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酬唱錄(봉황산 봉황정)

아름드리 블로그 2011. 11. 17. 12:48

  수창록(酬唱錄),  족보나 보감에 짤막하게 "수창록이 전한다"라는 문구만 있을 뿐 보지를 못했다.  궁금하던 차에 지난 13대 조 21世 필선공(弼善公) 휘 기문(起門 1564~1639) 시향 길에 족숙 재관(在寬)님이 수창록 복사본을 전해주신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며 가슴에 품고 왔다.

 

 

수창록 표지

 

  본 수창록은 문화류씨 22世, 12대 조 도사공(都事公) 휘 형국(亨國)께서 연기군 봉암마을 동쪽 봉황산(鳳凰山)에 봉황정(鳳凰亭)을 짓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동지들과 시를 주고받던 유풍(遺風)을 공의 10세 손 봉양(鳳陽) 휘 인호(寅鎬 1863~1933)께서 정리하여 1897(36歲)년에 서문을 짓고 필사한 것이다.

 

수창록 서문

 

 

 

 

- 서문 및 시문 해석 [충남대학교 교수 채하 류주환(彩霞 柳朱桓)]-------------------------------------

 

[ 다음 한 편의 시(詩)는 내 선조이신 봉황정(鳳凰亭) 수창록(酬唱錄)이다.옛날에 어지러운 광해군 때 공(=都事公)의 선고(先考)이신 오촌공(梧村公=弼善公)께서 마침내 영애를 쫓지 않고 물러나실 뜻을 가지셔서 공(=都事公)이 과거에 응시하러 가지 못하게 하셨다.병자지란(丙子之亂=병자호란)에 이르러 공(=都事公)께서 동지 10명과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려 했다. 계획이 미처 성사되기 전에 남한산성에서 갑자기 항복하여 애통함을 참고 원통함을 가슴에 품었다. 세상사에 뜻이 없어 동진강가, 봉황산의 동쪽에 정자 하나를 지었다. 자못 자연의 풍취가 있어 날마다 동지들과 함께 시를 주고받고 회포를 풀었다. 이름나고 높은 벼슬아치들과 문인, 재사(才士) 등이 액자를 걸어 읊으니 당세를 들썩이게 했다.공(=都事公)서 돌아가신 후 몇 세대 동안 후손이 권세가 줄고 장방(長房)도 그쳐서 정자를 돌보지 못해 이미 황폐하게 되고, 국화가 제멋대로 자라고 수건 상자가 말라비틀어진 것은 도무지 감추지 못하겠고, 옮겨간 여러 집이 좀이 슬고 쥐들이 침입하는 것은 능히 쓰지도 못하겠다. 선조의 유풍(遺風)과 남기신 시(詩)가 장차 사라지고 전하지 않으려 하니 어찌 통한이 아니리오. 나의 선군(先君=敬畏堂)께서 이를 한탄하여 한 권을 대략 적었으나 자세하게 기록할 수 없어 부탁을 남기셨다.그래서 불초(不肖=鳳陽)가 부친의 뜻을 받들어 감히 널리 살피고 두루 수집하여 한 부를 등사(謄寫)하였다. 비록 이름이 잃어버린 글자가 있고 구절이 빠진 곳이 있어도, 대개 이 시들을 읽고 상상하면 우리 선조께서 평생 커다란 의리(義理)를 간직하셨음과 당시 저술한 것이 약해진 나라를 근심함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찌 다행이 아니리오. 이 정자의 오묘한 뛰어난 경치는 다 연기읍의 지도에 실려 있어 여기서 다시 기록할 필요가 없다. 이만 줄이고 전말을 대략 기록하여 훗날 천하고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때의 대답으로 삼는다.]

 

 

 

 

路入蒼涯斷     푸른 물가 끝나는 곳, 길 접어드니亭臨水新江     물빛 새로운 강가에 정자가 있네,江山今得主     강산(江山)에 이제 주인이 생기니猿鶴反爲賓     원숭이와 학이 손님으로 찾아드네.

 

登臨百결丈樓  백 길(丈) 누각에 오르니樓外萬頃流     누각 밖은 너른 강이로 구나,白鷺眠沙渚     백로는 모래톱에서 자고春光增客愁     봄빛이 객수(客愁)를 더하는구나.- 鷄林後人 鄭泰周  계림후인 정태주 -

 

 

 

 

 

 

 

 

 

 

 

 

 

 

 

 

  

 

 

 

 

 

 

 

 

 

 

  도사공(都事公) 휘 형국(亨國 1596~1670) 할아버지의 행적을 잠시 살펴보면,  대승공 22世 이고, 중문사공 12世로 자는 경오(慶吾). 호는 봉황정(鳳凰亭)으로 필선공(弼善公) 휘 기문(起門)의 아드님으로 1596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셨다.  부친(필선공)의 유명(遺命)으로 과거 공부를 폐하고 병자호란(1636) 때 동지 민후건, 채종길, 최진원, 허격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북상 도중에 화전(和戰)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파병(罷兵) 한 후 군량을 관청에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고향에서 친붕(親朋)과 더불어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즐기니 이름난 관리들이 제영(題詠)하여 당세에 명망을 떨치었고, 효종(孝宗) 2년(1651)에 나라에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시지 않고 고향에서 향년 75세로 돌아가시니 연기군 남면 둔덕산 아래 시목동(枾木洞) 자좌(子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집안에 청나라 연호(年號)를 쓰지 말라는 유훈(遺訓)을 남기셨다.(문화류씨보감. 기년편고(紀年便攷) 에서 발췌)  비변사인방안지도 연기부근

 

 봉산 주변 위성사진                                              봉암마을 유래비

 

                                                          

 

내친김에 봉황산을 찾았다. 

대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연기군 서면 봉암리,  국도 1호선을 따라 조치원 쪽으로 가다 보면 행복도시(세종시) 공사 현장이 끝나가는 지역에서 오른쪽 마을이다. 처음 찾은 봉암리 마을 가운데 봉암유래비가 있고, 넓은 주차장 앞쪽 2층 건물 1층에 마을 회관과 노인정, 2층에는 서면사무소 분소가 있어 꽤 큰 반촌(班村)인 듯하다. 유래비를 음미하면서 노인정에 얼굴을 디 밀었다. 10여 분의 어르신이 담소를 나누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봉황산에 봉황정을 찾아 왔습니다."  정자 자체를 모르고 계셨다. 유래비에 있듯이 봉황산은 마을 동쪽에 있고, 산 동쪽 중턱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봉황산이고 봉암(鳳岩)이라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1932)에 봉암 제방을 쌓기 위해 산과 바위가 파헤쳐 져 지금은 형상을 찾을 수 없고 넓은 들이 생겼단다.

 

 

 

                                    

 봉황산 정상                      옛 동진강에서 바라본 봉황산               옛 동진강(금강 지류)

 

             

  직접 찾아보기 위해 마을회관을 뒤로하고 그다지 높지 않은 봉황산에 500여 보를 걸어서 올랐다. 나무가 무성해 동진강(현, 금강지류 미호천)과 큰 바위는 보이지 않고, 정상에 50여 평 남짓 편편한 곳에는 참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370여 년을 회유하며 터덜거리며 내려왔다.  새로 쌓은 제방으로 인하여 멀어진 옛 동진강은 어떨까 하여 마을을 등지고 차를 강가로 몰았다. 자동차의 후사경으로 보이는 봉황산에 바위가 보였다. 차를 세워 눈여겨보니, 특별한 형상은 없으나 큰 바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사진을 남기고 동진강에 다다랐다.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제방 안쪽은 갈수기(渴水期) 인지라 물은 없고 4대강 준설 작업의 하나로 여기저기 분주하여, 마음 또한 편치 않고 어수선할 뿐이었다.

 

 

  돌아와 생각에 잠겨본다. 

  鳳凰山에 '凰'자가 마을유래비에는 '皇'자로 바뀐 것이 약간의 의구심을 갖는다.  옛 지도에도 있듯이 동진강(東津江)은 나루터의 이름으로 지금의 동면 용호리에 위치한다. 옛날에는 동진 나루터에서 문의나, 회인 쪽으로 배를 타고 건너다녔고, 금강 하구에서 강경을 거쳐 동진 포구에 상선이 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봉황정은 그 어디의 공가문헌(公家文獻)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연기읍지에 도사공의 행적만 간략하게 실려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봉황정의 사적은 이 수창록 뿐이다. 일찍이 봉양(휘 인호) 할아버지께서 수창록을 남기지 않으셨다면, 후손 그 누구도 봉황정 그 자체도 몰랐을 것을 생각하면 꾀 다행한 일이다.  봉황정은 동진강 상류 강가이며, 봉황서원 동쪽에 봉황산이 있고 그 동편에 큰 누각이 있었다고 나온다. 지금은 제방을 쌓아 강줄기는 멀리 떨어져 있고, 큰 바위의 흔적만이 옛 봉황 바위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그 봉황 바위 윗부분에 봉황정의 주춧돌이 있을 것만 같다.

 

  중요한 것은 공의 후손이 6~8세까지는 봉암마을에 살고 계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봉암 마을을 등지고 뿔뿔이 훑어져, 지금은 단 한 가구도 사는 후손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고, 봉황정이 언제 어떻게 흔적없이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책임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후손의 몫이다. 

 

2011. 11.2013世 孫  成鉉. 

추문) 수창록의 원본은 족숙 지원(族叔 志遠)님이 보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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