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문화류씨보감]충절을 지키신 총(叢)

아름드리 블로그 2011. 3. 21. 16:08

 

시랑공파. 영동정공(令同正公)종중(청원. 북일)

이 고을로 처음 입향하신 선조는 시랑공 당의 증손이요, 판선공감사(判善工監事) 미재공(薇齋公) 광수(光秀)의 4째 아들로 호 죽계(竹溪) 이시다.

  공은 고려말에 전직령동정(殿直令同正)을 치사(致仕)하다가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 형 문소전직(文昭殿直) 신(莘)과 더불어 부친을 쫒아 청주로 낙향 은거하였다. 공이 은거한 상당산(上黨山) 동북쪽 북일면 풍정리 시드물 부락 입구에는 공이 수식(手植)한 6백년된 느티나무가 지금도 울창하여 선조의 절의(節義)를 감개(感慨)케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공은 고려의 망국신(亡國臣)임을 자처하고 울분으로 세상 밖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심정에서 이 교목을 심어 동리를 가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나무가 풍정리 고성이씨(固城李氏) 소유로 되어있어 아쉬움이 크다.

  공은 평소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능히 임금을 위하여 죽지 못하였으니 나의 묘에 봉분(封賁)을 짓지 말지며 석물도 세우지 말고 너희들은 다들 조정에 벼슬하지 말며 이름도 세상에 전하지 말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느니라"하시고 충절을 지키다가 운명하시었다. 공의 자손은 3세에 걸쳐 공의 유언에 따라 이조(李朝)에 부거(赴擧)치 않았으며, 현손인 선전관공 윤종(潤宗)은 처가를 쫒아 보은(報恩)으로 이거하여 그 자손들의 5백년 세거지가 되고, 광양현감(光陽縣監) 한종(漢宗)과 장사랑 담종(淡宗)은 그대로 눌러 살았으니 북일(北一)이 그 후손의 6백년 세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 고을을 글지의 충향(忠鄕)이라 일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