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靖譜 理解
가정보서(영인본) 번역문(飜譯文)
정부자(程夫子)가 말씀하시기를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을 포섭(包攝)하여 종족(宗族)을 수합(收合)하고 풍속(風俗)을 순후(淳厚)하게 하려면 반드시 보계(譜系)를 밝혀야 된다"하시었다. 그러니 보계(譜系)를 밝히는 것이 어찌 조상을 존경하고, 근본을 소중히 하는 의리(義理)와 관계가 되지 않겠는가?
같은 근원(根源)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사람도 바뀌고 세대(世代)도 멀어짐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서 읊은바 있고, 정(情)이 친(親)에서 나타나고 친(親)이 복(服)에서 나타남도 동파 소 식(東坡 蘇 軾)의 글에서 발표되었다. 내가 이에 느낀바 있어 임인년(壬寅年)<1542> 겨울에 비로소 수보(修譜)를 하고자 널리 묻고 찾아 모으며 년대를 밝혔으나 빠진 것이 많았었다. 곧바로 어사(御史)로 옮겼다가 이어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임명되었으나 복잡한 업무(業務)에 시달려 일을 끝내지 못하였다. 을사년(乙巳年)<1545>가을에 사화(士禍)에 연좌(連坐)되어 개소(開韶)<경북 의성>로 유배(流配)된바 귀양살이가 쓸쓸하여 할 일이 없거늘 날마다 보도(譜圖)를 대하여 정정(訂正)에 뜻을 다하였다. 한 곳에 갇히어 있으니 상의할 사람이 없었은데 때때로 왕래하는 손님과 이임(離任)하는 수령(守令)이 간혹 지나가면 반드시 족보 이야기를 꺼내서 말하고 그가 누구의 후손임을 알아서 계파(系派)를 올바르게 기록(記錄)하였다. 이렇듯 십팔년(十八年)의 오랜 세월동안 하나를 물어 둘을 증명(證明)하고 다섯을 들치어 열을 알아서 빠진 것을 많이 보충하여 이에 족보(族譜)를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거가대족(巨家大族)의 내외 계열(內外 系列)이 모두다 대승공(大丞公)의 원파(遠派)로서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조정(朝廷)에 드러난 인물이 많으니 대승공(大丞公)께서 물려주신 음덕(蔭德)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족보(族譜)를 닦아 계통을 밝히는 것이 어찌 꼭 우리 문중(門中)의 다행이라고만 할 것인가? 실로 국가(國家)의 인심(人心)을 포섭하는 대본(大本)이라 할 것이다.
류승지 혼(柳承旨 渾)과 류참의 잠(柳參議 潛)이 이 족보(族譜)를 편찬한다는 말을 듣고 간행(刊行)하여 오래도록 유전(遺傳)하고자 하던 차에 류상 지선(柳相 智善)이 마침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는지라. 상의하여 정감사 언각(鄭監司 彦慤)에게 말하여 서로 나누어 발간(發刊)하기로 의논이 되었더니 갑인년(甲寅年)<1554>에 흉년이 들어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나의 십년 뜻이 마침내 폐기되어 끝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 친히 이본(二本)을 등사(謄寫)하여 일본(一本)은 류참의(柳參議)에게 보내어 후일에 발간할 자료를 삼고, 일본(一本)은 나의 집에 소장하여 자손(子孫)들에게 전(傳)하게 하였다. 정상 종영(鄭相 宗榮)은 나의 종매서(從妹壻)인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와서 지필(紙筆)을 보내어 일본(一本)을 요구하므로 내가 등사(謄寫)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고 붓 잡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는데 이는 널리 전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아 아! 소노천(蘇老泉)이 말하기를 우리 족보(族譜)를 보는 이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라 하였으니 내가 알지 못하겠으나 이 족보를 보는 이는 스스로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가정보서 (편집본)
가정보(嘉靖譜)를 찬술(纂述)하신 첨정공 희잠(僉正公 希潛)은 대승공(大丞公) 20세손이고 충경공 량(忠景公 亮)의 6세 손이며 감찰 환(監察 煥)의 장자(長子)로 일찍이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주부(主簿). 의흥현감(義興縣監)을 거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재임중 명종(明宗)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1545>가 일어나 숙부(叔父) 좌의정 송암 관(左議政 松庵 灌)의 피화(被禍)됨에 이에 연좌되어 의성(義城)으로 유배(流配)되었다.
궁벽한 적소(謫所)에서 거의 혼자 시작한 수보(修譜)는 선남후녀(先男後女) 구별이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수록되었고, 재가(再嫁)한 여성의 후부(後夫)를 기록하여 재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시대를 알 수 있고, 외손계(外孫系)도 본손(本孫)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한없이 수록 되어 중복 수록자(약 9,000명)를 제외한 등제된 사람이 38,000명 중 90% 이상이 본손이 아닌 외손으로 100여 성씨(姓氏)에 이르니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갖는다. 또 126건의 양자(養子) 기록으로 보아 양자제도(養子制度) 실시 초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그 시대 즉, 성종(成宗 : 1469)~중종(中宗 : 1544) 동안 문과급제자 총 수는 1,595명 중의 70%나 되는 1,120명이 수록되어 지배계층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18년 동안 38,000명을 2,204면에 영락보서문(永樂譜序文)을 권두(券頭)에 시작으로 10권 1질로 수보(修譜)를 마치고 손수 3질(30권)을 썼다.
대승공(大丞公)의 내외후손(內外後孫)으로 삼도(三道)에 재임중인 수령(守令) 및 도사(都事). 판관(判官). 찰방(察訪). 병사(兵使). 수사(水使).에 이르기까지 계파(系派)의 친소(親疎)와 내외척(內外戚)의 원근(遠近)을 막논하고 각기 형편대로 300여 명이 참여와 희사(喜捨)를 받아 10권 1질(帙) 약 500,000자(字)를 48명의 각수(刻手)가 착수한지 수개월만에 완간(完刊)을 보게 되니 편찬하기 24년만에 완성되었다.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제14권 문예전고 족보편에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족보는 가정(嘉靖) 연간에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가 가장 먼저 창시 되었는데, 미세한 데까지 두루 미쳐서 외가도 자세하게 기재하였다. 때문에 뒤에 족보를 꾸미는 집에서 그 족보를 고정(考訂)하였다.> 하였고, 말미에 <~종주는 태종 갑오년에 과거하였으니 어촌의 종증손이라는 것은 더구나 말이 안 된다. 이같은 것은 빨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데, 모두 이 가정(嘉靖) 연간의 류씨의 족보에 따라 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술하였다.
1989년 석당논총(石堂論叢) 제15집에 발표한 하버드대학교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의 논문 "1476年 安東權氏族譜와 1565年 文化柳氏族譜"에서 서술 하기를 <~ 이 두 족보(族譜)가 고려말(高麗末) 1300년경으로부터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이르는 200년 내지 300년 동안 역사(歷史)를 연구(硏究)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광범위하게 이용(利用)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資料)가 된다는 점입니다. 또 한가지는, 위 두 족보(族譜)를 만든 사람들의 슬기와 노력이 참으로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두 족보, 그중에서도 특히 문화류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는 어쩌면 인류역사상(人類歷史上)에서도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가 어려울만큼 위대한 문화적 업적(文化的 業蹟)이라는 ~> 극찬하였다.
왕실도서관 장서각에 가정보 영인본(影印本) 원본 이미지 파일이 10권 1질이 있고, 2002년에 허흥식이 쓴 해제(解題)에 의하면<가정보는 고려전기 지배층의 연구에 도움되는 요소가 있지만, 고려후기부터 지배층의 과반수를 포괄하는 명문거족의 내외손(內外孫)을 포함하였다. 족보에는 자녀의 성별에 대한 기재가 출생순으로 수록되었고 내손의 계승은 물론 외손의 계승도 편찬시까지 성실하게 수록함으로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300년간의 지배층을 총 망라된 만성보(萬姓譜)라고 불릴만하다.>라 고 사료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가정보(嘉靖譜)는 문화류씨(文化柳氏)는 물론 타 성씨(他 姓氏)에서도 고정(考訂)해 오다 1976년 외손계(外孫系)인 진성이씨(眞城李氏)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의 차종손(次宗孫) 이재녕(李在寧)씨 가문에 유일본으로 전하였고, 이를 저본(底本)으로 삼아 복간(復刊)되어 보학계(譜學界)의 큰 관심을 가졌다.
合抱. 柳成鉉
자료출처- 嘉靖譜. 戊子譜. 文化柳氏寶鑑. 燃藜室記述. 石堂論叢.
참고- 문화류씨 수보연도
대동보---------
영락보 1423년
가정보 1565년
기사보 1689년
경신보 1742년
을유보 1765년
정사보 1797년
갑자보 1864년
병인보 1926년
갑인보 1974년
병진보 1976년
파보-----------
시랑공파 1996년
문숙공파 1995년
하정공파 2003년
곤산공파 2000년
문평군파 1992년
중문사공파 1991년
좌상공파 1990년
검한성공파 1994년
정숙공파 1996년
판사공파 1998년
충경공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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