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한국인의 성(姓) 275개
- “김해 김씨 376만명 1위”…본관은 고려 초 쓰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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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해 김씨로 376만7000명의 인구가 여기 속한다. 두번째는 270만명에 달하는 밀양 박씨이고 세번째는 230만명의 전주 이씨다.
네번째로 큰 성씨는 150만명의 경주 김씨 그리고 다섯번째는 120만명의 경주 이씨다. 이들 다섯개 성씨 외에 100만명이 넘는 본관 성씨는 없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95%는 120여개 성씨 600여 문중에 속해 있다. 다시 말해 나머지 150여개 성씨에 해당하는 인구는 총인구의 5%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상당수 씨족이 중국 아니면 일본·베트남·몽골 등의 외국과 신라 혹은 가야(가락국)에 원류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고구려나 백제 또는 발해에 원류를 두고 있는 씨족은 왜 찾아보기 힘들까 하는 점이다.
현재 백제계라 주장하는 씨족은 부여 서씨(夫餘徐氏)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고 발해계로 주장하는 씨족은 영순 태씨(永順太氏)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고려에 의해 멸망한 신라 왕손들은 왕건의 호족 융합정책에 따라 지배층의 지위를 계속 이어갔다.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경순왕에게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시집보낸 뒤 경주를 식읍으로 줬다. 현재 경주 김씨 족보는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경주군(慶州君)에 책봉)을 경주 김씨의 대표적 지파인 영분공파(永芬公派)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왕건의 개성(송악) 왕씨는 조선 개국 후 극심한 탄압을 받아 옥(玉)·금(琴)·마(馬)·전(田)·전(全)·김(金)씨 등으로 변성(變姓)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조선 정조 때에 와서야 문헌 등을 다시 조사해 왕씨로 성을 도로 바꾸고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반면 조선의 종성인 전주 이씨들은 합방(合邦)의 형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일제에 그다지 큰 탄압은 받지 않아 현재도 대성(大姓)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나라가 망한 뒤 수많은 사람들이 성(姓)을 버린 채 지배당하며 살았고, 일부 출세해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은 출신을 숨기거나 변조했으며 후대의 자손들은 권력의 변천에 따라 유력한 다른 씨족에 흡수돼 들어갔거나 근근이 혈족을 보존해 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완벽한 양반집안’ 존재하지 않아
조선시대는 사대외교(事大外交)가 일반적인 정치 행태의 하나였다. 따라서 자기 신분이나 평가를 높여보려는 의도로 중국 성씨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흔했다. 일부 씨족의 경우엔 초간보나 재간보에서 전혀 언급이 없다가 삼간보부터 갑자기 중국의 역사적 인물을 원조(元祖)로 기록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심할 경우에는 족보를 편찬하는 시점에서 수 천년 전 인물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특정한 어느 한 인물이 처자를 데리고 중국에서 조선으로 귀화했다고 치자. 그가 계속 조선에서 살았다면 (당시 상황을 감안했을 때) 그의 아들은 십중팔구 조선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손들도 대대로 조선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5세손 아래로 내려가면 그 자손의 혈통은 현지인의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즉 귀화한 지 100년이 지났다면 그 사람의 자손들에겐 이미 귀화국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조선 초 한반도의 인구는 1000만명을 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계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느 특정 인물이 중복돼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을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엔 신분제도가 엄격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명문이 조선에 와서 평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고, 신라나 발해의 왕족이 조선의 평민으로 살아간 경우 역시 있었다.
따라서 크게 보면 5대 이상 이 땅의 사람들과 혼사를 맺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같은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0%도 안되던 ‘양반’ 조선 말 70%로 급증
우리나라에선 어느 문중이든 그 소속원 모두가 완벽한 양반이라고 할 수 없다. 양반계급은 조선 초기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그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70%로 갑자기 늘어나게 된다. 1909년 일본의 압력으로 민적부(民籍簿:戶籍簿)를 호구단자로 대체하면서, 성이 없던 노비들에게 성과 본관(本貫)을 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우리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성을 쓴 시기는 한자가 유입된 시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성과 본관은 원래 씨족의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부족국가(部族國家) 시대에 중국식 성이 없었다 하더라도 부족의 명칭이 하나의 성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와 같은 성을 쓰게 된 것은 삼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4~5세기부터다. 하지만 성을 쓴 초기에는 본관이란 것이 없었고 필요에 의해 스스로 성씨를 정한 경우도 있었으며 임금이 정해준 사성(賜姓)도 있었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은 부여에서 남하 도중 만난 세 명에게 각각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내려줬다. 이것이 문헌으로 나타난 최초의 사성이다. 이후 신라의 3대 유리왕은 박혁거세를 추대한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裵)·설(薛)씨를 내려준다. 경주가 본관인 이들 6개 성씨는 모두 현존하는데 반해 주몽이 사성한 세 성씨는 모두 없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왕권의 흥망성쇠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사라진 성씨 포함하면 총 496개 성
우리나라 성씨의 수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이 게재돼 있고, 영조 때의 도곡 이의현이 편찬한 ‘도곡총설’에는 298성이 나와 있으며,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이,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이, 1985년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275개의 성이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1908년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우리나라에 사라진 성씨까지 합하여 모두 496성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계보 작성의 유래는 역사서에서 비롯됐다. 봉건사회에서의 역사서란 왕통의 계보(系譜)와 치적이 위주였기 때문이다. 동북아에서 왕의 계대가 아닌 명인(名人)들의 계보가 단순하기는 하나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당대(唐代)로 여겨진다.
18세기 들어 족보 편찬 일반화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왕의 계대가 아닌 이른바 옛 명가(名家)들의 계보가 단순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한 연대는 13세기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 말(14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일부 명문가의 소략한 계보와 140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간단한 계보를 초록한 단자(單子) 형태의 ‘해주오씨족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보가 체계화되어 보첩(譜牒)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현재 실물은 전하지 않으나 1423년에 만들어진 문화 류씨의 ‘영락보’ 서문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세기 초이다. 그러나 100여 씨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씨족에서 족보 편찬이 일반화된 것은 18세기이다.
16세기 이전에는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동일 혈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16세기 이전의 족보에 이름이 오를 수 있는 사람을 따져보면 외손을 포함해도 100여명이 채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대적으로 족보를 편찬했다기보다는 간단한 계보를 기록한 ‘단자’를 만든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15세기에 족보를 편찬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의 상당수는 실제로 그 시기에 족보를 편찬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씨족들이 본격적으로 초간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초간보를 발행한 명문가의 예를 들자면, 임란 때의 명 재상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 류씨는 1758년에야 초간보(무인보)를,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를 배출한 명문 덕수 이씨는 1712년에 초간보(임진보)를, 충무공의 선봉장이었던 방덕용 방응원을 배출한 온양 방씨(충무공은 온양 방씨의 사위였다)는 1781년에 초간보(신축보)를 낸다. 이들 명문도 초고(草稿)로서의 족보는 전해져 왔을 것이나 초고를 족보의 편찬이나 발행으로 주장하지 않고 있어 더욱 신선한 감흥을 전해준다.
덕수 이씨·온양 방씨 족보 ‘감흥’
이들 19세기 이전에 발행된 옛 족보는 학술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19세기에 이르면 족보에 위계(僞系)가 끼어드는 현상이 이전의 시대보다 더욱 더 심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족보를 편찬하거나 발행하지 못한 씨족도 상당수 있다. 심지어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초간보를 발행한 성씨도 있고 아직도 초간보를 내지 못한 성씨도 있다.
조선 초 학자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옛날에 번창하다가 지금 쇠잔한 가문과 옛날에 한미하다가 지금 번창한’ 75가문을 적고 있다. 이처럼 지배 가문이 많기 때문에 조선 명가를 재는 척도로 문과급제자 수가 자주 인용된다. 에드워드 와그너와 송준호(宋俊浩)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문과급제자 1만4600여명 중 300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은 5개, 200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은 12개이다.
300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李)씨가 84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358명의 안동 권(權)씨, 338명의 파평 윤씨, 322명의 남양 홍씨, 309명의 안동 김씨 순이다. 그 다음은 청주 한씨, 밀양 박씨, 광산 김씨, 연안 이씨, 여흥 민(閔)씨, 경주 김씨, 한산 이씨 순이다. 상위 50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6%를 차지하는데, 1명만 배출한 가문도 319개나 되었다.
이 중 7개 가문이 10명 이상의 정승을 배출했는데 전주 이씨가 22명으로 역시 1위, 동래 정씨가 16명으로 2위, (신)안동 김씨가 15명으로 3위이고 그 뒤를 청송 심씨 13명, 청주 한씨 12명, 파평 윤씨·여흥 민씨 각 11명 등이 잇고 있다.
조선 후기 당쟁이 격화되자 당파에 따른 명가가 등장하는데 조선 멸망 시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은 안동 김씨, 연안 이씨, 광산 김씨 등이 핵심가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한 씨족 내에서도 특정 지파에서 인재가 집중 배출될 때 명가로 평가받았다. 예를 들면 연안 이씨 판사공파는 이단상(李端相)을 비롯해 이일상(李一相), 이은상(李殷相), 이익상(李翊相) 등 상(相)자 돌림의 8상(相)을 배출했다. 광산 김씨 사계파(沙溪派)도 이런 예인데 김만기(金萬基:숙종비 인경왕후의 부친)는 ‘구운몽’의 작가인 동생 김만중(金萬重)과 형제 대제학이었을 뿐만 아니라 김춘택(金春澤)·김복택(金福澤) 등 이른바 8택(澤)의 조부이기도 했다. 김춘택은 벼슬도 없는 백두(白頭)의 신분으로 남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서인 정권을 등장시킨 갑술환국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전주 이씨, 정승 22명 배출해
조선 말기에는 안동 김씨 중 ‘장김(壯洞金氏)’이라고 불렸던 김상헌(金尙憲)의 직계 후손들이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세도정치 이전에도 김수항(金壽恒), 김수흥(金壽興) 등의 이른바 5수(壽)와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의 6창(昌) 등을 배출했는데, 김창집이 당쟁 와중에서 사형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손자(高孫子) 김조순(金祖淳)이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를 열었다.
김조순 대에 우의정 김달순(金達淳), 이조판서 김문순(金文淳), 형조판서 김희순(金羲淳) 등 모든 요직을 독차지한 이들은 아들 대인 근(根)자 항렬에 와서는 좌근(左根)·흥근(興根)이 영의정, 홍근(弘根)이 좌의정, 응근(應根)이 공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다음 병(炳)자 항렬에서는 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가 영의정, 병덕(炳德)이 좌의정, 병기(炳冀)가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조정의 주요 벼슬을 집안의 사랑에서 주물렀다. 그러나 이들 가문은 명성황후 민씨의 여흥 민씨와 함께 ‘조선 멸망의 원인’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소론은 영조 중기 이후 권력에서 소외되었지만 경주 이씨 백사파(白沙派)만은 조선 말까지 살아남아 고종 때에도 이유원(李裕元)이 영의정을 지냈다. 나라가 망하자 이 가문의 이회영(李會榮) 6형제는 전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이시영(李始榮)을 제외한 5형제가 순국(殉國)하는 우리 역사상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정리=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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