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事이야기

문화류씨세보, 영락보를 찾아서...

아름드리 블로그 2009. 3. 22. 18:01

 양도공(良度公) 영락보(永樂譜)

 

  양도공(良度公) 생애(生涯)와 보서(譜書)의 성취(成就)

   공(公)은 서기 1379년(고려 우왕 5년 기미 19일)에 검한성부사 원현(元顯)과 파평군 해의 따님인 정부인 파평윤씨 사이에서 6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子)는 낙중(樂中)이고 호(號)는 양근재(養根齋)이며 시호(諡號)는 양도공(養度公)이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였고 자라서는 시(詩)와 부(賦)에 능하였다.

 

  세종(世宗)이 양도공(良度公)이라 시호를 내리면서 시법(諡法)에 이르기를 "온화하고 선량함을 좋아하고 즐기므로 양(良)이라 하고, 마음 가짐이 능히 의리에 맞음으로 도(度)라 한다."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가 있다.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에서 부터 종친형제들인 도관찰사 장(章), 총제 은지(殷之), 우의정 양(亮), 한성부윤 사눌(思訥), 형조판서 계문(季聞)에 이르기까지 8대를 걸친 정승(政丞)과 고관(高官)으로 화려한 문벌(門閥)의 한 가운데서 태어나 자란 공(公)으로서는 부친(父親)인 검한성부사 원현(元顯) 외에도 영의정을 지낸 친숙부 정현(廷顯)과 대제학을 지낸 하정공 관(寬)에게서도 많은 가학(家學)과 선대(先代)의 공적(功積)을 전해듣고 배웠을 것으로 생각되며, 면면(綿綿)히 전해 내려오는 화려한 가통의 원류(源流)를 찾아 기록으로 남기고 후손과 종친들에게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우기 공(公)은 구월산(九月山) 대승공 재실(大丞公 齋室)아래 동리에서 살았으니 대승공 이하 열선조(列先祖)에 대한 숭조심(崇祖心)과 종친일가들에 대한 돈목(敦睦)하는 마음도 각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공(公)은 젋어서 부터 선세(先世)의 덕업(德業)을 승술(承述)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조의 사적(事蹟)과 고금(古今)의 문적(文籍)들을 두루 상고(詳考)하고, 공(公)의 직계(直系) 안팎으로 제파(諸派) 종지(宗支)와 서차(序次)를 분별하고 수단(收單)을 통집(通集)하여 14년만인 만년(晩年)에 이르러서야 영락년간(永樂年間)인 서기 1423년 세종 5년에 단권(單卷)으로 된 보책(譜冊)을 완성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락보는 사가(私家)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아무리 많은 자손이라도 전혀 불편없이 기록할 수 있는 족보기록법(族譜記錄法)은 공(公)에 의(依)해서 창안(創案)된 것으로 타족(他族)에 까지 파급되어 통용되고 있다.

 

  당시 공(公)은 보책(譜冊) 2권을 작성하여 1권은 자손에게 전해주고, 1권은 구월산 대승공(大丞公) 재실(齋室)인 경사루(敬思樓) 천장(天障)에 소장(所藏)해 두었다고 한다. 70년 전  경진(庚辰)년에 직접 봉심(奉審)하였다는 종장님(宗丈任)이 계시나 길이 막힌지 반세기를 넘었으니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던 중 지난 가을(2008년 10월)에 재일교포 류기환 종장(宗丈)이 문화류문으로는 큰 획을 그은 구월산 대승공(大丞公) 묘소(墓所)에 참배(參拜)하여 흥분 되었다. 하지만 대승공 재실(齋室)에 소장한 영락보(永樂譜)는 확인 못하고 금(今)년(2009년 5월)에 또 한차례 방문한다는 희망만 남겼다.  북한의 정서나 문화를 생각하면 국가(북한 인민공화국)적인 차원에서 보관은 어려울 것 같으나, 귀중성으로 보아 류문(柳門) 자손이 분명 소중히 보관중 일 것이다. 다른 한권은 희잠공(希潛公)이 편수(編修)할때 까지는 전해왔던 것으로 추정되나 세구(歲久)에 지금은 현존하지 않고 다만 가정보 수부(首部)에 그 서문(序文)만이 전해올 뿐이다. 

 

  서기 1430년 (세종 12년 경술 6월 1일) 인수부윤(仁壽府尹) 재인(在任)중에 졸(卒)하시니 향년(享年) 52세였다. 세종(世宗)께서 쌀 30석과 콩 5석을 하사(下賜)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증직(贈職)과 양도공(良度公)으로 시호(諡號)를 내렸다.

 

< 영락보 서문 >

 1689년(숙종15) 기사보(己巳譜)에 수록된 판본(板本)

 

  영락보 서문(永樂譜 序文) 번역(飜譯)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성함은 좌윤공(左尹公)이 범을 구해서 살려준 음덕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겠노라.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적선(積善)한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다하니 그 적(積)이란 하루아침의 한가지 선한 일을 말함이 아니다. 예로부터 당세에 현달(顯達)하여 당대 공명을 누린이는 많겠지만, 그 자손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끊임없이 수백년의 장구함에 이른이는 실로 적다할 것이다.

 

  대저, 우리 류씨는 고려 초에 크게 일어나 우리 왕조(王朝)에 이르도록  재상(宰相)이 되어 내려오는 가통(家統)을 서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오백년의 새월을 내려왔으니 과연 이보다 더 장구함이 있겠는가. 그 파별(派別)로 말하면, 대제학 관(寬)은 도관찰사 사눌(思訥)과 함께 문간공(文簡公)에 근원을 같이 하였고, 정승 양(亮)은 정신공(貞愼公)의 현손(玄孫)이요. 총제(摠制) 은지(殷之)는 장경공(章敬公)의 증손(曾孫)이다. 기타 동원분파된 자손으로 조정(朝廷)에 종사한 이를 다 기록할 수가 없으며, 우리 문화군(文化君)은 문간공(文簡公)의 오대손으로 영의정 정현(廷顯)에 전하고 도관찰사 장(章)에 이르기까지 팔대(八代)를 이어서 더욱 가풍을 떨치었으니, 가히 여경(餘慶)이 있다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어찌 하루 아침의 한가지 선(善)만으로 이같이 되었으리요.

 

  그 연유의 근원은 시초(始初)에 대승공(大丞公)이 재산을 기우려 나라(主)를 도우심과 문간공(文簡公)이 재상이 되어 청렴하고 근심하심이 그 비로소요. 또한 문정공(文正公)이 음해하는 권신(權臣)을 죽이고 국정을 왕실에 회복케 하시고 무릎 끓고 충심으로 간하여 왕비의 화를 모면케 하시고 옥형(獄刑)에 임하시어도 바른말을 하여 중국 사신을 부끄럽게 하고, 양민들이 노예가 된 것을 알고서 양민으로 벗어나게 하시고, 금은 같은 뇌물을 거절하고 받지 않으셨으니 무릇 선(善)이란 충성(忠誠), 직언(直言), 청렴(淸廉)보다 더 큼이 없는 것인데 공(公)이 홀로 이를 겸하시었고, 정신공(貞愼公)의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이 극진 하심과 장경공(章敬公)의 굳세고 강직(强直)하심과 문화군(文化君)의 정직(正直)하심 등의 일들이 하루아침의 선(善)이 아닌 것이니 후손의 경사가 진실로 이 때문이다. 그런고로 내가 좌윤공(左尹公)의 한 꿈의 증험(證驗)때문만은 아니다 하노라.

 

  그 후손된 자는 쌓이고 쌓인 공덕(功德)을 숭모(崇慕)하고 항상 두럽고 조심스러운 뜻을 가져 선조의 공업(功業)을 고찰(考察)하고 계술(繼述)하고저, 늘 생각하고 선조의 절의(節義)를 보고 배워서 또한 앞으로도 선조와 가통에 욕됨이 없이 할 일이다. 이같이 하여 여경(餘慶)이 진실로 이에만 그치지 않으리니, 내가 오늘 이 글을 짓는 뜻이다. 이 글을 보는이는 우리가문의 세계(世系)를 과시한다고 꾸짖지 말 지어다.

 

  영락(永樂) 21년 계묘(세종 5년) 8월에 대승공(大丞公) 14세손 인, 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우대언(右代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충 춘추관 편수관(充 春秋館 編修官), 겸 판사재감사(兼 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 영(潁)은 삼가 쓰노라.

 

 2009. 3. 27

儒州春秋에서,  合抱.류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