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풍산류씨(豊山 柳氏) 서애 우천파(西涯 愚川派) 13대손 류덕님이 쓴 글임.
류씨 가운데 가장 대종(大宗)으로 여겨지는 문화 류씨(文化 柳氏)와의 관계(關係) 및 요즘 분자인류학적(分子人類學的)으로 조상(祖上)의 연원을 찾고 그 후손(後孫)들의 이동(移動) 경로(經路)를 짐작(斟酌)하게 하는 데 매우 유용(有用)한 하플로그룹(haplogroup)에 대해 알아보겠다.
풍산류씨는 류절(柳節)을 시조(始祖)로 하고, 류종혜(柳從惠)를 입향조(入鄕祖)로 하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에 위치(位置)한 풍산에 세거(世居)한 성씨(姓氏)로, 시조로부터 13세손인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나와 임진왜란(壬辰倭亂) 극복(克服)에 큰 역할(役割)을 하여 조선조(朝鮮朝) 최대(最大)의 영웅(榮雄)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수많은 명신(名臣)과 선비가 배출(輩出)되어, 비록 인구수는 13,000여명에 불과(不過)하지만, 현재(現在)까지도 자랑스러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화류씨는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여 내려오는 가문(家門)으로 고려말(高麗末)-조선초(朝鮮初)에 걸쳐 명문거족으로 위상(位相)이 높았던 집안이다.
'문화'란 현재 황해도(黃海道) 신천군(信川郡)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후삼국시기(後三國時期)에는 유주(儒州)라고 불렸으며 류차달은 여기서 호장(戶長)을 지냈다가 고려시조 왕건(王建)의 개국 과정(開國 過程)에서 큰 역할을 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는데, 그의 6세손인 류공권(柳公權)이 중앙(中央)의 관료(官僚)가 되면서 사실상(事實上)의 시조가 된다 (국내[國內]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族譜)로 알려져 있는 '가정보(嘉靖譜)'에는 그가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자손(子孫) 중 류경(柳璥)이 무신 정권(武臣 政權) 당시(當時) 김준(金俊)과 함께, 최의(崔竩)를 죽이고 왕권 수복(王權 收復)에 앞장선 공로(功勞)로 이후 문화 류씨는 조선시대(朝鮮時代)까지도 창창대로를 걷게 되는데,,
그런데, 17세기 후반(後半)의 족보부터 문화 류씨와 연안 차씨(延安 車氏)가 그 근원(根源)이 같다는 주장(主張)이 실리기 시작했고 문화 류씨도 그것에 동조(同調)하기에 이른다.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후손인 사신갑(似辛甲)이 고조선(古朝鮮)으로 동래(東來)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밑에 자리잡고 일(一)자와 토(土)자를 합쳐서 왕(王)으로 성(姓)을 삼고 왕조명(王祖明)으로 개명(改名)한 뒤 정착(定着)하였고,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일토초가위왕(一土草家爲王)이란 설(說)이 있어 고조선 준왕(準王)이 불안감(不安感)에 그를 잡아 죽이려 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은거(隱居)하여 성을 전(田)->신(申)->차(車) 세 번 변성(變姓)하였고 이름을 차무일(車無一)로 개명하였다. 그가 차씨의 시조로 여겨지며, 그의 33세손인 차승색(車承穡)이 '신라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하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한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을 암살(暗殺)하려다 실패(失敗)하여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숨어지내며 조모(祖母)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模倣)하여 류(柳)씨로 변성하였고 이름을 류색(柳穡)으로 개명한 뒤 그의 6세손인 차달(車達)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그의 장남(長男)인 효전(孝全)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차씨를 부여(附與)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고, 차남(次男)인 효금(孝金)은 류씨 성을 그대로 유지(維持)하여 문화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내용은 대단히 방대(厖大)한 스케일(scale)로 첫 출발(出發)은 고대 중국이었고 문화 류씨-연안 차씨의 연원이 결국(結局) 같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수 많은 쟁점(爭點)이 벌어지고 현재는 두 집안이 같은 연원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결론(結論)지어졌지만, 아직까지도 확실(確實)한 것은 없다.
지금까지는 문화 류씨라는 명문거족에 연안 차씨가 다소 기댄 것으로 생각되는 이야기이지만,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이 문화 류씨와 관계된 여러 다른 류씨와의 이야기이다. 문화 류씨 측에서는 고흥(高興), 본진주(本晉州), 영광(靈光) 류씨를 제외(除外)하고는 모두 류차달의 9세손으로부터 분관(分貫)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 문화 류씨가 문화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된 것은 류차달의 8대손이며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명신이었으며 최씨무인정권기(崔氏武人政權期) 때 류경(柳璥)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이 되고 그 공으로 유주(儒州)를 문화현(縣)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비롯된다. 그러나 대부분(大部分)의 견해(見解)로는 이미 이들을 고려초부터 문화 지역(地域)의 토착 세력(土着 勢力)으로 본다. 이 문화 류씨는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활약(活躍)한 인물(人物)들이었던 류차달의 11,13,14세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15개파로 나뉘게 되는데, 이 중 7세손이었던 류공권의 큰 아들 류언침(柳彦沈)의 후손들을 갑파(甲派), 둘째 아들 류택(柳澤)의 후손들을 을파(乙派)라고 하여, 이 갑파와 을파로부터 15개파가 분파(分派)됨과 동시(同時)에 갑파로부터 몇 개의 분파가 이관(移貫)되었다고 한다. 10세인 류자성(柳資成)의 후손 중 14세 류절(柳節)의 후손이 풍산 류씨, 10세인 류성간(柳成澗)의 후손이 서산(瑞山) 류씨, 10세인 류원비(柳元庇)의 후손 중 13세 류해(柳邂)의 후손이 선산(善山) 류씨, 10세인 류양재(柳良梓)의 후손이 전주(全州) 류씨, 10세인 류인비(柳仁庇)의 후손이 진주(晉州) 류씨로 분관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른 본관은 막론(莫論)하고, 필자(筆者)가 풍산 류문(門)인 고로, 풍산 류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한다.
문화 류씨에서는 지극히 당연(當然)하게, 류차달의 10세손인 류자성으로부터 문화 류씨로 부터 갈라졌고, 이 류자성의 4세손인 류절로부터 풍산 류씨가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풍산 류씨의 시조는 류절이므로, 혹자(或者)들은, "아, 류절의 4대조가 류자성이고, 류자성의 10대조가 류차달이므로, 확실히 문화 류씨에서 풍산 류씨가 갈라져 나왔구나,, 한 집안일세..."라고 할지 모른다. 필자도 그러했고, 현재도 상당수(相當數)의 풍산 류씨나 문화 류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뭔가 석연(釋然)치 않은 구석이 있다.
류차달은 880년 태생(胎生)으로 나오는데, 고려 개국공신으로 유주의 호장이었으므로 고려 통일기(統一期)의 나이를 대략 50세 전후로 본다면, 얼추 들어맞게 된다. 따라서, 류차달을 880년생으로 가정(假定)하고, 이들의 연대(年代)를 계산(計算)해보자. 한 세대를 30±5년으로 본다면, 류차달의 10세손이었던 류자성은 대략 류차달보다 300(±50)년 이후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류자성은 1180±50년 쯤 태어나게 된다. 이 류자성의 4세손이 류절이므로 류절은 1300±70년경 태어난 사람이 된다. 이 류절의 4세손이 류백으로 충렬왕(忠烈王) 때 출사(出仕)하여 가문(家門)을 일으키게 되는 중요(重要)한 분인데, 충렬왕 때가 바로 1274-1308년이다. 그런데, 류백은 류절의 4세손이므로, 적어도 1420±90년에 태어난 사람이어야 하는데, 뭔가 맞지 않게 된다. 크게 봐서, 세대(世代)를 거듭하여 20세때 계속(繼續)해서 자손을 보았다고 하면 류차달과 류백간의 나이 차(差)는 18세손이므로 360년의 터울이 있고 880+360=1240년생이 되어 가능(可能)하다고 볼 수는 있으나, 사실 이렇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고 본다. 따라서, 뭔가 끼워 맞춘 듯한 계보(系譜)이지 않을까 생각되는 바이다. 밑의 글을 한 번 읽어 보자.
초간 문간해(草澗 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동한(東韓) 명벌 20성(姓)중에 류씨를 9위에 넣고 있으며, 우암
문화 류씨 가정보 (文化柳氏嘉靖譜)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oychang/140783887)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류씨는 이미 고려조에 뛰어난 성씨로 여겨졌고, 그의 근본(根本)은 문화 류씨였다. 따라서, 풍산 류씨를 개창(開昌)할 때 류절이란 사람이 현 부평의 호장이었고 근처 출신(문화)으로 지극(至極)히 유명했으며 현재도 유명한 이 성씨를 차용(借用)했고, 이들 문화 류씨의 후손에서 갈라져 나왔다...라고 하는 것이 집안을 드높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렇게 시작(始作)은 미약(微弱)하였으나 후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며 특히 임진왜란 극복의 최고 공신인 서애 류성룡이 배출된 후로는 오히려 끝은 더 창대(昌大)해 진 것 같다. 나름 유명한 집안으로 발돋움한 이후에도 문화 류씨와의 연계성(連繫性)을 강조(强調)하며 끈끈한 관계를 보이다가 최근(最近) 들어서는 이들과의 연계성을 부인(否認)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류차달/류자성의 후손임을 부정하고, 류절만을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을 확립(確立)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런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많은 실정(實情)이며 누구의 말이 옳을지 알 수 없다. 요즘 들어 각광(脚光)받는 하플로그룹 검사(檢査) 한 번이면 모든 것이 결정(決定)될 텐데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얼마 전 하플로그룹 검사를 용기(勇氣)있게 마쳤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으나 어떤 경로를 거치고 어떻게 분화(分化)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설레임도 있었기에 이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結果)는...
Y-chromosome haplogroup O2b*가 나왔다. O2b는 지난 번 포스팅에서 언급(言及)한 바가 있지만 약 1 만년전 황해평원(黃海平原) 또는 산동반도(山東半島) 또는 요동반도(遼東半島)에서 O2*에서 분화한 것으로 추정(推定)되며 만주(滿洲)와 한반도(韓半島)에서 번성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살아온 것으로 꼽히며 현재 한국과 일본의 주류 하플로그룹으로 여겨진다. 삼한(三韓)지역의 주류(主流) 하플로그룹으로 꼽히며 일본에서는 더 주류로 꼽히는 O2b1과는 분화된 장소(場所)나 시간(時間)이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자인류학논단의 초재님 분석으로는 O2b*이긴 하지만 다른 O2b*와는 Y-STR에서 차이가 있으며 상당히 드문 형태(形態)의 O2b*로 여겨진다고 하며, 필자의 추측(推測)으론 조기(早期)에 이들 기존 O2b*와 분리(分離)된 뒤 독자적(獨自的)인 경로를 밟은 것으로 생각된다. 거의 드문 유형(類型)의 O2b* 중에서도 필자의 것과 12개의 marker에서 똑 같은 결과가 한 명 있으니 바로 안동에서 검사된 sample이었다. 이 분이 풍산 류씨라고 단정(斷定)지을 수는 없으나 필자의 O2b* 유형이 매우 드문 점, 똑 같은 sample이 안동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여전히 안동에 집성촌(集姓村)을 갖고 있는 풍산 류씨의 후손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따라서, 필자가 확실한 풍산 류씨의 후손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 풍산 류씨의 주류 하플로그룹은 O2b*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재님 말씀에 따르면, 워낙 특이한 유형이라 구별(區別)되는 하위(河位) SNP이 발견(發見)된다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하였다(예를 들면, O2b2a1a1a...). 필자의 추측으론, 우리 집안은 아마 부평 근처(近處)에 터를 잡고 살아온 예맥 계열(濊貊 系列)로서 삼국시대엔 고구려(高句麗) 또는 백제(百濟)의 한 백성이었을 것이며, 귀족(貴族)은 아니었을 것이다 (O2b*였으므로 M117이나 M134로 추정되는 고구려나 백제의 귀족계열을 아니었으리라..). 이후 신라 통일 후 그 지역에 그대로 머물러 백성으로 살다가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호장으로 주도권(主導權)을 잡고 드디어 명문거족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필자의 하플로그룹 (O2b* SRY465) (출처: FamilytreeDNA site)
문화 류씨와의 진정(眞正)한 관계를 알아보려면, 문화 류씨 sample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미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 결과가 확실해진다면, 우리 집안과 문화 류씨와의 실제의 관계가 정립(定立)되리라 본다. 쓸모 없는 논쟁(論爭)보다는 확실한 검사가 이래서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물론, 결과가 허무(虛無)하게 나올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풍산 류씨의 연원과 주요 인물, 문화 류씨와의 관계 및 하플로그룹 추정까지 알아보았다. 아직까지 모자란 것이 많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만, 거북이 경주(競走)하는 심정(心情)으로 꾸준히 도전(挑戰)한다면 지금까지 몰랐던 것들을 알 수 있고 역사학적(歷史學的) 고고학적(考古學的) 결과와 matching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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