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세보 해제(文化柳氏世譜 解題)
해제작성: 허흥식
내용시대: 1565
언어: 국한문 혼용
간행처: 미상
목차:
머리말
1. 서명과 편집과정
2. 서술상의 특징
3. 사료로서 가치
맺음말
머리말
氏族의 기원과 전개를 정리한 書冊을 族譜라 널리 불리며, 그밖에도 世譜와 氏譜라고도 한다. 성씨의 포괄 정도에 따라 家乘과 派譜, 그리고 大同譜라고도 하고, 간행연도의 干支를 붙여 譜라고 불리기도 한다. 모든 성씨를 모아서 만든 족보를 萬姓譜라 하며, 우리 나라에서 조선후기 이래 오늘날까지 많은 족보가 간행되었다.
족보는 기원이 오래지만 왕실의 종실이나 사대부에서 가승의 형태로 출발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족보와 사족의 가승이 존재하였다. 조선초에도 가승에서 족보로 과도기에 있는 族圖가 몇몇 가문과 불교의 法統을 적은 宗派圖가 있었고 극소수가 현존한다. 성리학에서도 학문의 계승을 밝힌 계보를 道統으로 소중하게 여겼다.
고려후기의 士族이 조선전기의 지배층으로 계승되는 사례가 많았고, 性理學이 심화되면서 父系意識이 족보의 편찬을 더욱 촉진시켰다. 조선 전기의 족보는 많은 가문에서 편찬되지 않았고 수효도 적었다. 형태와 기록된 家系의 내용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후기의 족보와는 사뭇 달랐다. 조선후기의 족보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조선전기의 자료는 1476년 간행된 安東權氏世譜(성화보라 불림)와 1565년 간행된 文化柳氏世譜(嘉靖譜라 불림)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 두 가지 족보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가장 오래된 족보라는 단순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만성보에 가까운 지배층이 가지던 조선전기의 수평적 사고의 잔재로서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족보에 대한 명칭은 成化譜나 嘉靖譜라 부르기에 마땅하지 않다는 반대도 예상된다. 그러나 가문에서도 이를 명시한 복간본에 이를 표시할 정도로 관습화되었으므로 이를 따르고자 한다. 필자는 1476년판 安東權氏世譜와 1565년판 文化柳氏世譜라 부르고 싶었으나 후손의 논문이나 복간에서 사용한 표현을 존중하고자 이를 버리지 않았다.
가정보는 성화보와 상통하는 서술형태가 많다. 두 가지 자료는 지배층의 과반수를 반영할 정도로 萬姓譜에 가깝다. 차이점으로 가정보는 성화보보다 90년 늦게 완성되었으므로 수록된 인명의 수효가 방대하고, 편찬당시에는 성리학이 심화되기 시작하여 변형된 사회구조의 여러 모습이 나타났다. 조선전기의 지배층과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정보의 편집과정과 내용상의 특성과 변화에 대한 이해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
1. 서명과 편집 과정
문화류씨가정보의 본래 명칭은 文化柳氏世譜이고 이후의 다른 족보와 구분하기 위하여 嘉靖版이란 부제를 붙여 축소복사하여 유통되었다. 文化柳氏宗親會『文化柳氏世譜-嘉靖版』景仁文化社, 1976 (非賣品)
문화류씨의 족보는 세종 5년 (1423년)에 간행한 초보가 남북분단 전가지{전까지} 구월산의 柳氏齋室에 건재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나 이를 입증할 다른 사본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정보는 인본이 외손인 眞城 李在寧씨의 가문에 유일본으로 전하였고, 이를 저본으로 삼아 복간되었다, 文化柳氏는 儒州로 불린 조선의 文化縣에서 기원한 오랜 성씨였다. 세종실록에는 來姓으로 올라 있지만 다른 곳의 내성과는 달리 土姓에 가까울 정도로 고려초부터 토착기반이 강하였다. 고려태조의 제1왕비의 父였던 柳天弓이 貞州人이었고, 그 분파가 유주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내성으로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초에는 부계의 의식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모계와 처계의 현실적인 영향력도 부계와 비등하였다. 문화류씨의 시조설화에 산신으로 범이 등장하고 王建의 선대에도 상통하는 신화가 실려 있다. 류씨의 기원지인 구월산과 왕건의 6대 先代인 虎景이 범의 구원을 받았다는 牛峯郡은 거리상으로도 멀지 않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은 곰의 화신인 여성의 출생으로 정리되었지만, 묘향산에는 흰 범(백호)의 자손으로 정리된 신화가 건재하였다.
2. 서술상의 특징
가정보의 서술은 문화류씨의 성쇠와 사상과 관련된 시대별 사회구조를 반영하였다. 족보의 기원이 조선초까지 소급되는 다른 성씨에서도 왕족을 제외하면 고려전기의 가계는 거의 단일한 부계로 계승되었다. 軍功이나 科擧에 급제한 고급관인을 배출하여 起家하면 비로소 가계가 확대하였고 가승이 마련되었다. 문화류씨도 고려중기에 급제한 고급관인을 배출하면서 지배층과 통혼권이 확대되고, 가정보가 편찬된 1565년 가까이는 중세사회의 변모까지 반영하였다.
출가승이나 재혼한 後夫에 대해서도 수록하였다. 配位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아쉬움이 있지만 이보다 약 90년 앞서 간행된 안동권씨의 가장 오래된 세보인 성화보에 실린 약 9,000인(중복된 수효를 1인으로 계산)보다 약 4배 가량의 인물인 약 38,000인(중복된 수효를 1인으로 계산)이 수록되었고, 이 가운데 1할 가량만 문화류씨이고 나머지는 모두 외손이다. 문화류씨도 남성이 여성보다 거의 갑절에 육박하는 수효이다. 이로 보면 가정보의 기록도 다른 족보나 戶籍과 마찬가지로 아주 정확한 자료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정보는 범례를 설정하였고, 이를 따라 일관된 기준으로 수록하였으나 해당 인물이 살던 시대상도 적지 않게 반영하였다. 하나는 外孫을 포함하는 功臣蔭敍의 범위를 암시한다. 다음으로 여성의 지위가 현대사회와 상통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음을 반영한다. 남녀를 출생순서로 수록하였고, 재가한 여성의 後夫를 기록하여, 재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사회의식의 일면을 반영하였다.
문화류씨의 기원은 족보의 시조보다 훨씬 올라간 전설상의 시대가 있겠으나 기록상으로는 고려초를 소급하지 못하였다. 시조 柳車達은 공신이었지만 6대까지는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였고 單系의 가승으로 유지된 시기였다. 7대에 公權이 급제하여 顯達함으로써 번영한 시대를 이루었다. 이후에 급제자가 속출하고 특히 9대의 柳璥은 급제자로서 재상에 올랐으며 최씨 정권을 종식시킨 衛社功臣이었으며 일급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이후의 내외손은 조선초까지 지배층에 널리 포진하였다. 문화류씨는 몽고와의 항전 기간에 여러 곳으로 分貫하여 豊山, 晉州, 善山, 瑞山 등지를 본관으로 삼아 각각 대성으로 발전하였다.
3. 사료로서 가치
가정보는 고려전기 지배층의 연구에 도움되는 요소가 있지만. 고려후기부터 지배층의 과반수를 포괄하는 명문거족의 內外孫을 포함하였다. 족보에는 자녀의 성별에 대한 기재가 출생순으로 수록되었고 내손의 계승은 물론 외손의 계승도 편찬시까지 성실하게 수록함으로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300년간의 지배층이 망라된 萬姓譜라고 불릴만하다.
가정보에 실린 마지막 세대는 앞선 시대와 다른 사회구조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후부와 出家僧이 없어지고 出系한 사실이 마지막 세대의 생부의 밑에 128 사례가 기록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1550년대를 기점으로 성리학이 거세게 조선사회에 침투하여 사회기저로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반영한다.
가정보는 호적과 마찬가지로 여성에 대한 기록이 소홀하다. 여성 배위는 남성의 형제보다 적은 절반은 넘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수효가 남성보다 적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또한 초기의 계보는 남성을 중심한 單系로 이어졌으므로 고려시대에는 족보가 발달하지 못하고 世系圖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단계였으나, 외손을 포함하는 지위상속에 대한 자료의 범위를 반영하였다는 사회사의 단면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가정보는 성화보와 함께 고려와 조선 전기의 사회를 규명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의 하나이다. 이에 대한 정리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자료의 복간은 물론 국외에서도 깊은 관심과 전산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Edward. W. Wagner 「1476年 安東權氏族譜와 1565年 文化柳氏族譜-그 性格과 意味에 대한 考察」『石堂論叢』15, 1989.
가정보는 만성보와 상통하므로 이를 전산화하여 조선 후기의 족보를 연결시킨다면 사회사 자료로서 확장된 영역이 마련된다는 장점이 있다.
맺음말
문화류씨 가정보는 1565년(明宗 20년)에 지배층에 속한 문화류씨 내외손 300여명이 참여하여 24년에 걸려 완성한 만성보이다. 10권 1질이 유일하게 眞城 李在寧(安東市 陶山面 土溪里 또는 下溪里)이 이를 소장하였고 1973년에 복간하여 학계에 보급되었다. 이 책은 중복되는 인명을 1인으로 계산하면 38000인에 가깝고, 8,000인의 문화류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같은 성씨가 아닌 외손이었다.
이 족보는 문화류씨를 가장 충실하게 수록하였지만 다른 가문에 대해서도 고려후기에 지배층을 배출한 다수를 망라하였고, 조선전기 지배층의 7할을 담았다. 이 족보는 유일본이 복사되었으므로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쁜 글자도 많고, 僻字가 많아 이를 전산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리라 예상된다. 또한 남성의 配位에 대한 기록이 없고, 여성의 배위는 충실한 편이지만 본관이 밝혀져 있지 않다.
여성의 배위에 성씨나 이름이 제외되거나 남성의 경우에도 이름이 빠진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부실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밝히고, 이를 보충하여 좀더 향상된 자료로 활용할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뒷받침되어야 하겠다. 또한 각 시대와 여러 국가의 계보서를 비교하여 이 족보의 우수성과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도 계속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현대의 족보는 전통시대에 지배층이나 신분을 확인하는 용도와는 다르다. 이를 학술상의 자료로 이용하는 한편 현대사회에서 급격한 전통사회의 붕괴를 대비한 처방으로도 활용할 가치가 있다. 특히 우리 나라는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많았고, 지구촌 시대에 해외의 이주가 잦으므로 개인의 소외를 극복하고 뿌리를 찾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료로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권기원,200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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