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량화, 측정량 그리고 과학과 역사학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가 취한 '계량적 연구 방식'이다. 와그너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역사 자료로서의 한국 족보>[각주:10]다. 스스로도 실패한 논문[각주:11]이라고 토로한 이 논문은 사실상 전혀 실패한 논문이 아니다. 그의 족보 연구는 계량화된 토대 없이 단편적 사실들 속에 세워져 있던 한국사 연구에 대한 도전이며, 한국사 연구의 토대를 위한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또다시 미완으로 그쳤기는 하지만 위의 논문 <조선초기 사림에 관한 연구>에서 일관되게 빛을 발한다[각주:12]. 그는 이 짧은 논문의 결론을 위해 '문화 류'씨의 족보를 근거로 사용했다.
1979년에 귀중한 문헌자료 하나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문화류씨 종친회에서 재간한 『문화류씨 세보』 가정판입니다.
도대체 이 족보가 왜 중요할까? 그것은 이 족보가 조선후기에 편찬된 족보들과는 달리 외조에 외조까지 기록할 정도로 광대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족보가 편찬된 시기가 조선초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족보가 가지는 위력은 대단한 것이 된다. 대단하다는 표현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족보에 기록된 문과급제자가 성종~중종 70년 동안 배출된 문과급제자의 7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논문은 급히 마무리되지만, 그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할 정도다.
앞서 본인은 조광조에 의해서 설치된 현량과의 급제자 28명의 가족배경을 검토하였습니다만 그 검토에서 발견된 특징은 이 문화류씨 세보를 동해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위 28명 중 26명의 이름이 이 세보에 나옵니다. 또 기묘사화의 최초의 피해자 8명중 7명의 이름이 역시 이 세보에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지 앉는 나머지 한 사람은 김 인데 그러나 문과에 급제한 그의 백숙부중의 2명의 이름이 역시 이 족보에 나와 있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사묘사화가 시작된 후 얼마 안 되어서 징계대상으로 조광조 일파 35명의 명단이 작성된 적이 있는데 이 35명중 30명의 이름이 역시 이 문화류씨보에서 발견됩니다.
역사적 해석을 사건들의 편린들만으로 조합하는 연구를 넘어 계량화된 근거로 사건을 해석해 보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작고한 전북대의 송준호 교수와 함께 '와그너-송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문과시험 급제자 1만4607명의 혼맥 및 인맥지도를 구축했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성격과 이를 통해 5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지속된 국가를 이해해보려 했던 와그너 교수의 연구는 족보의 연구를 통한 계량화 시도라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사고로 인해 더욱 위대한 빛을 발한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실제로 조선의 서북지방이 기존의 인식과는 다리 차별받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역사학 연구가 반드시 이러한 계량적 연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문학은 측정량에 기반을 두고 이론이라는 일반화를 시도하는 과학과 기본적인 성격에서 다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량화의 끌개>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또 다른 글들(예를 들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과학의 세속화 그리고 건강한 사회')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한 바를 바탕으로 냉정히 평가하자면 정량화가 가능한 곳에서 정량화를 시도하지 않는 학문은 비겁한 것이다. 정량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정량화가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정량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우리는 정량화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도구의 끝없는 진보는 그 꿈을 언젠가 실현시킨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장이 모든 인문학이 자연과학으로 환원된다는 무지한 발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각주:14] 인문학과 철학은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학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이냐 인문학이냐를 떠나 주장의 근거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점이다. 주장의 근거는 확실할 수록 좋다. 역사에 확실한 것이 없다면 합당한 것이 좋다. 합당한 것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면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방법론의 총동원이다.
국내사학계에 계량적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는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역사학도가 아닌 나는 역사학계의 연구방법론 전부를 알만큼 박학치 못하다. 따라서 그러한 연구방법론이 사용된 연구를 소개해주는 역사학도의 조언에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국내에 그러한 연구가 소수가 아닌 다수에 의해 연구되고 있었다면 에드워드 와그너의 계량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찬사를 버릴 작정이다[각주:15]. 아니 계량적 실증연구를 바탕으로 한 역사학 연구의 학풍 혹은 학파라도 있다면 나는 에드워드 와그너 따위는 언제든 잊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국내 역사학계에 대한 무지를 제쳐두고라도, 와그너 교수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접근은 흥미롭지 않은가? 자연과학의 가장 큰 특징인 '정량화'가 그 자연과학이 탄생한 곳의 전통 속에서 자란 역사학자에 의해 펼쳐 진다는 것은, 비록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아가 와그너 교수의 한국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치하고라도, 한 서양인 한국사학자의 연구방법론으로부터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과학의 전통과 문화적 전통이 어떠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일별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통섭'의 연구가 아닐까? 에드워드 윌슨의 개념을 빌려다 막무가내로 '인문학과 과학은 대화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그런 추상적이고 모호한 선동문구가 아니라, 적어도 우리만이 해볼 수 있는 그런 통섭, 그런 시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인문학의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연구대상을 정량화 할 수 있는 도구가 발견 혹은 개발되었을 때 주저하는 학문은 학문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측정량'의 제한이 없는 자연과학이 이론의 독재에 의해 불행했던 과거를 알기 때문이고, '역사' 혹은 '상식'의 제한이 없는 인문학이 신선이 되어 날아다니는 현재의 세태를 슬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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