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족보의 기원

아름드리 블로그 2009. 8. 23. 22:24

 

족보의 기원

족보는 한 종족의 계통을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동일 혈족의 근원을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가문(家門)의 내력을 나타낸 책(冊)이다.

즉, 성씨와 관련된 자료의 하나로서 시조(始祖)로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역사가 담겨져 있고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족보에 수록되어있어 본인과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으며, 빛나는 가문을 가진 성씨들이 자기 성이 다른 성과 혼돈 되는 것을 피하고 대대로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자기 씨족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족보는 3~5세기에 중국 육조[六朝: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수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적인 보첩을 갖게 된 것은 한(漢) 나라 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하여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 편찬의 표본이 되어왔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중국(中國)의 성씨제도 (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식 씨족제도(漢式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정착했는데, 그 시기는 신라말?고려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옛 문헌(文獻)에 보면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姓)은 그 계보(系譜)가 후대와 거의 연계되어 있지 않고 다만 신라의 종성(宗姓)과 육성(六姓)인 이(李), 최(崔), 정(鄭), 설(薛), 손(孫), 배(裵) 및 가락국계(駕洛國系)의 김해 김씨(金海金氏)만이 후대의 계보(系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부터는 귀족사이에서 가첩(家牒), 사보(私報)로 기록하여왔는데, 이러한 가계기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오면서 족보(族譜)형태를 갖춘 가승(家乘)?내외보(內外譜)?팔고조도(八高祖圖)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의종(1146~1170년) 때 김관의(金寬毅)가 작성한 왕대종록(王代宗錄), 임경숙(任景肅)이 작성한 “선원록(璿源錄)”이 처음이며, 이것은 고려왕실 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귀족은 그 씨족의 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종족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사실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한 가문에서 최초로 간행된 족보는 세종 5년(1423년)에 양도공(良度公) 류영(柳穎)이 발간한 “문화류씨 영락보(永樂譜)”이며, 그 후 성종 7년(1476년)에 권제와 권람(權擥) 부자(父子)에 의하여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가 발간되었고 명종 17년(1562년)에 류희잠(柳希潛)이 10권으로 편찬한 문화 류씨의 “가정보(嘉靖譜)”는 원본(10권)이 도산서원에 봉안되어있다.

이 가정보는 내용과 체제가 훌륭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연구자료로서 족보편찬의 모범이 되어 이후부터 여러 가문(家門)에서 족보 발간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밖에 조선초기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년),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년),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년),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년) 등의 족보가 있다.

조선 초기의 족보는 친손, 외손의 차별이 없고 선남후녀(先男後女)에 관계없이 연령순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족보를 보완 발행하는 간격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130~200년 간격을 두었고 조선중기는 50~60년, 조선후기에는 20~30년으로 그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이것은 조선초기에 동족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거나 또는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동족의식이 약했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족보는 가문숭상(家門崇尙)의 사회적 풍토로 인하여 천민과 양반 사이의 신분이 엄격했던 조선초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는 본인과 후손의 사회적인 신분을 유지 시키기 위한 증표구실로 뚜렷한 고증도 없이 미화하여 간행(刊行)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누구나 성(姓)과 본(本)을 가질 수 있게 법제화한 민적법(民籍法)이 1908년에 시행되면서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일이 있어 동족(同族) 및 상호의 혈연적 친근원소(親近遠疎)의 관계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한편 한글세대가 자라면서 한문(漢文)으로 된 족보를 볼 수 없게 되자 각 가문(家門)에서는 족보의 한글화작업을 서두르고 또한 연대(年代)를 서기(西紀)로 환산하거나 천연색 사진체제의 단순화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족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제도가 있고 족보학회가 창립된지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국제회의를 통하여 족보에 대한 여러 가지 세미나를 열고있다.

특히 하버드대학에서는 한국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고자 한국의 족보를 모두 촬영하여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하고 유타주의 각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교과목에 편성해 강의를 하며, 연구발표회를 하고 있다.

족보의 명칭은 중국은 종보(宗譜), 상류층에만 족보가 보급되어있는 일본에서는 가보(家譜), 서구에서는 “가족나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족보가 없는 민족 가운데는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족보(族譜)는 시조(始祖)로부터 역대 조상(祖上)의 얼이 담겨있는 귀중한 보감(寶鑑)이므로 조상들은 가보(家寶)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 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청정수를 떠놓고 절을 두 번 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조상을 모시듯 모셔왔다.

이처럼 소중히 여기던 족보가 해방 후 밀어닥친 서양풍습에 휘말려 족보를 봉건사상의 유물로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고 족보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우리 모두가 족보를 자주 살펴 조상들이 가문을 빛내고 지켜 온 조상숭배사상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국립중앙도서관 계보학 자료실에 6,000여종의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