하다.

 

永樂譜의 實體

  그렇다면 영락보의 실체는 어떤것일까?

  가정보는 문헌 1권 76면과 자손록 9권 2,204면의 보책이다. 1권은 大丞公 諱 柳車達을 시조로 1세에서 부터 7세까지, 7세 諱 公權부터는 본손과 외손, 외외손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볼수 있다.

  가정보의 대승공 15세손 이상의 선대기록은 영락보의 기록을 적었고 그 이후 손록은 자료를 수집편찬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영락보를 편찬한 潁이 대승공 14세 손이니까 본인의 자 및 손자대 까지인 15세 또는 16세까지를 기록했다고 할수 있다. 그럼으로 영락보는 대승공으로 부터 15세 손까지의 자손록을 적었고 자손록 순서는 선남후녀가 아닌 생년순서로 적었으며 본손과 외손 그리고 외외손까지를 동격으로 기록했다.

  또한 개인 기사 보다는 혈통을 중시한 世系爲主로 편찬한 萬姓族譜 성격의 한국 최초의 족보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영락보의 실체는 가정보의 15세 이상의 선대기록이 영락보의 本體라고 할수 있다.

 

嘉靖譜는 國寶級의 文化財

  가정보는 문헌 1권과 자손록 9권으로 편집된 족보로서 시조로 부터 약 600년간의 선대기록과 100여 성씨의 혼인으로 인한 인맥 관계를 소상히 적은 만성보적 족보라고 평가된다. 이 보책은 많은 문중의 보책과 달리 본손과 외손 및 외외손 까지를 가리지 않고 동격으로 남녀평등 정신에 입각 생년순에 의거 편집 했으며 수많은 씨족의 인맥관계를 폭넓게 수록했다는데 이 세보의 특징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24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제작된 이 보책은 참여인원만도 대.소 관원과 각 문중 참여종사지가 무려 300여명이나 되었다고 跋文은 밝히고 있어 당시의 文物을 생각할때 그 얼마나 어려운 대작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본 가정보 이후 많은 성씨에서 만든 족보는 본손 위주의 편집 체계와 개인 기사를 기록하는데 중점을 두어 발전 했으며 자손록도 生年順에서 先男後女로 적고 있어 가정보는 男女平等의 씨족관년에서 男尊女卑思想으로 변해온 사회문화의 변천사를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정보는 단순한 私門의 족보라는 일반적 의미를 벗어나 씨족 문화와 인맥 연구자료로서 완벽한 사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하겠다.

 

                                                                                           柳 暎 烈  書

 

 

註) 2008년에 제일교포 류기환씨가 구월산 대승공묘소에 참배 하였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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